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顏丹)
【정견망】
중화 수천 년의 역사는 곧 조대(朝代) 교체의 역사이며, 역사 속의 명군성주(明君聖主)와 충신양장(忠臣良將)은 하나같이 찬란한 진주가 되어 교체하고 기복을 거듭하는 조대를 서로 연결해 주었다. 그러나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이 소중하고 눈부신 진주는 현대 문학이나 영상 작품 속에서 이미 먹칠을 당하고 추악화되어 지방 대관(大官)부터 조정 대신에 이르기까지 마치 하나같이 간교하고 교활하며, 늘 황제의 자리를 노리며 권력을 찬탈하고 모반을 일으킬 준비나 하는 사람들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로 인해 황제는 의심이 가득해져 신하들이 공을 세워 자신을 누를까 봐 경계한 나머지 수시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을 감행하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은 명백히 딴맘을 품은 것으로, 역사적 세부 사항, 흐름, 그리고 진면모와도 정반대되는 길을 걷고 있다. 마지막 왕조인 청조(淸朝)를 예로 들더라도, 제왕과 장상(將相) 사이가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철천지원수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많은 황제들이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고 인자하고 두터운 품성을 지닌 관료를 아끼는 데 주력했다. 이토록 군신 관계는 대개 상호 간의 의존과 신뢰를 바탕으로 구축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무너뜨릴 수 없는 군신 관계를 유지해 준 것은 다름 아닌 호생지덕(好生之德)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만약 황제가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백성을 자식처럼 아꼈다면, 자연스럽게 인재(人才)를 아끼고 백성을 보살피는 부모관과 백성과 한 지방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충직하고 선량한 이들을 발탁하려 했을 것이다.
청조의 강희제는 ‘성주인황제(聖主仁皇帝)’로 칭송받았으며, ‘인(仁)’이라는 한 글자만으로도 이 성주(聖主) 황제의 넓은 도량과 자애로운 마음을 온전히 비춰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를 위해 천하를 얻고 정사를 경영했던 충신 역시 적지 않았으며, 그중에서도 한 인물은 수십 년 동안 그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최종적으로 강희제에 의해 정일품(正一品)으로 발탁된 이 대신 역시 환해(宦海)의 풍파를 겪으며 몇 차례 벼슬에서 밀려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늘 먼저 폄직되었다가 다시 승진했고 가벼운 좌천 끝에 더 큰 승진을 하곤 했다. 비록 가끔 동료들이 그를 비방하거나 배척할지라도, 황제는 대놓고 그를 감싸며 기꺼이 중책을 맡기고 관직과 작위를 높여주었다. 강희제가 이토록 그를 신임하고 중용하며 편애한 까닭은, 그가 민생을 돌보든 전장에 나아가든, 어느 곳에서 벼슬을 하든 혹은 관직이 얼마나 높든 관계없이 늘 한결같이 순수하고 성실한 마음(赤誠之心)을 품고 ‘인(仁)’이라는 글자를 극진히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바로 오흥조(吳興祚)이며, 자는 백성(伯成), 호는 유촌(留村), 본적은 절강성 산음(山陰)이다. 그는 17세이던 순치 5년에 진사로 급제했다. 순치 6년에는 강서성 평향(萍鄕) 지현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반란군이 강서 각 현을 소란스럽게 만들었으나, 평향 백성들만큼은 그가 미리 대비하고 적시에 방어한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제세안민(濟世安民)의 덕이 있어
오흥조는 평생 여러 차례 지현(知縣)에 임명되었는데, 그중 임기가 가장 길었던 곳은 무석(無錫) 지현으로 무려 13년에 달했다. 그가 부임하기 전, 무석현 아문은 늘 재정 적자에 시달렸으며, 전임 현령들이 모두 구멍을 메우지 못했다. 그가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조정에 상소하여 마땅히 빚을 추궁하지 않아도 될 부분은 면제해 주고 기꺼이 갚아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두말할 것 없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 메웠다.
목민관으로서 그는 ‘구급(救急 위급한 백성을 구원)’ 외에도 ‘구궁(救窮 가난 구제)’을 잊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세금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강구했다.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는 대신 현 내의 토지를 다시 조사하고 측량한 다음, 토지를 그림으로 그려 구역을 나누고 번호를 매긴 뒤 각 토지의 실제 수확량에 따라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이렇게 하자 수확이 좋지 않은 농민들의 부담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토지 장부를 조작하는 일도 방지할 수 있었다.
