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미(王舍微)
【정견망】
공자는 《논어·헌문》에서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해 학문을 했고, 오늘날의 학자는 남을 위해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今之學者爲人)”라고 말했다. 후대 사람들은 이로부터 수많은 주석과 해석을 내놓았다.
《논어주소·헌문 제십사》에서 인용한 서한(西漢)의 경학자 공안국(孔安國 공자의 12대 손)의 해석은 “자기를 위함은 이행하여 실천하는 것이고, 남을 위함은 한갓 말로만 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후한서》의 저자인 범엽(398년~445년)은 “남을 위하는 자는 명성에 의지하여 사물을 드러내고, 자기를 위하는 자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도에 부합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논어집해의소(論語集觧義疏)·논어헌문제십사소》(권7)에서 남조 양나라의 경학자 황간(488년~545년)은 의소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늘날과 옛날이 다름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옛사람이 배웠던 바는 자신이 아직 선하지 못하기에 선왕의 도를 배워서 자신이 실천하여 자리를 완성하고자 했을 뿐이다. 오늘날 세상의 학문은 자신의 행동상 결점을 보충하기 위함이 아니요, 바로 남을 능가할 수 있음을 도모하여 남에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함이지, 자기 행실의 부족함을 위함이 아니다.”
한대(漢代) 학자들은 대부분 ‘배울 학(學)’을 ‘깨달을 각(覺)’으로 풀이했다.
《설문해자》에서는 “학(斆)이란 깨닫는 것(覺悟)이다”라고 하였다.
《백호통의·벽옹》에서도 “학이라는 말은 깨닫는다는 뜻이니, 알지 못하는 바를 깨닫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광아(廣雅)·석고(釋詁)》 역시 ‘학(學)’을 ‘寐(잠깰 매)’, ‘寣(잠깰 학)’ 등의 글자와 더불어 통틀어 ‘깨닫다(覺)’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각(覺)’이란 무엇인가?
《설문해자》에서는 “각(覺)은 잠에서 깨는 것(寤)이다”, “오(悟)는 깨닫는 것(覺)이다”라고 했다. 서호(徐灝)의 《설문해자주전(說文解字注箋)》에서는 “각(覺)의 본뜻은 잠을 자다가 깨어남이 있는 까닭에 오(寤)라 한 것이다. 여기서 파생되어 깨달음(覺悟)이란 명칭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공자는 《논어·술이》에서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며, 인에 의지하고, 예에 노닐다(志於道,據於德,依於仁,遊於藝)”라고 말했다.
《논어주소·술이 제칠》에서 하안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지(志)는 사모함(慕)이다. 도는 체득할 수 없으므로 그저 뜻을 둘 뿐이다. 거(據)는 지팡이(杖)이다. 덕은 이루어진 형상이 있으므로 근거할 수 있다. 의(依)는 의지함(倚)이다. 인자(仁者)는 공덕을 사람에게 베풀므로 의지할 수 있다. 예(藝)란 육예(六藝)이니, 근거하고 의지하기에는 부족하므로 노닌다고 하였다. …… 덕행(德行)이란 안과 밖을 일컫는 말이니, 마음에 있으면 덕이 되고 그것을 베풀면 행이 된다. 지덕(至德)이란 중화(中和)의 덕이니, 덮어주고 실어주며 포용하는 것이다.”
주희는 《논어집주·술이 제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志)라는 것은 마음이 나아가는 바를 말한다. 도(道)란 인륜 일상생활 사이에 마땅히 행해야 할 그것이다. 이와 같아 마음이 반드시 그리로 나아간다면 가는 바가 바르게 되어 다른 갈래의 혹함이 없게 된다. 거(據)란 지켜 잡는다는 뜻이다. 덕(德)이란 얻음(得)이니, 그 도를 마음에 얻어 잃지 않음을 말한다. 마음에 얻어 그것을 지켜 잃지 않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가 되어 날로 새로워지는 공효가 있게 된다. 의(依)란 어기지 않음을 말한다. 인(仁)이란 사욕(私慾)이 완전히 없어져 마음의 덕이 완전해진 것이다.”
옛사람들의 논술에서 볼 수 있다시피, ‘위기지학(자신을 위한 학문)’의 가치 지향은 덕을 지켜서 잡고 도(道)를 사모하는 것이니, 이는 도(道)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 수 없기 때문이며, 덕(德)을 내면에 지키면 행동이 중화(中和)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옛사람이 학문을 하는 목표는 도덕의 향상을 주선(主線)으로 삼았을 뿐, 세간의 인간 생활 속 각 분야의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학문에 대한 인식은 역사 발전과 인류사회의 사상 경지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감에 따라 점차 변화가 발생해, 공자가 말한 옛날의 ‘위기(爲己)’와 당대의 ‘위인(爲人)’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 지향이 출현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목표, 내함(內涵) 및 방식 또한 변천하고 변화했다.
