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8년—1644년)
심연(心緣)
【정견망】
회화편(繪畫篇)
중국 회화사상 명대(明代)는 화풍(畫風)이 여러 차례 변하고 화파(畫派)가 번창한 조대(朝代)였다. 회화의 갈래와 소재 방면에서는 전통적인 인물화, 산수화, 화조화(花鳥畫)가 성행하였고, 문인(文人)의 묵희화(墨戲畫, 재미로 치는 수묵화)인 매·란·죽 및 잡화(雜畫) 등도 상당히 발달했다. 예술 유파 방면에서는 지역을 중심으로 삼거나 풍격(風格)으로 구분되는 회화 파계(派系)가 수없이 나왔다. 사승(師承) 방면에서는 주로 남송(南宋) 원체(院體) 풍격을 이어받은 궁정 회화와 절파(浙派), 그리고 문인화의 전통을 발전시킨 오문파(吳門派)와 송강파(松江派)·소송파(蘇松派) 등 양대 계파가 있었다.
화법(畫法) 방면에서는 수묵 산수와 사의(寫意) 화조가 발달해 뛰어난 성취가 있었으며, 인물화에서도 변형(變形) 인물, 묵골부채(墨骨敷彩, 먹 선으로 골격을 잡고 색을 칠함) 초상 등 독특하고 새로운 면모가 나타났다. 이밖에 민간 회화, 특히 판화가 명말에 이르러 번성해졌다.
명대 회화의 발전은 대략 초기, 중기, 말기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명 초기 회화는 홍무(洪武, 1368~1398년) 연간부터 홍치(弘治, 1488~1505년) 연간까지로, 이 시기에는 궁정 회화와 절파가 화단에 유행해 남송 원체 화풍을 계승하고 발양(發揚)하는 것이 주로 유행했다.
명대 궁정 회화는 송제(宋制)를 그대로 따랐고 조정에서 많은 화가를 불러들였는데 모두 내부(內府) 관리에 예속되어 궁정 회화 창작이 최전성기에 이르게 했다.
정덕(正德, 1506~1521년) 이후 오문파가 굴기(崛起)하여 점차 이를 대체했다. 명대 궁정 회화는 산수와 화조화가 가장 성했고 인물화는 취재(取材)가 비교적 협소했다. 산수화로 유명한 화가로는 이재(李在), 왕악(王諤), 주단(朱端) 등이 있었다.
화조화는 다양한 면모를 나타냈는데, 대표적인 화가로는 공필중채(工筆重彩)에 뛰어난 변경조(邊景昭)가 있어 남송 원체 전통을 이어받아 아름답고 화려하며 전아(典雅)하면서도 생기가 풍부했다. 손융(孫隆)은 북송의 서숭사(徐崇嗣)에서 벗어나 몰골법(沒骨法)을 주로 했다. 임량(林良)은 수묵 사의 화조로 이름을 날렸는데 필묵(筆墨)이 세련되고 분방하며 조형이 정확하고 생동감이 있었다. 여기(呂紀)는 공필(工筆)과 사의(寫意)를 결합해 화조가 정교하고 화려했으며 수석(水石)이 거칠고 굳세 스스로 한 파를 이루었다. 명대 궁정 회화는 비록 송대 원화(院畫)처럼 시대를 가르는 성취를 얻지는 못했지만 어떤 방면에서는 새로운 개척도 있었다.
절파는 대진(戴進)과 오위(吳偉)를 대표로 하며 선덕(宣德)부터 정덕 연간까지 활약했다. 창시자인 대진이 절강(浙江) 사람이었기 때문에 절파라 불렸다. 계승자인 오위는 호북 강하(江夏, 지금의 무한) 사람으로 회화사에서 그를 강하파(江夏派)라고도 불지만 사실 절파의 지류(支流)에 속한다. 대진과 오위가 전후로 이으면서 원(院) 내외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뒤를 따른 이로는 장로(張路), 장숭(蔣嵩), 왕조(汪肇), 이저(李著), 장건(張乾) 등이 있었다.
명대 초기 강남 지역에는 또 원대(元代) 수묵화 전통을 계승한 일군의 문인 화가들이 있었으니, 서분(徐賁), 왕불(王紱), 유각(劉玨), 두경(杜瓊), 요수(姚綬) 등이다. 서분의 산수는 동원(董源), 거연(巨然)을 계승하여 필법이 활기차고 힘차면서도 빼어나고 윤기가 있었다. 왕불은 피마준(披麻皴)에 절대준(折帶皴)을 겸용해 산수를 그리기를 좋아하여 복잡다단한 것이 왕몽(王蒙)과 비슷했다. 묵죽(墨竹)은 빼어나고 소탈하고 얽매임이 없어 명대의 ‘개산수(開山手, 일파의 시조)’라 불렸다. 유각의 산수는 경치가 그윽하고 깊으며 필묵이 농밀해서 왕몽, 오진(吳鎮)과 가까웠다. 두경은 수묵 천강(淺絳) 산수에 능통해 건필(乾筆)로 준염(皴染)을 많이 썼다. 요수는 주로 오진과 왕몽을 본받아 풍격이 중후했다. 이들의 화풍은 오문파의 선구라 칭할 만하다.
