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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중국문화가 또 한번 휘황했던 송조(宋朝) (12)

(960년—1279년)

심연(心緣)

【정견망】

과학기술 편

나침반, 화약, 인쇄술

북송 시기에 이르면 나침반의 사용이 이미 매우 보편화되어 있었고, 당시에는 천연 자석을 이용하여 인공으로 자화시키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인공 자석의 자성(磁性)은 천연 자석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동시에 나침반의 장치 방면에서도 큰 개량이 이루어져 자침을 등심초(燈心草)에 꿰어 수면에 띄우거나 손톱 위에 놓거나 그릇 테두리에 놓거나 명주실에 매달았다. 유명한 과학자 심괄(沈括)은 또한 자침이 가리키는 방향이 정남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치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것은 지구의 자북 편각(偏角)에 대한 최초 기록이다.

송대, 특히 남송 시기에 해외무역은 전례 없이 발달했다. 바다를 건너 멀리 항해하는 곤란을 극복하고 항해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북송 말년에 이미 나침반을 항해에 응용하였다.

송대에 채광, 제련 등 부문 수공업의 발전과 요(遼), 서하(西夏), 금(金)과의 전쟁이 빈번해짐에 따라 화약과 화기의 제조 기술 역시 새로운 단계로 향상되었다.

북송 때 수도인 변경(汴京)에는 화약과 화기(火器)를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관영 수공업 공장이 있었다. 송인종(宋仁宗) 때 증공량(曾公亮)이 주편한 <무경총요(武經總要)>에는 유황, 염초(질산칼륨), 송진 및 기타 서로 다른 물질을 일정한 비율과 조작 절차에 따라 배합하여 서로 다른 용도의 화약을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화약 배합법과 공정 절차에 대한 기록이다.

북송 때 화약을 이용하여 제조한 화기는 주로 연소성이었으나, 그 뒤를 이어 폭발성 화기도 대량으로 제조되고 응용되었다. 남송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관(管) 모양의 화기를 발명했으니, 예컨대 1132년(소흥 2년) 군사 기술 전문가 진규(陳規)가 덕안(德安, 지금의 호북 안륙)을 방어할 때 화창(火槍)을 만들어 대나무 통 속에 화약을 넣고 불을 붙여 뿜어내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사격용 관 모양 화기의 시조이다. 1259년(개경 원년) 송나라 군대와 몽골 군대가 회하(淮河) 전선에서 교전할 때 수춘부(壽春府, 안휘 수현) 군민들이 ‘돌화창(突火槍)’이라 불리는 화기를 만들어, 대나무 통 속에 화약을 넣은 뒤 다시 자과(子窠)를 장치하고 화약의 힘으로 자과를 발사해 냈는데, 자과는 총알과 비슷한 성질을 지녀 돌멩이와 쇠 덩어리 등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이른 원시 보총(步銃)이다. 나중에 대나무 통을 쇠 파이프나 구리 파이프 마개로 바꾸었다.

당조 후기 이래로 조판 인쇄술은 문화의 전파, 보급 및 향상에 있어 갈수록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북송 인종 경력(慶曆) 연간에 포의(布衣, 평민) 출신인 비승(畢昇)은 또 조판 인쇄술의 기초 위에 활자 인쇄술을 발명했다. 비승의 이러한 발명은 인쇄 역사상 시대를 가르는 기술 혁신이었으며, 세계 문명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건축의 발전

송나라는 건축 기술 방면에서도 비교적 큰 발전을 이룩했다. 북송의 이계(李誡)가 편찬한 <영조법식(營造法式)>은 바로 이 시기의 건축 기술 경험을 총결한 것이다.

