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8년—1644년)
심연(心緣)
【정견망】
장거정의 개혁과 만력중흥(萬曆中興)
세종(世宗 가정제)이 사망한 후 셋째 아들(장자와 둘째가 사망해서 실질적인 장자)인 목종(穆宗)이 즉위하니 연호는 융경(隆慶 1567~1572)이다. 융경 초년, 태자 시절 신하였던 고공(高拱)이 목종의 중시를 받아 서계(徐階)와 대립하다가 결국 서계를 대체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고공은 다시 장거정(張居正)에 의해 대체되었다.
환관의 전횡으로 인해 명조에 특무(特務)가 횡행하고 토지 겸병이 심각해지며 토지세가 증가하자 농민의 부담이 급증했다. 그러자 대량의 유민(流民)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대량의 농민 기의(起義)를 일으켰다. 예를 들어 정통(正統) 시기에는 엽종류(葉宗留), 등모칠(鄧茂七)의 기의가 폭발하였는데, 그들은 광부와 농민을 주로 하여 일찍이 복건, 절강, 강서 3개 성의 일부 지역을 차지했다. 천순(天順), 성화(成化) 시기에는 형양(荊襄) 산악 지역에서 다시 유통(劉通), 이원(李原)이 영도하는 대규모 농민 기의가 폭발했다. 정덕(正德) 연간에는 하북(河北)에서 다시 양호(楊虎), 유육(劉六) 등이 이끄는 기의가 나타났다. 기의는 비록 다 진압당했으나 사회적 모순은 완화되지 않았다.
이밖에 명조 중엽 이후 정부의 재정 위기가 점차 심각해졌다. 당시 전국 토지세로 경사(京師, 수도)에 수송되는 쌀이 400만 석(石)이었는데, 종번(宗藩, 종실 번왕)의 세록(歲祿, 연봉)만 853만 석에 달해 “해마다 수송되는 양으로 녹미(祿米)의 절반을 충당하기에 부족했다.” 여기에 황실의 사치, 용관(冗官, 헛되이 자리만 차지하는 관리)과 용식(冗食 낭비되는 식량)이 더해져 가정(嘉靖) 연간에만 매년 재정 적자가 많은 해는 400만 량(兩)에 가깝고 적은 해도 백여만 량에 달했다. 1567년(융경 원년)에 이르러 태창(太倉)에 남은 은은 겨우 135만 량뿐이라 겨우 석 달 치 지출에 불과했다. 명 왕조에 심각한 재정 위기가 나타난 것이다.
목종 통치 시기에 대신 장거정은 명 왕조에 존재하는 심각한 적폐(積弊)와 위기를 깊이 인식하고 이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목종에게 《진육사소(陳六事疏)–6가지 일에 관한 상소》를 올려 자신의 치국 주장과 개혁 사상을 제출했다. 즉 성의론(省議論, 쓸데없는 논의를 줄임), 진기강(振紀綱, 기강을 떨쳐 일으킴), 중조령(重詔令, 조령을 엄중히 함), 핵명실(核名實, 명분과 실상을 조사함), 고방본(固邦本,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함), 칙무비(飭武備, 무비를 정돈함)의 6가지 조치를 포함한다. 그러나 당시 수보(首輔)였던 고공이 황제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끝내 유야무야되었다.
장거정(1525년~1582년)은 자가 숙대(叔大)이고 호는 태악(太嶽)이며 호광(湖廣) 강릉(江陵) 사람이다.
1572년, 목종이 죽은 후 신종(神宗) 주익균(朱翊鈞)이 열 살에 즉위하니 연호는 만력(萬曆)이다. 신종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수보가 된 장거정은 대권을 손에 쥐고 전면적인 개혁을 시작했으니, 이것이 바로 ‘만력신정(萬曆新政 1572~1582)’이다.
첫째, 정력을 집중하여 공직 기강과 부패를 정돈했다. 한편으로는 “사람을 쓰는 것은 오직 재능으로 한다”라 하였고 동시에 많은 용관(冗官)을 줄였으며, 한편으로는 ‘고성법(考成法 체계적인 업무 평가 및 감찰 제도)’이라는 조치를 취하여 관리의 독직(瀆職, 직무 유기)과 부패를 방지했다.