또 어떤 화가들은 비록 특정한 파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뛰어난 성과가 있었다. 처음에 마원(馬遠), 하규(夏圭)를 따르다 나중에 자연을 본받아 《화산도(華山圖)》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왕리(王履), 원파(院派)라 칭해져 당인(唐寅), 구영(仇英)에게 비교적 큰 영향을 준 주신(周臣), 수묵 사의 인물과 산수에 능통했한 곽후(郭詡)와 사충(史忠), 백묘(白描) 인물화로 유명한 두근(杜堇) 등이 있었다.
대략 정덕(1506~1522년) 전후로부터 만력(1573~1620년) 연간에 이르기까지 소주(蘇州) 지역에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을 대표로 하는 오문파가 굴기하여 명조 중기 화단의 주류가 되었다. 그들은 필묵의 의취(意趣)와 ‘사기(士氣, 선비의 기운)’, ‘일격(逸格, 속세를 벗어난 격조)’을 숭상하는 원대 사람들의 회화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그 중에서도 심주, 문징명, 당인(唐寅), 구영(仇英)이 가장 명성을 얻어 회화사에서는 이들을 ‘오문사가(吳門四家)’라 칭한다. 이들이 개창한 화파를 오문파라 불렀다.
오문사가의 걸출한 예술적 성취는 당시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고 제자로 배우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심주를 배운 사람으로는 왕륜(王綸), 진환(陳煥), 진탁(陳鐸), 두기룡(杜冀龍), 사시신(謝時臣) 등이 있었다. 문징명을 따른 자는 2, 30명이 넘는데, 그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문가(文嘉), 문백인(文伯仁), 육치(陸治), 진순(陳淳), 육사도(陸師道), 주천구(周天球) 등이 있었다. 문가의 산수는 성글고 간략하고, 문백인은 세밀하며, 육치는 힘차고 가파르며, 전곡(錢穀)은 투박하고 무거우며, 진순은 붓을 마음대로 놀려 사의(寫意)했다. 육사도는 세밀한 필치로 선을 그리고 색을 칠했으며, 주천구는 난석(蘭石 난초와 바위)을 겸하여 잘했으니, 여러 가(家)가 각기 특색을 갖추었다. 오문파 여러 화가들 중 육치, 진순, 주지면(周之冕)은 화조화 영역에서 특히 참신한 발전이 있었다. 오문파가 명말에 이르러 발전하면서 옛것을 타성적으로 답습하며 그저 겉모양만 모방하니 다시 새로운 길을 열어 문인화를 제창한 동기창(董其昌) 및 그 유파에 의해 대체되었다.
만력으로부터 숭정(1628~1644년) 연간에 이르기까지는 명조 회화의 후기로 회화 영역에 새로운 전기(轉機)가 나타났다. 서위(徐渭)가 화조화의 대사의(大寫意) 화법을 더욱 완비했다. 진홍수(陳洪綬), 최자충(崔子忠), 정운붕(丁雲鵬) 등이 변형 인물화법을 개창했다. 동기창을 대표로 하는 화가들은 문인 산수화 방면에서 따로 길을 열어 많은 지파(支派)를 형성했다.
서위는 진순에 이어 근본적으로 수묵 사의 화조화의 변혁을 완수한 일대(一代)의 대가(大家)로 그 화풍은 후세 사의 화조화의 발전을 강력하게 추진해 회화사에서는 청등화파(青藤畫派)라 칭했다. 서위의 화풍은 청대의 주탑(朱耷, 팔대산인), 석도(石濤), 양주팔괴(揚州八怪), 해파(海派) 및 현대의 제백석(齊白石) 등에 이르기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다.
명대 초상화는 인물화 중에서 비교적 발달하였는데 명대 후기에 이르러 더욱 발전했다. 증경(曾鯨)은 그중 혁신적인 정신을 부여한 대표 화가로서 그를 따라 배우는 자가 매우 많아 드디어 파신파(波臣派)를 형성하여 영향이 청대에까지 이르렀다.
명대 후기 산수화 화가 중에서 오문파에 이어 일어난 대표 화가는 동기창이다. 그는 문인화를 다시 제창하여 옛것을 모방함을 강조하고 필묵을 중시하며 ‘사기(士氣 사대부의 기운)’를 추구하였고 아울러 남북종론(南北宗論)을 제출하였다. 그가 창립한 송강파가 드디어 오문파의 통치 지위를 대체하였다.