이계(李誡, 약 1060년~1110년)는 자가 명중(明仲)이며 정주(鄭州) 신정(新鄭) 사람이다. 그는 북송 조정의 장작감(將作監)에서 십여 년간 근무하며 적지 않은 토목 공사를 주관하여 풍부한 건축 경험을 축적했다. 동시에 그는 또 ‘많은 서적을 고증(考究)’하여 역대 문헌 중에 기록된 건축 공사에 관한 내용을 파고들고 건축 공인들의 지혜를 집중하여, 30여 년의 세월을 들여 북송 초기의 유명한 장인 유호(喻皓)의 <목경(木經)> 3권(이미 유실됨)의 기초 위에 건축학상의 거작인 <영조법식>을 완성했다. 이 책은 총 34권으로 명례(名例), 제도(制度), 공한료례(功限料例), 도양(圖樣)의 네 부분으로 나뉜다. 이 책은 대목작(大木作)에 대한 서술이 아주 상세하다. 책 속에는 또 문자 설명에 맞추어 각종 그림을 그려 넣었다. <영조법식>의 출현은 중국 고대 건축 기술이 이미 비교적 높은 단계로 발전했음을 상징하며, 그것은 중국과 세계 건축사상의 귀중한 문헌이다.

하남성 개봉시 동남쪽 교외에 위치한 곳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번탑(繁塔)이 있다. 북송 때 쓰인 <북도간오지(北道刊誤志)>의 기록에 따르면 번탑은 송 개보(開寶) 연간(968년~975년)에 당시 조정 관료들이 발의하고 민간에서 자금을 모아 건립한 것으로, 현존하는 번탑 동벽에 박혀 있는 석각 중에는 당시 탑 건립에 재물을 기부한 이들의 이름과 나이가 여전히 남아 있다. 978년에 이르러서야 번탑은 높은 탑 기단을 세우게 되었고, 982년, 심지어 순화(淳化) 원년(990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기부했다. 그러므로 탑 내부의 비석 기록에 근거해 추측하건대 번탑은 대략 개보 중기에 건립이 시작되어 송 순화 원년(990년) 이후에 준공되었다. 다시 말해 건립 계획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 앞뒤로 20여 년의 세월을 거친 것이다.

송대에 번탑이 준공되었을 당시에는 원래 속이 빈 누각(樓閣)식 목조 구조였으며, 등변 육각형 9층의 보탑형(寶塔型)으로 높이가 240척(약 7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불탑이라 극히 장관이었다.

번탑의 또 다른 예술적 성취는 탑의 내외부 벽에 모두 불상을 박아 넣은 것으로, 그것은 서로 다른 유약을 입힌 회색 네모 벽돌을 쌓아 만들어졌으며 탑 겉면의 벽돌마다 모두 사방 1척이고 오목한 원형 불감(佛龕)으로 되어 있으며 함 속에 불상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어 한 벽돌에 한 불상씩 가부좌를 틀고 그 안에 자리 잡았다. 불상의 자세, 옷차림, 표정이 제각각 특색이 있어 불상이 단련좌(單蓮座) 혹은 속요련좌(束腰蓮座 허리가 잘록한 연꽃 좌대) 위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이도 있었고, 온갖 법기(法器)를 손에 쥔 불상도 있었으며, 흔히 보는 푸른 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흰 코끼리를 탄 보현 보살도 있었고, 팔이 6개 혹은 12개인 관음보살 및 악기 연주자 등등 7천여 구에 가까운 조각상이 있었다. 불상의 표정이 세밀하고 생동감이 넘치며 개개의 형상이 선명하고 생생하며 생김새가 천태만상이라 번탑을 매우 장관이 되도록 돋보이게 했으며, 송대 조각가들의 뛰어난 기예를 보여준다.

번탑 내 각 층의 벽과 올라가는 통로 위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많은 송나라의 석각(石刻) 제기가 있으며 각종 비각(碑刻) 200여 방이 박혀 있는데 비각은 송대의 것이 주를 이룬다. 그중 송대 서예가로 낙양 사람인 조인안(趙仁安)이 쓴 ‘삼경(三經)’이 가장 유명하다. 각석 사방에는 연꽃잎이 피어나는 무늬 패턴의 장식이 조각되어 있어 조각 기예가 정교하고 신묘하다.