둘째, 정치를 혁신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장거정은 학정(學政)을 정돈하고 인재를 진흥하는 조치를 제출했다. 각급 학교의 학관(學官)과 유생(儒生)은 반드시 “착실히 연구하고 몸소 실천해야 한다”고 규정하여 공리공담으로 학업을 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 천하의 서원(書院)을 정부의 관공서 기구로 바꾸라고 명령하니 이는 실학(實學)을 제창하고 공담을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셋째, 북부 변방의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장거정은 몽골과의 정치·경제적 연계를 강화하였다. 명 정부는 몽골의 알탄 칸을 순의왕(順義王)에 봉하고 대동(大同), 선부(宣府), 감숙(甘肅) 등지에 차마호시(茶馬互市)를 설립해 중원과 몽골족 사이의 무역 왕래를 전개하였다. 그는 항왜 명장 척계광(戚繼光)을 북상시켜 계문(薊門)을 지키게 하고 이성량(李成梁)을 보내 요동(遼東)을 진무(鎮撫)하게 하여 변방을 정돈했다. 또 서쪽으로 거용관(居庸關)으로부터 동쪽으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장성(長城) 위에 적대(敵臺, 적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적루) 3천 개를 축조해 변방을 강화하였다.
넷째, 경제적인 면에서 장거정은 정부의 재정 난국 문제에 착안해 개혁을 진행하였다. 개혁의 중점은 부역(賦役) 제도를 정돈하는 것이었다. 그는 재정 위기의 주요 원인이 호민(豪民, 토호)이 농지를 몰래 점유해 세금을 회피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관료 지주들의 큰 반대를 무릅쓰고 1578년(만력 6년)에 전국적인 토지 조사 명령을 내렸고, 무릇 공신과 외척의 장전(莊田), 민전(民田), 직전(職田), 군둔전(軍屯田) 등을 일률적으로 측량하게 했다. 만력 9년에 이르러 조사한 결과 전국의 총 전지는 7,013,976경(頃)에 달하여 명 전기 전지를 크게 초과했다. 이는 “가난한 백성은 재산은 없어도 세금은 남고 부자는 토지는 있짐만 세금은 내지 않는” 불합리한 현상을 바꾸는 데 어느 정도 작용을 했다.
전국 토지를 조사한 기초 위에서 부역 제도에 존재하는 폐단을 겨냥해 장거정은 또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추진했다. 일조편법의 내용은 비교적 복잡한데 요약하면 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부역(賦役 부세와 요역)의 합병이다. 전부(田賦)와 각종 명목의 요역(徭役)을 함께 뭉쳐 징수하고, 일부 정역(丁役, 인두세 성격의 역) 부담을 경작 면적에 따라 안배했다. 과거 호정(戶丁)에 따라 부담하던 요역을 이제 정수(丁數 성인 남자 수)와 경작 면적에 근거해 안배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안배하는 비율이나 방식은 각 지역마다 상황이 달랐다. 어떤 지방은 경작지를 위주로 하고 정(丁)을 보조로 했으며, 어떤 지방은 정을 위주로 하고 경작지를 보조로 하였고, 어떤 지방은 정과 토지를 평균해서 분배하였으며, 소수 지방은 전부 경작지에 안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쨋든 요역을 토지세로 대치하는 경향은 일치하였다.
둘째, “일년의 요역은 관에서 사람을 고용한다”는 점이다. 즉, 농민이 직접 요역을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대신할 수 있고, 요역은 관에서 사람을 고용해 감당하게 했다.
셋째, 토지세를 은으로 징수했다. 토지세 중 정부가 징수할 필요가 있는 미맥(米麥)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곡식 대신 모두 은으로 환산해 납부하도록 바꾸었다.
넷째, 부역 징수는 지방 관리가 직접 처리하여 “정량(丁糧)이 모두 관에 수납”되도록 하였고, 원래 양장(糧長), 이장(裏長)을 통해 부역을 징수하고 운송하던 방법을 폐지하였다.
