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8년—1644년)
심연(心緣)
【정견망】
명조 멸망에 관한 예언
《추배도(推背圖)》 제32상은 명조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그림 중에는 대문 한 문짝을 그렸는데 문 안에 말이 있으니 틈(闖)’이란 글자가 저절로 떠오른다.
참(讖)에 가로되:
말이 북쪽 대궐에서 뛰고
개가 서쪽에서 짖는구나
팔구(八九)의 수(數)가 다하니
해와 달이 빛을 잃도다
馬跳北闕 犬嗷西方
八九數盡 日月無光
틈왕(闖王) 이자성이 명조를 멸망시킨다는 뜻으로 해와 달이 빛을 잃음은 명(明)의 멸망을 의미한다.
송(頌)에 가로되:
버들꽃 지고 오얏꽃 시드니
오색 깃발 나누어 북쪽에서 오네
탄식하노라, 금릉의 왕기가 다했으니
한 가지 봄빛이 장안을 점령하도다
楊花落盡李花殘
五色旗分自北來
太息金陵王氣盡
一枝春色占長安
이 시는 오얏꽃이 시든다고 했으니 이자성이 오래 가지 못함을 암시하고 오색 깃발 나우어 북쪽에서 온다는 것은 북방 민족(여진족)이 마침내 천하를 얻을 것임을 예시한다. 뒤의 두 구절은 한인(漢人)이 황제가 되는 기수(氣數)가 이미 다했음을 가리킨다.
한편 송조의 《매화시(梅花詩)》 제4절 제4구 “오얏꽃 피어날 때 이르니 봄은 이미 예전의 봄이 아니네.(開到李花春已非)” 역시 명조의 멸망을 예언했다.
명조는 성조(成祖) 주체(朱棣 영락제)의 통치 아래 휘황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명조 말년의 쇠퇴에 다년간의 농민 기의(起義)가 더해져, 대명 왕조는 마침내 “오얏꽃 피어날 때 봄은 이미 예전의 봄이 아니네(開到李花春已非)”가 되었다. ‘오얏꽃(李花)’은 당연히 명말 농민 기의군을 이끈 틈왕 이자성을 가리킨다. 1644년 봄, 이자성이 기의군을 이끌고 북경을 공격해 차지하니, 숭정황제(崇禎皇帝)가 자금성 뒤의 경산(景山)에서 목을 매어 자진(自盡)하며 명조가 멸망했다.
《소병가》도 명조의 멸망에 대해 예언을 했다.
“만 자식과 만 손자가 층층이 겹쳐 있고,
조종의 산 위에서는 조개가 옷을 입고 행차하며,
공후들은 다시는 금궐에 조하(朝賀)하지 않고,
열여덟 아이(孩兒)는 난관 중의 난관이로다.
萬子萬孫層疊層,
祖宗山上貝衣行,
公侯不複朝金闕,
十八孩兒難上難.
나무(木) 아래 일료(一了) 머리가 있고,
눈(目) 위에 칼 한 자루(一刀)와 무(戊)·정(丁)이 있도다.
천하가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중시하지 않으니,
영웅호걸들에게는 모조리 봄이 없구나.
무자년(戊子年)과 기축년(己丑年)에는 난리가 삼실처럼 얽히고 설켜,
곳곳의 인민들이 집에 머물지 못하는도다.
우연히 기근을 만나 민란이 일어나니,
평안히 진수(鎭守)하기에 좋은 것은 계화(桂花)로다.
木下一了頭, 目上一刀一戊丁,
天下重文不重武, 英雄豪傑總無春,
戊子已醜亂如麻, 到處人民不在家,
偶遇饑荒草寇發, 平安鎮守好桂花
라 하였다. 이 중 “조종의 산 위에서는 조개가 옷을 입고 행차하며(祖宗山上貝衣行),”는 숭정(崇禎)의 이름이 들어가 있고, “목하일료두, 목상일도일무정(木下一了頭, 目上一刀一戊丁)”은 이자성의 이름을 포함한다. “우우기황초구발(偶遇饑荒草寇發)”은 명조 말년의 농민 대기의를 가리키고, “평안점수호계화(平安鎮守好桂花)”는 오삼계(吳三桂)를 암시한다.
숭정의 최후의 결말에 대해 《소병가》의 예언은 “분주매화상구중(奔走梅花上九重)”이니, 숭정이 매산(煤山, 경산)에서 목을 매어 자살할 것임을 암시한다.