의학의 발전

양송의 의약학(醫藥學)은 당대(唐代)의 기초 위에서 한 걸음 더 발전했다. 당시 외국 약물이 대거 중국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송대 관찬 및 사찬 의약 서적 속에서는 새로운 약재 품종이 끊임없이 늘어났다. 송태조 때 편찬된 <개보본경(開寶本草)>은 <당본초>보다 새 약재 133종을 더 늘렸고, 인종 때 수정한 <가우보주본초(嘉祐補注本草)>는 또 새 약재 82종을 늘렸다. 북송 말년에 편찬된 <정화경사증류본초(政和經史證類本草)>에 이르면 추가된 약품이 무려 628종에 달했다.

남송 사람 송자(宋慈, 약 1186년~1249년)가 지은 <세원집록(洗冤集錄)>은 시체를 검사하는 각종 방법을 체계적으로 논술한 것으로, 세계 최초의 사법(司法) 검사 전문 서적이며, 프랑스어, 영어, 네덜란드어, 독일어, 한국, 일본어, 러시아어 등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전파되었으며 법의학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양송 시기에 침구학(針灸學) 역시 거대한 발전을 이룩했다. 중국 침구학이 비록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기는 하나 오랜 세월 동안 필사되어 전해지는 바람에 그 속에 실린 경락과 유혈(兪穴)의 부위가 매우 문란해졌다. 송인종 초년에 침구학자 왕유일(王惟一)이 역대 침구 의가들의 경험을 총결하여 침구 혈위를 통일하였고, 구리 장인과의 협력 하에 인체 모형 두 구를 구리로 주조하도록 설계하여 경혈을 새기고 이름을 표기해 두어 침구 교수용으로 삼았다. 동시에 <신주동인유혈침구도경(新鑄銅人兪穴針灸圖經)> 3권을 지었으며, 머지않아 <도경>을 돌에 새겨 전파함으로써 이후에 침구를 배우는 이들이 유혈 부위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남송의 명의 이고(李杲, 1180년~1251년)는 자가 명지(明之)이며 호가 동원(東垣)으로, 후인들은 대개 그를 높여 ‘동원노인(東垣老人)’이라 불렀다. 유명한 ‘송원사대가(宋元四大家)’ 중 한 명이다.

이동원은 어릴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장성해서는 말에 충성스럽고 신용이 있었으며 행동이 돈독해서 사람들의 공경을 받았다. 그는 대인관계에 있어 매우 신중하여 사람들과 접촉할 때 농담하는 법이 없었다. 시장에서 여러 사람들이 오락으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기던 장소는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어서 마치 태생이 본래 그러한 것 같았다.

동원의 어머니 왕씨가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향리의 좋은 의사 여러 명을 불러 고치게 했다. 그것이 한증(寒證)인지 열증(熱證)인지 그들의 주장이 제각기 달랐고 온갖 약물을 다 써보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며, 마침내 무슨 병인지도 알아내지 못한 채 돌아가시고 말았다. 동원은 자신이 의술을 알지 못해 모친을 잃었다고 통탄하고 뉘우치며 마침내 뜻을 세워 “만약 고명한 의사를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힘써 의술을 배워서 이것으로써 영원히 자신의 과오를 기록하겠다”라고 소원을 품었다.

역주(易州)의 장원소(張元素) 선생이 세상사람들로부터 ‘결고노인(潔古老人)’이라 불리며 의술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많은 재물을 바치며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는 장원소의 의술을 완전히 통달했다.

이동원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기에 의술로 생계를 꾸릴 필요가 없었고, 게다가 그는 자신의 품행과 절조를 중시했기 때문에 쉽게 자신을 낮추어 남을 위해 병을 고치려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도 감히 그를 의사라 부르지 못했다. 사대부들이 병에 걸렸을 때도 비록 매우 위급하고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대개 감히 그를 청해 진찰을 받지 못했다. 그는 애초에 의술을 자신의 명분으로 삼는 일을 하지 않았기에 많은 이들이 그가 의술에 정통하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나중에 그는 몽골 군대의 침입을 피해 변경으로 갔다가 비로소 의술에 힘입어 공경 관료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그가 병을 치료할 때 효과가 뚜렷했던 사례(驗案)들은 다른 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아래의 내용은 단지 역사책에 실려 있거나 명가의 붓끝에서 나온 몇 가지 사례일 뿐이다.