한마디로 일조편법의 실행은 부역의 징수 절차를 간단하게 만들었고 이전의 부(賦)와 역(役)을 분리해서 징수하던 방법을 바꾸어 양자를 하나로 통합했으며, ‘탄정입무(攤丁入畝, 인두세를 토지세에 통합함)’의 추세를 나타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에 대해 “일조편법을 행하니 이로부터 요역이 한쪽으로 치우친 부담이 사라져 비로소 농사를 짓는 이익이 있게 되었고, 성 안의 부자들이 기꺼이 밭을 사며 시골 빈민이 기꺼이 밭을 버리지 않게 되었다. 지금까지 밭이 황폐해지지 않고 사람이 도망쳐 숨지 않으며 세금도 체납되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만력신정의 경제 개혁 효과는 매우 분명해서 조정의 재정 적자가 사라졌다., 사서에서는 “태창의 곡식이 10년을 지탱할 수 있고, 자록(姿祿, 각급 관원의 봉록)의 은이 400여 만 량에 달했다”라고 했다. 이 시기는 명조에서 가장 부강한 몇 십 년이었으며, 또 ‘만력중흥’이라 칭한다.
명말 서광계(徐光啟)의 《농정전서(農政全書)》 기록에서 보면 당시 경운(耕耘 밭갈로 김매기), 선종(選種 종자 고르기), 관개(灌溉 물 대기), 시비(施肥 퇴비 주기), 원예 등 각 방면에서 모두 이미 풍부한 경험을 축적했다. 땅콩 재배가 갈수록 보편화되었다. 고구마, 옥수수가 이미 동남아로부터 들어왔다. 면화는 “천하에 두루 퍼져 남북의 차이 없이 모두 적당하고 사람은 빈부 없이 모두 이에 의지한다”라고 하였다.
송강(松江) 지역은 200만 무(畝)의 토지에 “대부분 면화를 심어” 당시 주요한 면화 생산지였다. 복건과 광동은 사탕수수를 넓게 심었다. 호주(湖州) 땅은 양잠에 적당해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치는 자가 “곳곳에 있었다.” 담배는 명 중엽에 여송(呂宋, 필리핀)으로부터 들어온 후 금방 복건(閩), 광동과 광서으로부터 장강 유역으로 전파되었고 명말에 이르러 이미 “점차 북방 변경에까지 전해졌다.” 기타 찻잎(茶葉), 마란초(馬蘭草), 칠(漆) 등 경제작물과 기름을 만드는데 필요한 유료(油料)작물도 재배 면적이 모두 확대되었고 생산량이 증가했다.
이밖에 수공업도 매우 큰 발전이 있었다. 광동 불산(佛山), 산서 양성(陽城), 복건 우계(尤溪)에 규모가 비교적 큰 야철(冶鐵), 주철업(鑄鐵業)이 나타났다. 제자업(制瓷業, 도자기 제조업) 중심지 경덕진(景德鎮)은 명 중엽 때 민요(民窯) 생산에 매우 큰 발전이 있었다. 민요의 가마는 그 크기가 관요(官窯)보다 3~4배 컸다. 예를 들어 관요 청자는 매 좌(座)당 생산할 수 있는 그릇의 양이 소기(小器)로 겨우 300건(件)에 불과했으나 민간의 청자 가마 한 좌당 천 여 건의 소기를 구워낼 수 있었다.
방직업(絲紡織业) 중 ‘화루기(花樓機, 문양을 짜는 베틀)’의 구조는 이전보다 더 개선되어 능견(綾絹, 비단) 위에 여러 색의 꽃무늬를 제작할 수 있었다. 명말 소주(蘇州) 시장에는 능(綾), 견(絹), 사(紗), 주(綢), 라(羅), 포(布) 등 6종의 직기가 상품으로 판매되었다. 직조해 낸 상품은 “교묘한 변화가 드러나고 꽃색이 날로 새로웠다.” 인쇄업 중에는 이미 금속활자인 동연활판(銅鉛活版)을 사용했으니 이는 송대의 진흙 활자보다 더욱 발전한 것이다.