당시 무석이 요역(徭役) 배분 제도에도 일부 문제가 있었다. 그가 꼼꼼히 살펴본 결과 제6구의 요역이 가장 무거움을 발견했다. 이에 즉시 관전(官田)의 전조(田租 토지세)를 가져다 사람을 고용해 일을 시킴으로써, 마을 주민들이 더 이상 요역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 조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에 기근이 들었다. 그는 즉시 아문에 명하여 죽을 쑤어 나누어 주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다.
어느 날, 한 외지인이 위조된 문서를 들고 오흥조를 찾아와 현아에서 은 삼천 냥을 타내겠다고 요구했다. 오흥조는 한눈에 문서를 가짜임을 알아보고 몇 마디 물어보자 그 자가 진실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오흥조는 그를 벌하는 대신 진지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관가에 와서 사기를 치다니 담이 크구나. 오늘 만약 다른 관리를 만났더라면 너는 벌써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네 관상을 보니 그리 어리석은 사람 같지도 않구나. 만약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 태어난다면 훗날 분명 큰 인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치고 그는 사비로 은 일백 냥을 꺼내어 그 자의 손에 쥐여주며 떠나보냈다.
후에 복건 일대에 비적(匪賊)의 난이 일어났다. 오흥조가 뱃길로 군량을 호송하여 하문(廈門)으로 가던 중, 항해 도중에 우연히 한무리 도둑들을 만나게 되었다. 군량이 낱낱이 약탈당할 뻔했으나 잠시 후 도둑들이 오히려 군량을 고스란히 제자리로 돌려보내 주었다.
그중 한 도둑이 오흥조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말했다.
“대인(大人), 저를 기억하십니까? 저는 대인의 크신 은혜를 단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오흥조가 자세히 물어 보니 그는 바로 옛날 현아에서 은을 타내려 사기 쳤던 그 사람이었다. 그가 오흥조에게 말했다.
“대인, 저는 은혜를 갚으러 왔습니다. 저와 손을 잡고 안팎에서 호응해 이 도둑 무리를 일망타진하시지요!”
그의 도움으로 오흥조는 힘들이지 않고 곧바로 복건의 비적을 평정했으며, 그 공으로 복건 안찰사로 승진했다.
오흥조가 부임하기 위해 무석을 떠나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그날, 그를 성 밖까지 배웅하는 백성들은 강변을 따라 현아 밖에서부터 성문에 이르기까지 팔구십 리 길에 거쳐 장관을 이루며 늘어섰고, 그 인파가 수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오흥조가 탄 마차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오 대인이 떠나는 것을 누구도 원치 않았다.
일부 사대부와 그에게 은혜를 입고 발탁되었던 선비들도 배를 띄워 그를 전송했다. 강 위에는 환송하는 배들이 수십 리에 걸쳐 이어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배 위에서 잔치를 크게 베푸는 이도 있었고, 둑에 서서 술잔을 들어 작별을 고하는 이도 있어 그 광경은 웅장하면서도 슬펐다. 무석 백성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현령 대인에 대한 감사와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 광경을 본 오흥조 역시 남몰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용맹하고 싸움에 능해 군사를 거느리고 난을 평정하는 재능 지녀
강희 17년, 오흥조는 복건 순무로 임명되었다. 당시 정성공(鄭成功)의 장자인 정경(鄭經, 혹은 정금鄭錦)이 부하들을 보내 천주(泉州)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고 있었다. 그중 한 장수가 2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현지에서 1만여 명의 비적을 끌어모아 백합령(白鴿嶺)에 매복한 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오흥조는 병력을 삼면으로 나누고 직접 중로(中路)에서 적군과 맞서 싸웠다. 하루 종일 양측의 격전이 이어졌다. 이에 그는 전략을 바꾸어 병사들을 이끌고 산속 오솔길을 통해 백합령의 관구(關口)로 올라갔다. 지형의 유리함을 이용해 그가 이끈 군사는 적군 600명을 참살했으며, 다수의 적이 산아래로 떨어지거나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이어 오흥조는 승세를 몰아 추격하여 남은 적군을 모조리 격파함으로써 천주성을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복건성의 다른 두 현까지 수복했다. 이때 정경의 군대 중 일부가 바닷길로 달아나려 했다. 오흥조는 즉시 수사(水師)를 파견하여 다시 삼면에서 적을 협공하게 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다.