① 북경 사람 왕선보(王善甫)는 수도의 주관(酒官)이었는데 소변이 나오지 않는 병에 걸려 눈동자가 튀어나오고 배가 북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으며 무릎 윗부분의 피부와 살이 터질 듯이 단단해져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다른 의사들은 감담삼설(甘淡滲泄 맛이 달고 담담하며 붓기를 빼는 약)의 이뇨제를 썼으나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이동원은 그 의사들에게 말했다.

“이 병은 이미 아주 깊어졌소. <내경>에 이르기를 ‘방광은 진액의 부(府)이니 반드시 기화(氣化)가 되어야 소변을 배설할 수 있다’고 했소. 지금 소변을 빼는 약제를 썼으니 병이 도리어 가중된 것은 바로 기(氣)가 화(化)하지 못한 원인 때문이오. 계현자(啟玄子 왕빙)가 이르기를 ‘양이 없으면 음이 생길 수 없고, 음이 없으면 양이 화할 수 없다고 했소. 감담삼설의 약은 모두 양약(陽藥)이니 양만 있고 음이 없는데 양이 어찌 화할 수 있겠는가?’“

다음 날 이동원이 음약(陰藥)을 지어 환자에게 복용하게 하였는데, 결과는 단 한 제(劑 하루치)의 약을 복용했을 뿐인데 병이 나았다.

② 서대연(西台掾 어사대에 속한 관직)의 소군서(蕭君瑞)가 2월 중에 상한(傷寒)에 걸려 열이 났고, 의사가 그에게 ‘백호탕(白虎湯)’을 지어주었더니 그 결과 환자의 안색이 먹물처럼 새까맣게 변했고 본래의 증상은 보이지 않았으며 맥상이 침세(沈細)하고 소변실금(小便失禁 소변을 조절하지 못하는 증상)이 일어났다. 이동원은 처음에 의사가 무슨 약을 썼는지 몰랐다가 진단한 후 이르기를, “이것은 입하(立夏) 전에 백호탕을 잘못 사용해 빚어진 잘못이다. 백호탕은 대한대량(大寒大涼)한 것으로 경기(經氣)를 운행하는 약이 아니며 오직 부장(腑臟)의 기운을 차갑게 할 뿐이니, 만약 운용에 숙달하지 못하면 상한 본병(本病)이 경락 사이에 숨어들게 만든다. 어떤 이는 또 대열(大熱)의 약으로 구제하려 드는데 그러면 음기를 상하게 하여 또 다른 병증을 파생시키니, 이것은 백호탕을 구제하는 방법이 아니다. 내가 약을 쓴다면 양기를 북돋우고 경기를 운행하는 따뜻한 온약(溫藥)을 쓰겠다”라고 했다.

어떤 이가 그를 힐난하며, “백호탕은 몹시 찬 약인데 아주 뜨거운 열약을 쓰지 않고 어떻게 구제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그렇게 치료해서 어찌 되겠는가?”라고 하자 이동원이 말했다.

“병이 경락 사이에 숨어 있는데 양기가 오르지 않으면 경기가 운행되지 못하니, 경기가 운행된 후에 본증이 다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본증에 또 무슨 치료하기 어려운 점이 있겠는가?“

나중에 과연 이동원의 말대로 병을 치료해 나았다.

③ 위방언(魏邦彥)의 아내는 갑자기 눈에 예자(翳子, 눈에 난 군살이나 백내장 같은 것)가 생겨 아래에서 위로 자라났는데 녹색이며 붓고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동원이 “예자가 아래에서 위로 자니 병이 양명경(陽明經)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녹색은 오색 중의 정색(正色)이 아니니 그것은 폐와 신이 함께 병들어 일어난 사기(邪気)이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곧 폐와 신의 사기를 사(瀉)하고 양명경에 들어가는 약을 좌사약(佐使藥)으로 삼았다. 약을 복용하자 본래 이미 효과를 보았고 나중에 병이 또 세 차례나 재발했으며 게다가 사기가 찾아온 경맥이 다름에 따라 예자의 색깔도 각기 달랐다.