《예기·중용》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고 묻고 배우는 것에서 말미암으니, 넓고 큰 것을 이루면서도 정밀하고 미세함을 다하며, 높고 밝음을 극진히 하면서도 중용에 통달하며, 옛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알며, 후덕함을 돈독히 하고 예(禮)를 숭상한다(故君子尊德性而道問學,致廣大而盡精微,極高明而道中庸。溫故而知新,敦厚以崇禮).”
주희는 《중용장구》 제27장에서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존(尊)이란 공경히 받들어 지킨다는 뜻이다. 덕성(德性)이란 내가 하늘로부터 받은 바의 바른 이치(正理)이다. 도(道)는 말미암음(由)이다. 온(溫)은 따뜻하게 익힌다고 할 때의 온이니, 이미 배운 것을 다시 때때로 익힘을 말한다. 돈(敦)이란 두텁게 가함이다. 덕성을 존중함은 마음을 보존하여 도체(道體)의 크기를 극진히 하는 까닭이다. 묻고 배움에 말미암음은 지식이 이르러 도체의 세밀함을 다하는 까닭이다. 이 두 가지는 덕을 닦고 도(道)를 응체시키는 큰 단서이다.한 털끝만큼의 사사로운 뜻으로도 스스로 가리지 않고, 한 털끝만큼의 사사로운 욕심으로 스스로를 얽매이지 않으며, 이미 아는 바에 푹 젖는 것이다.”
제20장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성실함(誠)이란 하늘의 도요, 성실하게 함(誠之)은 사람의 도이다. 성실함이란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으며 조용한 가운데 도에 맞으니 성인이다. 성실히 하려는 것은 선을 택해 그것을 굳게 잡는 것이다. 넓게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두텁게 행해야 한다.”
‘성실함(誠)’이란 진실하여 허망함이 없는 것을 말하니, 하늘의 이치(天理)가 본래 그러한 모습이다. ‘성실하게 함(誠之)’이란 아직 진실하여 허망함이 없는 상태에 이르지 못하여, 그리되기를 바라고 힘쓰는 것을 말하니, 마땅히 해야 할 사람의 도리이다.
성인(聖人)의 덕은 하늘의 이치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진실하고 허망함이 없다. 따라서 깊이 생각하거나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여유롭게 도(道)에 들어맞으니, 이 역시 하늘의 도리이다.
그러나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사사로운 사람의 욕심(人欲)이 없을 수 없어 그 덕이 모두 진실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않고도 저절로 얻을 수 없다면 반드시 ‘선(善)을 선택’한 후에야 선을 밝게 알 수 있으며, 애써 노력하지 않고도 저절로 들어맞을 수 없다면 반드시 ‘굳게 지킨’ 후에야 자신을 진실하게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사람의 도리이다.
생각하지 않고도 저절로 얻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生知)이요, 애써 노력하지 않고도 들어맞는 것은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安行)이다. ‘선을 선택함’은 배워서 아는 것(學知) 이하의 일이고, ‘굳게 지킴’은 이로움을 보고 행하는 것(利行) 이하의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성실함(誠)을 이루기 위한 세부 항목이다.
배우고(學), 묻고(問), 생각하고(思), 분별하는(辨) 것은 선을 선택하여 앎(知)을 이루는 방법이니 바로 ‘배워서 아는 것(學知)’이다. 그리고 두텁게 실천하는 것(篤行)은 굳게 지켜 인(仁)을 이루는 방법이니 바로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利行)’이다.
정자(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다섯 가지(學·問·思·辨·篤行) 중 하나라도 폐한다면 참된 학문이라 할 수 없다”라고 하셨다.】
실상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가장 요긴한 한 가지 일은 바로 덕(德)을 쌓고 덕을 잃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사람이 반본귀진(返本歸真)할 수 있는 기초이자 동시에 인간 세상에서 복분(福分)의 내력이다. 그러나 선량을 유지하며 덕을 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의 일은 본래 고급 생명이 안배한 것이라 인연이 교차하고 복잡해서, 사람이 한 가지 일의 좋고 나쁨을 구별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저 일상의 이치(常理)를 따라 행하며 사람 마음과 사람의 관념이라는 교란을 배척하고, 중정(中正)과 중화(中和)의 순응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주희는 성실함의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으며 조용한 가운데 도에 맞음”은 오직 성인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군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넓게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두텁게 행함”이란 경로를 거쳐, 묻고 배우는 과정(問學)을 통해 도달해야 한다.