수공업의 발전은 다시 상업 발전을 촉진하였다. 명 중기 이후 상업 자본의 활약이 대단했다. 전국 각지에 많은 상인과 상업 자본 집단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휘상(徽商)이었고, 그다음은 진상(晉商), 강우상(江右商)이었다. 그다음은 민상(閩商), 월상(粵商), 오월상(吳越商), 관섬상(關陝商)이었다. 그들은 각지에 회관을 설립하고 각종 상방(商幫, 상인 조합)을 조직했다.
그리고 수공업과 상업의 발전은 도시 경제의 번영을 촉진하였다. 남·북 양경(兩京, 남경과 북경)은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동남 연해의 광주(廣州), 장주(漳州), 복주(福州), 영파(寧波) 등지는 대외 무역항이자 상업 도시였다. 장강 연안의 무창(武昌), 한양(漢陽), 형주(荊州)와 대운하 양안의 천진(天津), 임청(臨清), 회안(淮安)은 교통 요지이자 무역 중심이었다. 가장 번영한 강남 지역은 5대 수공업 구역을 형성하였으니, 즉 송강의 면방직업, 소항(蘇杭, 소주와 항주)의 비단 직조업, 무호(蕪湖)의 장염업(漿染業, 풀질과 염색), 연산(鉛山)의 제지업과 경덕진의 도자기업이었다. 그리고 소주, 송강, 항주, 가흥(嘉興), 호주의 5부(府)는 강남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였다.
은(銀)의 광범위한 사용 역시 당시 상품 경제 발전의 한 현저(顯著)한 사례였다. 명 중엽 이후 “조야에서 모두 은을 사용”하니 시장에서 크고 작은 매매가 모두 은으로 계산되었다. 대외 무역의 발전으로 인해 은 수입이 급증했다. 추산에 의하면 가정(嘉), 융경(隆) 시기 광동 시박사(市舶司)가 매년 걷은 관세와 외국 상인의 토지 임대료만 해도 200만 은원(銀元)에 달했다. 만력 이래 스페인에서 나온 멕시코 은화가 이미 복건 광동에서 통행되었다.
하지만 1582년(만력 10년) 장거정이 병사한 후 개혁에 불만을 품은 일부 관리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공격하고 탄핵해 장거정의 가산을 전부 몰수했고, 개혁 조치도 일부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중흥의 국면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만력 20년 이후 신종(神宗)이 조정 정사에 게을리하고 여색에 빠져 멋대로 돈을 낭비하자 중흥 국면이 점차 사라졌다. 관장(官場, 관료 사회)에 당파가 생겨니 알력 다툼이 매우 심각하였다.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각급 관리들이 탐오하고 부패했으며, 많은 아문(衙門)에 책임자가 없어(역주: 신종이 약 30년 동안 정사를 방치해 결재를 하지 않았기 때문) 정사를 처리할 사람이 없자 공직기강이 극도로 부패했다. 동시에 신종이 환관을 신임하여 각 성에 파견해 광산을 개발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재산을 갈취했다.
이때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조선을 침범하자 명조는 수십 만 명의 군사를 파견해 조선을 지원했는데 7년간 대치했다. 이 과정에 많은 돈과 식량을 소모했다. 신종 후기에 이르면서 정치는 더욱 혼란해졌다.
명 신종은 정(鄭) 귀비를 총애해 그녀가 낳은 주상순(常洵)을 태자로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많은 대신들이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장자(長子)인 주상락(常洛)을 태자로 세울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국본(國本) 다툼’이 폭발했다. 이부낭중(吏部郎中) 고헌성(顧憲成)은 이 다툼에 실패한 후 관직에서 물너나 고향인 무석(無錫)으로 돌아갔다. 그는 친구인 고반룡(高攀龍) 등과 무석의 동림서원(東林書院)에서 강학(講學)하고 조정 정사의 득실을 평론하였다.