이에 이동원이 이르기를, “각 경맥이 모두 눈(眼目)에 속해 있으니 경맥에 병이 들면 눈도 그에 따르는 법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경락이 조화롭지 못한 것이며, 월경이 조화롭지 못하면 눈의 병이 낫지 않는다”라고 했다. 물어보니 과연 그러했다. 그리하여 이동원이 말한 대로 치료하였더니 병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았다.

이동원이 병을 치료한 정황은 대개 이와 같았다. 그는 특히 상한(傷寒), 응저(癰疽), 안과 질병에 능숙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신의(神醫)로 여겼다. 그가 지은 의서 역시 세상에 널리 전파되었다.

임진(1232)년에 그는 황하를 건너 북상하여 동평(東平)에 잠시 거주하다가 갑진년(1244)에야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그가 친구 주덕보(周德父, 자는 도운都運)에게 말하기를, “나는 늙어서 의술을 후세에 전하고 싶으나 적절한 사람을 찾기 어려우니 어찌해야 하겠는가?”라 하자, 주덕보가 이르기를, “염태(廉台)의 나천익(羅天益, 자는 겸보謙甫)이 성품과 품행이 돈후하고 소박하며, 늘 자신이 배운 의술이 순수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배움에 뜻을 두고 있으니 당신이 의도를 전수하고자 한다면 이 사람이 아마 괜찮을 겁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어느 날 주덕보가 나천익과 함께 와서 이동원을 뵈었다. 이동원이 만나자마자 물었다.

“너는 돈을 벌기 위해 의술을 배우러 온 의사냐, 아니면 의도(醫道)를 전수받기 위해 온 의사냐?“

나천익이 “오직 의도를 전수받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곧바로 이동원을 따라 배웠는데 생활에 필요한 음식이며 물품은 모두 이동원이 공급해 주었다.

3년 동안 배운 후, 그가 오랫동안 배우며 게을리하지 않는 정신을 가상히 여긴 이동원이 그에게 백은 20량을 주며 말했다.

“나는 네 생활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네가 생각이 흔들려 중도에 포기할까 두렵구나. 이 은을 가지고 네 처자식의 생활비로 쓰도록 하여라.” 나천익이 극구 사양하며 받지 않자 이동원이 말했다.

“나는 의도(醫道)라는 이토록 큰일도 아끼지 않는데 어찌 이런 돈 따위의 작은 일을 아끼겠느냐? 너는 더 이상 사양하지 말거라.”

임종하기 전에 이동원은 평생 자신이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고 교정하여 권별로 함에 넣고 종류에 따라 편집해 서안(書案) 위에 배열한 뒤 나천익에게 당부하며 말했다.

“이 책들을 너에게 넘겨주는 것은 나 이명지(李明之)를 위해서도 아니요, 너 나천익을 위해서도 아니며, 천하 후세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 결코 매몰시켜서는 안 되며 널리 보급하여 베풀어 쓰이게 하거라.“

이동원은 신해년(1251년)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2세였다.

이동원은 <황제내경>, <황제팔십일난경> 등의 고전 의학 서적에 대해 매우 깊은 연구를 했으며 그의 많은 창조적인 의학 이론들은 모두 <황제내경>의 기초 위에서 자신의 실제 경험을 결합하여 총결해 낸 것들이었다.

당시의 사회 환경은 전쟁 등의 요인으로 인해 매우 불안정하였고, 정신적 자극, 부적절한 음식, 때에 맞지 않는 기거, 부적절한 온도 등의 원인으로 인해 일어나는 병이 많았는데, 이러한 병들은 상한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치료하면 대개 낫지 않았다. 이동원은 실천 속에서 이러한 질병의 발병 요인들이 사람의 원기를 모두 소모시켜 내상병(內傷病)의 병인이 된다는 것을 체득하였으므로 ‘내상학설(內傷學說)’을 제기했다. 이후에 병을 ‘외감(外感)’과 ‘내상(內傷)’으로 나누는 것은 후세 의가들이 변증(辨證)하는 커다란 원칙이 되었다.