명조 말년의 농민 기의
1627년(천계 7년), 섬북(陝北) 징현(澄縣)에서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백수현(白水縣) 사람 왕이(王二)의 영도 아래 현성(縣城)으로 돌진하여 지현(知縣)을 살해하며, 명말 농민 대기의의 서막을 열었다. 기의의 풍운은 곧 인근 섬북과 섬중(陝中)에 두루 퍼졌다. 장헌충(張獻忠) 역시 연안(延安)에서 일어났다. 당시 이자성도 기의의 대열에 참가하였다.
이자성은 섬서성 미지(米脂) 사람으로 일찍이 은천(銀川)의 역졸(驛卒)을 지냈다. 1629년(숭정 2년), 그는 동료들과 함께 왕가윤(王嘉胤) 기의군에 참가했다. 나중에 ‘틈왕(闖王)’ 고영상(高迎祥) 휘하에 들어가 ‘틈장(闖將)’이란 불렸다. 이자성은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여 그의 책략 아래 기의군은 곳곳마다 승리를 거두었고, 명의 중도(中都) 봉양(鳳陽)을 공격해 남은 수비하던 병사 수천 명을 베었으며, ‘고원진룡황제(古元真龍皇帝 고래로 으뜸인 진짜 황제란 의미)’란 깃발을 세우니 이는 명조의 극심한 공황을 야기하였다.
1636년, 고영상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며 기의가 난관에 부딪치자, 이자성은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이끌고 장기간 섬서, 사천, 호북 접경 지대를 전전(轉戰)했다. 이때 명 조정에서 양사창(楊嗣昌)을 병부상서(兵部尚書)로 기용했다. 양사창은 ‘사정육우십면망(四正六隅十面網, 4개의 정면과 6개의 모퉁이 등 10면의 포위망)’이란 포위 토벌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일부 농민 기의군이 조정에 투항했다.
1640년 겨울, 이자성은 명군 주력이 사천으로 들어가 장헌충을 추격하는 바람에 하남(河南)이 빈 기회를 타고, 부대를 이끌고 운양(鄖陽) 지역을 출발해 하남으로 들어갔다. 당시 하남은 매년 가뭄, 황재(蝗災), 역병으로 가뭄으로 황폐해진 땅이 천 리에 달해 각지에서 백성들의 변란이 일어났다. 이자성이 하남에 들어가자마자 즉시 수 만의 군중들을 끌어들였고 이에 성세(聲勢)가 크게 진동했다. 이자성은 명말 토지가 고도로 집중되고 부역이 너무 많아 백성들이 생활하기 어려운 사회 현실을 겨냥해 명확하게 “균전면량(均田免糧, 토지를 평등하게 나누고 조세를 면제함)”의 투쟁 구호를 제출했다. 이 구호는 수많은 농민들의 열렬한 옹호를 받았다.
도처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들이 전해졌다.
“그분 덕분에 먹고, 그분 덕분에 옷을 입네.
먹고 입어도 다함이 없는 틈왕이 있으니,
부역도 하지 않고 조세도 내지 않네”
“소와 양을 잡고 술과 즙을 준비하여,
성문을 열고 틈왕을 맞이하세.
틈왕이 오시면 세금을 내지 않네”
1641년 정월, 이자성 기의군이 낙양을 파죽지세로 깨뜨리고 복왕(福王) 주상순(朱常洵)을 살해했으며, 번저(藩邸) 및 부자들의 저택에서 양곡 수만 석(石)과 금전 수십 만을 풀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했다. 이때 하남 각지의 기의군이 모두 앞뒤로 이자성의 영도를 받아들였다. 군웅이 귀부(歸附)하면서 이자성의 세력이 날로 강해졌다.
1642년 겨울, 이자성은 호광(湖廣)으로 진군해 양양(襄陽)을 빼앗고, 나아가 무창(武昌)을 제외한 호북(湖北)의 한수에 인접한 군현들 차지했다. 1643년 3월, 이자성은 양양의 이름을 양경(襄京)으로 고치고 ‘신순왕(新順王)’이라 칭하며 신순(新順) 정권을 창립하였다. 신순 중앙에 또 상상(上相), 좌보(左輔), 우필(右弼) 등의 문관(文官)을 설치했고, 그 아래에 6정부(六政府, 6부) 등이 있었다. 신순 관할구에는 또 부(府), 주(州), 현(縣)의 각급 지방 정권을 건립했다. 머지않아 이자성은 다시 하남으로 들어갔다.