재야의 많은 사대부들이 “소문을 듣고 호응했고” 일부 현직 관리들도 “멀리서나마 서로 호응”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동림당(東林黨)이라 불렀다. 동림당인은 명 왕조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조정의 개혁을 요구했다. 동림당인은 또 광산을 감독하는 ‘광감(礦監)’과 통행세 및 상업세를 징수하는 ‘세사(稅使)’가 성진(城鎮)의 상인과 수공업자에 대한 약탈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1601년(만력 29년), 결국 동림당 등의 지지를 받은 주상락이 태자가 되었다. 동림당과 기타 당파의 분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멸망을 향해 가는 명조
신종이 죽은 후 태자인 주상락이 즉위하니 이가 태창제 광종(光宗)이나 불과 보위에 오른 지 한달도 되지 않아 독살당했다. 아우인 희종(熹宗) 주유교(朱由校)가 즉위하니 연호를 천계(天啟 1620~1627)라 했다. 희종은 환관 위충현(魏忠賢)을 총애해 이미 쇠락해가던 명조가 멸망으로 나아가게 했다.
당조 예언서 《추배도(推背圖)》와 명조 예언서 《소병가(燒餅歌)》 중에는 명조를 심연으로 밀어 넣은 두 사람, 즉 환관 위충현과 희종의 유모 객씨(客氏)를 일찌감치 예언해 놓았다.
《추배도》 제31상의 그림에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려져 있는데, 남자는 위충현 여자는 객씨를 암시한다.
참(讖)에 가로되:
권력을 잡은 남은 재앙이요
궁궐을 더럽히는구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 나라를 남의 손에 넘겨주네
當塗遺孽 穢乩宮闕
一男一女 斯送人國
이는 위충현과 객씨가 후궁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며 조정을 주물러 명조의 강산을 망쳤음을 가리킨다.
송문(頌文)은
충신과 현사가 모두 침륜하니
하늘이 그 마음을 열어 어지러움이 더해가는구나
비록 가슴에 품은 뜻이 담백하다 하나
건곤은 더 이상 옛 명군(明君)의 것이 아니로다
忠臣賢士盡沉淪
天啟其衷乩更紛
縱有胸懷能坦白
乾坤不屬舊明君
뜻인즉 위충현과 객씨가 권력을 잡으니 충신과 지사가 모두 몰살당하였고 천계 연간 이후로는 더욱 심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숭정(崇禎)이 즉위하여 위충현 등을 혹은 죽이고 혹은 유배 보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소병가》에서는 “환관을 임용해 사직을 보전하려 하나, 팔천 여귀(八千女鬼)가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히도다”, “충량(忠良)을 살해함이 산이 무너지는 듯하니, 아무 일 없던 물가가 기이한 피웅덩이가 되었구나, 교룡과 진짜 골육을 구했으나 가련하게도 부자가 순탄하기 어렵도다”라고 했다.
여기서 ‘팔천여귀(八千女鬼)’는 파자(破字)한 것으로 합하면 ‘위(魏)’ 자가 되니 위충현이 대명(大明) 천하를 훼손했음을 가리킨다.
실제 역사도 이와 같았다.
위충현은 원래 무뢰배 출신으로 먹고 마시고 기생집에 가고 도박을 하여 가산을 탕진하고 경사에 들어와 태감이 되었다. 그는 희종의 유모 객씨와 결탁해 총독 동창 태감(總督東廠太監)으로 승진했고 마침내 황제의 대변인이 되었으며 스스로 ‘구천세(九千歲 역주: 황제가 만 세이이니 그보다 바로 밑이란 의미)’라 칭하였다. 그리고 희종은 위충현에게 모든 것을 용납하고 양보해 조서에서도 그와 평등하게 앉고 일어나게 했다.