크게 승리했음에도 오흥조는 기뻐할 수 없었다. 전투를 겪으면서 수군의 전력이 여전히 취약하다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조정에 공을 치하해 달라고 청하는 대신, 황제에게 상소하여 2만 명의 수군(水軍)을 추가로 양성하고 전함 여러 척을 건조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상소를 접한 황제는 흔쾌히 동의했다.
후에 오흥조는 대군을 직접 이끌고 정경의 남은 병력과 정면으로 맞붙어 교전했다. 그는 전투를 치르는 동시에 투항을 권유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승전보를 접한 강희제는 그를 더욱 높이 사서 정일품(正一品) 관직을 하사했다.
그러나 그때도 그는 개인의 공에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연안의 백성들을 가슴에 품었다. 정경의 잔당들이 여전히 그곳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흥조는 조정의 장수들과 의논한 끝에 병력을 수로와 육로의 양갈래로 나누어 적군을 격파하고 하문을 탈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군은 금문(金門)까지 함락시켰고, 정경이 이끄는 무리를 모조리 대만으로 도주시켰다.
승전보가 궁궐에 전해지자 강희제는 그에게 공을 포상하려 했으나, 그는 여전히 상을 청하지 않고 또다시 상소를 올려 현지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지세를 면제하며 연안 해안을 지키는 등 일련의 민생 안정과 혜민(惠民) 정책을 건의했다. 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즉시 세습 관직을 그에게 내렸다.
사실 그는 양광총독(兩廣總督)으로 재임하는 동안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고 혜택을 주는 수많은 훌륭한 일을 해냈다. 예컨대 화폐를 주조하고 각종 세금을 감면해 주며 백성들이 자유롭게 경작하고 고기를 잡으며 통상하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상소하여 외국 상선의 내항 무역을 개방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광동의 번영과 풍요로움이 그가 구축한 ‘십삼행(十三行)’ 모델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가 올린 건의에 대해 강희제는 하나같이 모두 윤허했다. 비록 일부 조정 신료들이 그를 탄핵하더라도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그를 감싸 안으며 중용했다.
지략으로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다
오흥조는 오랜 세월 전장을 누비며 군사를 지느리는 재능뿐만 아니라,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지략 또한 갖추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지혜와 인자한 성품, 그리고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자칫 일촉즉발의 무력 충돌로 번질 뻔한 위기를 네 차례나 해결해 냈다.
첫 번째는 그가 산동성 기주(沂州) 지주(知州)로 재임할 때 백련교도(白蓮敎徒)들이 무리를 지어 난을 일으켰을 때였다. 그는 민생의 안위가 걱정되어 직접 백련교 무리를 찾아가 이치로 깨우치고 정성껏 설득하여 마침내 스스로 해산하게 만들었으니, 군사 한 명 동원하지 않고 소란을 평정했다.
두 번째는 그가 ‘양왕(良王)’을 보좌하여 반란군을 정벌할 때였다. 이 ‘양왕’의 이름은 애신각라 걸서(愛新覺羅·傑書)로, 태조 누르하치의 증손이자 강희제의 사촌 형이었다. 그와 오흥조의 인연은 할아버지인 예친왕(禮親王) 다이샨(代善) 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흥조의 아버지 오대규(吳大圭)는 일찍이 다이샨의 저택에서 집사로 일했는데, 당시 저택의 재무를 물 흐르듯 명쾌하게 관리하여 얼마 안 가 두등호위(頭等護衛)로 발탁되었다.
오흥조는 아버지의 문무겸비한 자질을 물려받았고, 양왕의 남정(南征)에 합류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섭리였다. 처음에 그는 동지(同知)라는 문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나중에 군공을 세워 태수(太守)로 승진했다. 당시 그와 양왕은 모두 강서에 머물고 있었다. 오삼계의 반란군 장수 한대임(韓大任)은 길안(吉安)에 주둔하며 수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정주(汀州)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복건성 전체가 들썩였다.
그러나 오흥조는 정면 반격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양왕에게 말했다.
“편지 한 통이면 그를 투항시킬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평상복 차림으로 기병 몇 명만 거느린 채 곧바로 한대임의 군영으로 향했다. 한대임을 만나 공경히 읍하여 예를 올린 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기 시작했다.