1643년 8월, 다급해진 조정에서 섬서총독 손전두에게 명령해 동관을 나와 하남으로 들어가 이자성을 공격하게 했다. 9월, 이자성이 관군(官軍)을 크게 물리치고 4만 여 명을 죽였으며 수십 만 건의 군수물자를 획득했다. 10월, 이자성이 승리의 여세를 타 동관(潼關)을 공격하고 서안(西安)을 점령했다. 1644년(숭정 17년) 정월, 이자성이 서안을 장안(長安)으로 고치고 서경(西京)이라 칭하며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하고 연호를 영창(永昌)으로 삼았다. 영창 전(錢)을 주조하고 《갑신력(甲申曆)》을 만들어 대순 중앙정부 기구를 더욱 완비했다. 동시에 과거를 열어 인재를 선발했다. 이에 이르러 대순 농민 정권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대순군이 수도인 북경에 들어온 후 서안에서 설립한 기초 위에 정권 건설을 더욱 강화했다. 중앙기구는 기본적으로 명조의 것을 그대로 따랐고 어떤 것은 이름만 바꾸었다. 대순 정권은 우무경문(右武輕文, 무를 우대하고 문을 경시함)하여 “무릇 문관은 모두 권장군(權將軍)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규정하여 농민군 장령(將領)이 정권에서 핵심적인 작용을 하도록 보장했다. 북경에 있는 기간 대순 정권은 또 거인(舉人)을 선발하라는 조치를 실행하였다.
농민군이 통제하는 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대순군이 건립한 지방 정권도 갈수록 많아졌다. 북경을 점령하기 전후로 대순군은 이미 하남, 호북, 섬서, 산서, 하북, 산동, 영하(寧夏), 청해(青海), 안휘(安徽), 사천(四川) 등 일부 지역에서 부, 주, 현 각급 정권을 건립하였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기의군 지도자 장헌충이 1644년 11월 사천 성도(成都)에서 제위(帝位)에 오르고 국호를 대서(大西)라 하며 연호를 대순(大順)으로 고치고 성도를 서경(西京)이라 칭하며 《통천력(通天曆)》을 만들고 ‘대순통보(大順通寶)’를 주조하였다.
명조의 멸망
농민 기의군의 계속 압박해오면서, 특히 이자성의 대순 정권이 건립된 후 숭정제와 대신들은 전력을 집중해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주요 대책은 출정, 남경 천도(南遷), 근왕(勤王)이었다.
이른바 출정이란 막 입각(入閣)한 이건태(李建泰)가 황제를 대신해 출정해 이자성을 토벌하는 것이다. 뜻밖에 군대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의군을 만났고 이건태가 포로로 잡혔다.
이른바 남천이란 수도를 북경에서 남경(南京)으로 옮겨 기의군의 예봉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의는 내각에서 단 한 명의 대신도 전력으로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의만 하고 결정하지 못하다 결국 유야무야되었다.
이른바 근왕이란 산해관(山海關) 밖에 주둔하고 있던 오삼계(吳三桂) 관할 부대를 관 내로 불러들여 기의군을 소멸하는 데 협조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명조가 영원(寧遠)과 산해관 바깥의 드넓은 영토를 포기함을 의미했으므로 대신들이 이때문에 서로 미루며 결정하지 못했다. 태원(太原)이 함락되어 경사가 위급해질 때에 이르러서야 숭정제가 오삼계를 불러들여 북경을 보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오삼계가 북경에 도달했을 때 북경은 이미 전날 이자성군에 함락되었다.
달아날 수도 없고 의탁할 곳이 없었던 숭정제는 1644년 19일 새벽 매산(煤山, 경산)에 가서 큰 나무 옆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죽기 전 그는 옷 위에 “강산을 잃었으니 하늘에 계신 조상을 뵈올 면목이 없어 감히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치지 못하노라”라는 유조를 남겼다. 명조는 숭정의 죽음과 함께 순식간에 무너졌다.
숭정 개인으로 말하자면 큰 일을 이루고자 하는 희망을 지닌 황제였고, 또 결코 포악한 황제도 아니었다. 그는 망국의 군주가 아님에도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연기했다. 이는 역사란 영원히 자신이 이미 정해진 궤도를 따라 운행하고 있으며 인류는 영원히 하늘의 뜻(天意)에 순응할 수 밖에 없음을 설명하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