이동원은 ‘비위(脾胃)’가 인체의 건강에서 차지하는 중요 작용에 대해 독특하고도 심오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장원소(張元素)의 장부병기학설(臟腑病機學說)에서 영감을 얻고 <황제내경> 중의 “사람은 수곡을 근본으로 삼는다”, “위기(胃氣)가 있으면 살고 위기가 없으면 죽는다”는 설을 결합하여, 비위가 인체의 생리 활동에 가장 긴요함을 인식하고 “비위가 안에서 상하면 온갖 병이 생겨난다(內傷脾胃 百病由生)”는 이론을 제기했다. 그리고 비위가 안에서 상하는 병인에 대해서는, 그것이 “먼저 희(喜), 노(怒), 비(悲), 우(憂), 공(恐)의 다섯 도둑(오적)에게 상한 뒤에 위기(胃氣)가 행해지지 않으며, 육체적 노역과 음식이 그 뒤를 이으므로 원기가 이에 상하게 된다”고 여겼다.

이로 보아 그는 사람의 정서 변화 등 정신적 요소가 비위 내상의 발병 과정 중에서 선도적 작용을 일으킨다는 점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으며, 육체적 노역이 과도하고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두 가지 중요한 발병 요인임을 알았다.

이동원의 저서는 30여 만 자에 달하는 <상한회요(傷寒會要)> 외에도 주로 <의학발명(醫學發明)>, <비위론(脾胃論)>, <내외상변혹론(內外傷辨惑論)>, <난실비장(蘭室秘藏)>, <차사난지(此事難知)>, <약상론(藥象論)> 등이 있다. 그중 <비위론>, <내외상변혹론>, <난실비장>은 후세 의가들에게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 특히 <비위론>은 한의학 역사상의 ‘보토파(補土派)'(일명 ‘온보파’)를 창립하여 장부변증과 삼초변증으로 진료하고 치료하는 방법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후세의 유의(儒醫)들이 유학 학설을 의학의 이치에 섞어 넣는 데 커다란 편의를 열어주었다. “비위 조절은 의학 중의 왕도(王道)요, 음식 절제는 병을 물리치는 양방(良方)”이라는 말은 이미 후세 유의들의 금언이 되었다.

천문학 및 수학의 성취

북송 시기에 이르러 심괄(沈括, 1032년~1096년)이라는 저명한 과학자가 배출되었다. 심괄은 자가 존중(存中)이며 북송 항주 전당(錢塘) 사람으로, 그가 말년에 지은 <몽계필담(夢溪筆談)> 30권이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어 전해진다.

<필담>에서 저자는 중국 고대, 특히 북송 시기의 자연과학이 도달한 휘황찬란한 성취를 총결하였으며, 내용은 천문,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지질, 지리, 기상, 의약 및 공학 기술 등의 매우 광범위한 영역을 망라했다.

심괄의 과학적 성취는 천문 역법(曆法) 방면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그는 사천감(司天監)을 겸직하던 기간에 파격적으로 평민 출신의 천문역산가 위박(衛樸)을 사천감에 임명하여 <봉원력(奉元曆)> 편수를 주관하게 하였고, 365.24358일을 1회귀년(回歸年)으로 삼았으니 비록 오늘날 실측한 365.2422일보다는 약간 크기는 하나 당시 통용되던 역법보다는 훨씬 정밀했다. 동시에 그는 또 예전 역법을 철저히 개혁하자고 주장했으니, 즉 절기에 따라 월을 정하고 입춘을 원단(元旦 1월 1일)으로 삼으며 달의 차고 기어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시령(時令) 절기만 따져서, 큰달은 31일, 작은달은 30일로 하여 큰달과 작은달이 서로 교대로 오게 하고 윤달을 두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계절 24절기와 12개월을 완전히 통일시킨 역법은 농업 생산의 수요에 적합했다. 심괄의 성취는 중국 과학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이 외에도 북송의 천문학자 소송(蘇頌)과 한공렴(韓公廉) 등은 선인들의 천문학 방면의 관련 지식과 톱니바퀴 응용 기술상의 성취를 흡수하여, 세계 최초로 구조가 복잡하고 자동으로 운전되는 ‘천문시계’인 수운의상대(水運儀象臺)를 창조하였고, 그림과 글이 잘 갖춰진 상세한 설명서인 <신의상법요(新儀象法要)>를 지어 수운의상대의 모든 구조를 기록했다. 이는 11세기 중국이 천문학과 기술 과학 방면에서 거둔 고도의 성취를 반영한다.