한대임이 깜짝 놀라 어째서 이토록 통곡하는지 물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미리 장군을 조문하러 온 것인데,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대임이 그 영문을 몰라 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장군은 과거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이름이 널리 알려져 오왕(吳王)이 장군을 심복으로 여기고 깊이 신임하고 중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장군은 막강한 군권을 쥐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업적도 이루지 못했고, 전투에서 단 한 번의 공도 세우지 못했으며, 도리어 거듭 패배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날 장군은 다시 험준한 길을 걷고 있으며 복건성 전체를 집어삼키려 들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장군은 모르시겠지만, 양왕께서는 이미 정예 부대를 준비하셨고, 오랫동안 정비하며 당장이라도 전장에 나가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강한 병사들도 대기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을 무찌르는 것은 그야말로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또다시 패했다는 소식이 오왕의 귀에 들어가면 그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극도로 노하여 장군을 먼저 제거하려 들 것입니다. 장군의 제삿날이 코앞에 닥쳤는데 내가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대임은 한참 동안 말없이 잠잠하더니, 깊이 생각에 잠긴 채 나지막이 물었다.
“그렇다면 내게 다른 길은 없으니, 양왕에게 투항하는 것만이 살길이란 말이오?”
오흥조가 답했다.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양왕의 명을 받아 장군을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무기를 내려놓고 대청(大淸)에 귀순해야만 장군께서 평생토록 쌓아온 전공과 명성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침내 한대임은 철저히 설득되어 양왕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겠다고 동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양왕은 오흥조를 치켜세우며 감탄했다.
“선생의 초무(招撫) 재능은 당조의 곽장군(곽자의)에 전혀 뒤지지 않소. 당시 곽자의가 지혜로 회흘을 물러나게 한 것도 이와 같았을 것이오!”
그 뒤 세 번째 투항 권유는 오흥조가 복건 안찰사로 재임할 때 일어났다. 주통창(朱統錩)이라는 명 황실의 후예가 스스로 ‘의춘왕(宜春王)’이라 칭하며 강서 귀계현(貴溪縣)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귀계는 복건과 인접해 있었기에 오흥조는 기병을 거느리고 몰래 반란군 진영으로 잠입했다. 그는 먼저 주통창의 부하 몇 사람을 회유하고 투항하도록 설득했다. 그들이 설득되자 곧바로 주통창의 장막으로 들이닥쳐 그를 포박했다. 마침내 주통창은 휘하의 3천 명 병사를 이끌고 청 황실에 항복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정경의 세력이 거의 모두 투항했을 무렵이었다. 당시 그의 부하 중 남리(藍理)라는 장수가 여전히 어느 섬을 점거한 채 항복을 거부하고 있었다. 오흥조의 설득 끝에 남리는 대세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대의를 우선시하여 강희제의 임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시 막강한 권세를 쥔 문화전대학사 납란명주(納蘭明珠)가 남리의 군대에 군량을 지급하려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흥조는 다시 한번 자신의 사재를 털어 남리의 장사들에게 군량과 물품을 대주었다. 나중에 그 은혜에 감사하며 남리는 온 힘을 다해 오흥조를 도와 해적을 소탕하고 그 지방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맺음말
이토록 인의(仁義)를 품고 사심없이 백성을 사랑하는 신하를 대하면서 강희제가 어찌 아끼지 않고 신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후에 황제가 갈단(噶爾丹)을 친히 북벌할 때도 특별히 군량을 수송하는 중책을 오흥조에게 맡겼다. 그 결과 그는 또다시 황제를 기쁘고 놀라게 했다. 새외(塞外)의 산세와 지형에 익숙했던 그는 군량 수송대를 이끌고 지름길로 나아가 예정보다 며칠 앞서 군중에 도착한 것이다. 이때 황제의 어영(禦營)은 이미 식량이 끊긴 지 며칠이 지난 상태였다. 방대한 양의 식량이 제때 도착한 것을 본 황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짐의 노신(老臣)이 가장 믿음직스럽구나!”
이렇듯 ‘인(仁)’이라는 한 글자는 강희제와 명신 오흥조 사이에 수십 년간 이어진 은덕(恩德)과 정분을 단단히 엮어주었다. 백성을 사랑하고 덕을 널리 펴는 것은 진실로 하늘이 왕후장상에게 부여한 사명이다. 충신(忠信), 양장(良將), 그리고 목민관이 전력을 다해 천자가 이 하늘이 내린 사명을 완수하도록 보좌하고 힘을 합칠 때 비로소 한 왕조와 후세에 번영과 성세(盛世)를 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참고 자료: 《청사고(淸史稿)》, 《소정잡록(嘯亭雜錄)》, 《이원총화(履園叢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