그가 제출한 회화 이론, 특히 남북종론은 명말 청초의 회화에 중대한 영향을 주어 일시 사이에 소송(蘇松) 지역에 많은 산수화 지파가 형성되었다. 그들 중 비교적 유명한 화가로는 막시룡(莫是龍)이 있어 그와 함께 남북종론을 만들었고, 진계유(陳繼儒)가 그와 사귀었으며, 조좌(趙左) 역시 자주 그를 위해 대필(代筆)했으니 이들은 모두 송강파의 주장(主將)이었다. 구정의(顧正誼)가 화정파(華亭派)를 창출해 동기창의 지도를 받았고, 송욱(宋旭) 역시 화정파의 큰 인물에 속한다. 심사충(沈士充)은 송무진(宋懋晉)에게 수업(受業)을 받고 또 조좌를 스승으로 삼아 역시 동기창을 위해 대필하였으니 세상에서는 운간파(雲間派)라 칭했다. 이밖에 오문파의 영향을 받은 이 시기 화가로는 정가수(程嘉燧), 이유방(李流芳), 변문유(卞文瑜), 소미(邵彌), 양문(楊文) 등이 있었다.
소송 지역 외에도 명조 말기에 역시 적지 않은 지역성 산수화파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절강 전당(錢塘)의 남영(藍瑛)은 무림파(武林派)를 만들었고, 안휘 무호(蕪湖)의 소운종(蕭雲從)이 고숙파(姑熟派)를 만들었으며, 절강 가흥(嘉興)의 항원변(項元汴), 항성모(項聖謨)가 가흥파(嘉興派)를 만들었고, 강소 무진(武進)의 추자린(鄒子麟), 운향(惲向)이 무진파(武進派)를 만든 등이다. 그러나 이 파들은 대부분 영향이 크지 않았다. 명말 청초에 비록 복잡하고 다단한 산수화 파들이 형성되었으나 크게 보면 대부분 오문파와 동기창의 영향을 받아 문인화 계통에 속했다.
명대 문인의 묵희화(墨戲畫 유희로 그린 묵화) 역시 매우 발달하였다. 전문적으로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한 사람으로는 송극(宋克), 왕불(王紱), 하창(夏昶), 노득지(魯得之)가 있었고, 매화 그림으로 유명한 사람으로는 손이길(孫以吉), 진헌장(陳憲章)이 있었으며, 난초 그림으로 유명한 사람으로는 주천구(周天球) 등이 있었다. 그중 하창의 묵죽은 당시에 제일이라 칭해졌다.
이밖에 영향이 있던 화가들로는 문팽(文彭), 장로(張路), 곤잔(髡殘), 예원로(倪元璐), 손극홍(孫克弘), 왕탁(王鐸), 왕감(王鑑), 왕겸(王謙), 왕시민(王時敏), 오빈(吳彬), 항성모, 소운종, 형동(邢侗), 장홍(張宏), 장서도(張瑞圖), 주지면, 공현(龔賢), 정수(程邃), 정정규(程正揆), 부산(傅山) 등이 있었다.
명대의 민간 회화는 비교적 활발해서 목각 연화(年畫), 특히 목각 판화에서 비교적 큰 발전이 있었다. 민간에서 창작한 두루마리 화(卷軸畫)의 주요 내용은 풍속화, 역사 고사, 신상화(神像畫), 수륙화(水陸畫) 및 초상화 등이었다.
벽화와 화론
명대의 벽화 창작은 전대(前代)만큼 흥왕(興旺)하지 못하여 현존하는 것은 주로 사찰이나 도관의 벽화들이다. 그러나 화론(畫論) 저술은 전대보다 풍부하여 회화사, 화론이 많을 뿐만 아니라 총서(叢書) 집록이 나타났고 제발(題跋), 필기(筆記)도 다수 전문적인 문집을 이뤘다.
사전류(史傳類)에 속하는 것으로는 한앙(韓昂)의 《도회보감속편(圖繪寶鑑續編)》, 주모성(朱謀 聖)의 《화사회요(畫史會要)》, 강소서(姜紹書)의 《무성시사(無聲詩史)》 등이 있었다.
논설류(論說類)에 속하는 것으로는 왕세정(王世貞)의 《예원치언(藝苑卮言)》, 동기창의 《화지(畫旨)》, 《화안(畫眼)》, 《화선실수필(畫禪室隨筆)》, 막시룡의 《화설(畫說)》, 도륭(屠隆)의 《화전(畫箋)》, 당지계(唐志契)의 《회사미언(繪事微言)》, 고응원(顧凝遠)의 《화인(畫引)》 등이 있었다.
품평류(品評類)에 속하는 것으로는 이개선(李開先)의 《중록화품(中麓畫品)》, 왕치등(王稚登)의 《오군단청지(吳郡丹青志)》 등이 있었다.
회화 집록에 속하는 것으로는 왕세정의 《화원(畫苑)》, 첨경봉(詹景鳳)의 《화원보익(畫苑補益)》 등이 있었다.
저록류(著錄類)에 속하는 것으로는 도목(都穆)의 《우의편(寓意編)》, 장축(張丑)의 《청하서화방(清河書畫舫)》, 왕적옥(汪赤玉)의 《산호망(珊瑚網)》, 울봉경(鬱逢慶)의 《울씨서화제발기(鬱氏書畫題跋記)》 등이 있었다.
이밖에 왕리, 심주, 문징명, 당인, 이일화(李日華), 진홍수 등의 시문, 제발, 필기 중에 회화 이론에 관한 부분이 있었으니 그중 뛰어나면서도 정교하고 명쾌한 견해가 자못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