남송의 유명한 수학자 진구소(秦九韶)는 저서 <수서구장(數書九章)>에서 고차 방정식의 수치 해법과 연립 일차 합동식의 해법[당시에는 ‘대연구일술(大衍求一術)’이라 불렀음]을 기록하였으니, 세계에서 이 해법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이다.

직조 기술

남송 때에 이르러 직조 기술이 새로운 발전을 이뤘다. 소주(蘇州), 항주(杭州), 성도(成都)의 세 유명한 관영 직금원(織錦院)은 각각 수백 대의 베틀과 수천 명의 노동자를 거느리고 규모가 장대하고 분업이 세밀했으며, 옷감의 종류가 다양하고 제품이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남송 방직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취는 면방직업의 추가적인 발전이었다. 목화 재배의 보급과 함께 면방직업은 점차 보편화되었다. 송나라 사람이 쓴 <목면(木棉)>이란 시 속에는 “수레 바퀴 굴러가듯 가벼운 우뢰 소리에 가을엔 눈을 자아내고, 활을 구부려 반달 모양 만들어 밤에는 솜을 튕기네… 베틀에는 한 해 내내 아낙네의 수고로움이 쌓이네” 등의 구절이 있어 타자(扡子 면을 타는 도구), 탄화(彈花), 방사(紡紗), 직포(織布)의 노동 과정 및 그에 쓰인 철정(鐵鋌), 탄궁(彈弓), 물레, 베틀 등 각종 면방직 도구들을 반영했다.

새로운 방직 도구의 출현에 힘입어 이미 가는 글자나 작은 꽃무늬가 있는 꽃무늬 직물을 짜낼 수 있게 되었다. 1966년 절강성 난계현(蘭溪縣)의 남송시대 무덤 속에서 순장된 면담요(棉毯) 한 점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강남 지역에서 옷감을 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담요까지 짤 수 있었음을 보여주며 면방직업의 새로운 발전을 반영한다.

조선업과 자기업

남송 시기에 이르러 조선업은 추가적인 발전이 있었다. 명주(明州), 천주(泉州), 광주(廣州) 등의 조선업 중심지에서는 여전히 대형 해선(海船)을 건조했다. 1974년 천주만(泉州灣)에서 남송 말기의 해선 한 척이 발굴되었다. 그 길이, 너비, 깊이에 근거해 계산해 보면 적재중량이 200톤 이상이었다. 이 배의 조형과 구조는 모두 송대 문헌의 기록과 부합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그 배의 선창이 무려 13개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남송 때에는 또 수레배(車船)를 보편적으로 제조했다. 수레배에는 바퀴가 장착되어 있어 발로 바퀴를 밟아 물을 헤치며 나아갔다.

남송의 도자기업은 규모가 장대하여 어떤 가마터는 쌓인 면적이 20무에 달하고 높이가 20미터였다. 임안 봉황산 아래의 수내사관요(修內司官窯)에서 구워낸 도자는 “극히 정교하고 유색 또한 빛이나서 당시의 보물로 여겨졌다.” 경덕진(景德鎮)은 유명한 도자기 중심지로 제품이 각지로 멀리 팔려나갔다. 절강 용천(龍泉)에서 생산된 전통 청자는 여전히 당시의 상품(上品)이었다.

그 밖에 제지, 인쇄, 제차(製茶) 및 화기 제조 등의 업종 역시 모두 상당히 발달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