희종 주유교가 즉위한 초기 동림당인이 크게 중용되어 수보와 이조, 병조, 예조, 도찰원 등 부(部)·원(院)의 장관을 나누어 차지하니 세력이 한때 왕성하였다. 그러나 1625년(천계 5년), 위충현이 요동경략(遼東經略) 웅정필(熊廷弼)과 순무(巡撫) 왕화정(王化貞)이 광녕(廣寧 지금의 요녕 금주)을 빼앗긴 일을 빌미로, 웅정필이 일찍이 동림당인 양련(楊漣), 좌광두(左光鬥) 등에게 뇌물을 주어 죄를 무마하려 했다고 무함해 대대적으로 옥사를 일으켜 웅정필을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양, 좌 등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온갖 고문을 가해 죽였다. 동림당인이 일시에 체포되거나 살해되어 사라졌다. 위충현이 내외 권력을 움켜쥐자 명조 후기 정치를 더욱 어둡고 부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때 농민의 세금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1618년(만력 46년)으로부터 명 정부는 요동에 병력을 보낸다는 구실로 세금을 추가로 징수하기 시작했다. 전후 세 차례 증액을 거쳐 1620년(태창 원년)에 이르러 무당 추가된 은이 9리(厘)로 증액되어 1년에 얻는 은이 520만 량에 달했다. 이는 전국의 총 토지세의 3분의 1 이상에 달한다. 천계 연간(1621년~1627년)에는 또 관세, 염세를 추가했고 기타 항목의 세금도 증액해 추가된 은이 239만 여 량이었다.
일부 농민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집을 팔고 밭을 팔고 소를 팔았고 심지어 아내를 담보로 잡히거나 자식을 팔아야 했다. 명조는 심한 비바람에 흔들리는 처지에 놓였다.
1627년, 희종이 병으로 죽자 그의 아우인 주유검(朱由檢)이 즉위하니 이가 곧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명 사종(思宗)이다. 숭정제는 조정 기강을 다시 잡고자 객씨를 처형하고 위충현을 압박해 자진(自盡)하게 했으며 환관들이 조정 정사에 간여하는 것을 뿌리 뽑았다. 그러나 이때 위기에 처한 명조가 숭정제에게 남긴 시간은 많지 않았다.
숭정제가 즉위한 후 안팎으로 곤란한 국면에 처했다. 한편으로는 국내 농민 기의가 끊임없이 폭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동의 여진족이 굴기하기 시작했다. 숭정 9년, 즉 1636년에 훙타이지(皇太極)가 명조에 맞서 청조(清朝)를 건립했다. 숭정제는 외적을 물리치고 내부를 안정시켜야 하는 양난(兩難) 에 우와좌왕했다.
명조 말년의 천재(天災)
명조 후기 통치가 더욱 부패하고 어두워졌기 때문에 생산력도 심각한 타격을 받아 수재(水災), 황재(蝗災, 메뚜기 떼 피해)와 역병(瘟疫)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만력에서 숭정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거의 매년 재앙이 발생했다.
1587년(만력 15년), “황하 이북의 백성이 초목을 먹었고” 부평(富平), 포성(蒲城), 동관(同官) 각 현에는 “돌을 식량으로 삼는 자가 있었다.” 이듬해 하남(河南)에 기근이 드니 “백성이 서로 잡아먹었다.”
1590년(만력 18년), 호북 마성(麻城)에서 역병과 기근으로 죽은 자가 4만 명이었다.
1601년(만력 29년), 어떤 사람이 수년간 재앙이 끊이지 않으니, 먼저 진(晉), 진(秦)에서, 나중에는 하(河), 낙(洛)에서, 이어 제(齊), 노(魯), 오(吳), 월(越), 형(荊), 초(楚), 삼보(三輔)에서 발생했다. 이에 백성들이 어떤 이는 흙을 먹고 어떤 이는 기러기 똥을 먹으며 “노약자는 도랑에 메워지고 장정은 이리저리 떠돌며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고 지적했다.
1639년, 북경과 남경, 산동, 산서, 섬서, 강서에서 모두 기근이 발생했고 하남은 “사람이 서로 잡아먹음”이 특히 심각했다.
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 만력 이후 각지에서 끊임없이 농민 기의 및 민변(民變), 병변(兵變)이 폭발해 명 왕조가 곧 멸망으로 걸어갈 것임을 부여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