역사상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의 함의와 관계에 관한 탐구 역시 매우 많았다.
한대의 경학 대가 정현(鄭玄)은 주석에서 “덕성이란 성(性)의 지극한 성(誠)을 말하고, 도(道)는 말미암음과 같으며, 문학(問學)이란 성(誠)을 배우는 것이다”(《예기주(禮記注)》)라고 했다.
기왕에 ‘성실함(誠)’이 ‘하늘의 도’라면, 이는 ‘성실함’이 사람이 타고난 본성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덕성(德性)’을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천성(天性)으로 보았다. 《예기정의》에서 당대(唐代)의 공영달은 소해(疏解)에서 “군자가 덕성을 존중함이란, 군자와 현인이 이 성인의 도덕이라는 성품이 자연스레 지극히 성실함(誠)을 존경함을 말함이요, 묻고 배움(問學)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은 현인이 도를 행함이 묻고 배움에 말미암음을 말함이니, 부지런히 배워야 지극한 성(誠)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했다.
맹자는 공자가 말한 “성품은 서로 가깝다(性相近)”로부터 발전시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고, 순자는 “습관에 따라 서로 멀어진다(習相遠)”로부터 추론하여 ‘성악설(性惡說)’을 도출했다. 그러므로 순자는 후천적인 배움을 대단히 중시해,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는 까닭은 온전히 후천적인 노력에 의지한다고 보았으니, 즉 “사람의 성품은 악하며 그 선한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人之性惡,其善者偽也)”(《순자·성악(性惡)》)라고 했다.
순자는 자신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들어서 아는 지식(聞見之知)’을 특징으로 하는 ‘도문학’의 부지런히 배워 지극한 성에 이르는 방식을 제창했다. 이는 맹자가 주장한 사람의 고유한 선성(善性)을 유지하고 발양함을 특징으로 하는 ‘존덕성’의 자연스러운 지성(至誠) 방식과 방향상 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위인지학(爲人之學 남을 위한 학문)’이 싹트기 시작한 효시이다.
‘존덕성’과 ‘도문학’ 중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가벼운가에 관한 논쟁은, 정주(程朱)의 이학(理學)과 육왕의 심학(心學) 사이에서 방법론상의 두 분야로 진화했다. 남송 효종 순희 2년(1175년)에 열린 ‘아호의 모임(鵝湖之會)’에서 주희와 육구연은 강서 상요(上饒)의 아호사에서 만났다.
주희는 ‘도문학’을 중시하여 ‘격물궁리(格物窮理)’를 주장했고, 육구연은 ‘존덕성’을 최우선 위치에 놓았다. “이미 덕성을 존중할 줄 모른다면 어찌 이른바 도문학이라는 것이 있겠는가?”(《상산선생전집(象山先生全集)·권34(卷三十四)·어록》)
종합해 보면, 옛사람들의 논쟁 발전 과정 속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가 출현했다.
(1) 일반인이 어떻게 해야 덕성의 지혜(德性之知)를 실현할 수 있는가?
(2) 무엇이 ‘위기지학’을 하는 올바른 방식인가?
(3) ‘도문학’의 방식은 ‘위기(爲己)’로 통하는가 아니면 ‘위인(爲人)’으로 통하는가?
실상 사람의 생명은 내재적 미시적인 층면의 ‘진아(真我)’와 육신 층면의 ‘표면의 나(表我)’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화씨벽(和氏璧)과 같아서 옥석 외각에 돌껍질이란 층이 덮여 있는 것과 같다. 진정한 ‘위기지학’의 의미는 돌껍질 층을 제거해 옥석 같은 참된 나의 성품을 드러나게 하는 데 있으며, ‘위인지학’은 사람의 마음이 좋아하는 색상이나 문양을 더하는 것이다.
공자 가르침의 한계는 출세간(出世間)의 법문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으므로, 단지 ‘도에 뜻을 둠(志於道)’이라는 가치 방향만을 명시함과 동시에 사람이 세간에서 선량을 지키고 상리(常理)를 따르며 인간 사회의 도덕 수준을 유지하도록 했을 뿐이다. 후대 사람들이 밝혀낸 각종 이론과 학설 역시 모두 자신이 처한 경지에서 사람 마음의 유위적(有爲的) 인식이 섞여 들어간 것이라, 대부분 세간에서 어떻게 사람이 되는가 하는 입세(入世)의 학문으로서 흔히 ‘위인지학’의 범주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인류가 만약 반본귀진(返本歸真)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오직 정법 수련 속에서만 실현이 가능하며, 또한 오직 선량을 지키고 복덕이 두터운 자라야만 난세의 혼탁함 속에서 이러한 오성(悟性)을 반짝여 생명이 하늘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