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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롄: 중공의 뇌복제 타파 (상) -당문화(黨文化)에서 벗어나 복제 뇌 타파

글 : 장제롄(張傑連)

【정견망 1월 14일】

서문

거의 반세기가 넘는 중공의 붉은 통치하에 지금 하늘에선 강력한 힘에 의해 창을 열었다. 신당인(新唐人) 위성이 24시간 끊임없이 진실을 퍼뜨리고 있다. 그 중 대량의 프로그램들은 마치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내가 왜 몰랐을까?”, “사실일까?”하며 국민들의 마음에 커다란 충격을 주는 동시에 중국의 많은 지도급 인사들은 신선한 호기심을 느끼며, 아마도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구경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당성(黨性) 하의 인격 분열과 인성이 왜곡된 사고에 대하여 또 진상과 바른 이치에 대해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봉화대에서 “적의 상황”을 살피는 것처럼 당문화 사유 모델을 통해 “적대세력”의 여러 가지 동향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대뇌이다. 두뇌가 회전하지 않고 왜곡되는 것은 정말 가련한 것으로, 설사 광명이 검은 바구니에 쏟아져 들어올지라도 바구니 안에서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은 계속해서 눈부시다고 불평을 해댈 것이다.

정신복제라는 억울하고 거대한 고통

사람이 묻는다. “어떤 것이 가장 고통스럽습니까?”

“살아도 너 자신이 아닌 것이 가장 커다란 고통이다.” 라고 하늘은 알려준다.

이보다 더 비참한 것은 “살아도 스스로 사는 게 아닌”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오히려 “스스로 살아있다”라고 느끼는 거짓 기쁨, 고통스러우면서도 그 고통을 모르는 것으로 삶이 헛될 뿐만 아니라 고생도 헛된 것이다. 천 년에도 얻기 힘든 사람의 몸을 얻고서도 중공 당문화에 부체되어 영혼이 바뀐 것은 정말이지 몹시 억울하고 커다란 고통이다. 많고 많은 중국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미 다 걸었고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거짓기쁨과 정말로 비참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종교와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고통의 바다를 벗어나 천당으로 회귀하는 바른 이치를 잘 알고 있다. 이는 하늘이 인간에게 남겨준 깨달음의 이치로 명백하지 않아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있는 그대로의 인생살이에 명백해져서 진정한 사람의 일생을 걸어가는 것은 복이 있는 것이다.

비참하게도 오늘 중국 국민들은 이러한 인복(人福)도 누리지 못하며, 뜻밖에도 붉은 귀신을 만나 머리에는 큰 마귀의 올가미를 쓰고 정신 복제에 의해 뇌가 뒤바뀌고 생명의 요소마저 당문화에 의해 악의적으로 재조합되었다. 당문화는 주체적인 생명 형식이 되어 원래 생명 위에 달라붙어 압제하면서 전면적으로 사상과 생각을 장악하고 있다. 사람의 생명정신의 본성은 강력하게 억눌려, 주된 의지(意志)가 혼미해져 깨어나지 못할 만큼 약해졌고 당문화로 둘러싸인 관념은 복제된 신체에서 거리낌 없이 날뛰고 있다.

뇌를 복제하여 잔명을 유지하는 중공

무엇이 당문화인가? 표면적으로는 중공의 통치, 생존, 연속을 위해 특별히 날조된 사람을 기만하는 관념과 사유방식을 말한다. 당문화가 인간을 통제하는 핵심적인 표현은 중공이 얼마나 나쁜 짓을 하든지 관계없이 당문화는 항상 모든 방법을 동원해 중공에게 생존할 시간과 공간을 쟁취하게 하고 최대한도로 중공을 보존하여 그것이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있다. 아울러 이러한 이념의 칩을 당신의 대뇌에 이식하여 반대로 생명주체의 이지적인 사유를 억제한다.

사실 중공에게 무슨 큰 능력이 있어서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도 빨리 멸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신 복제를 당한 중국인들의 대뇌가 중공에 의해 단단히 통제당해 내려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문화는 중공으로 하여금 단지 현실 공간에서 사악한 당의 형식으로 표현될 뿐만 아니라, 당 문화에 의해 복제된 한 사람 한 사람의 대뇌 속에 살아있다. 중공의 가장 진실한 존재는 바로 중국인들의 머리 속이며 당문화는 그 곳에서 최후의 가장 견고한 보루를 찾아냈다. 나중에 언급된 이런 존재 방식은 근본적으로 현실생활 공간 속에서 중공의 존재를 지탱하고 있으며 중국인들은 정말로 이렇게 사악한 영이 달라붙어(附體) 확실히 그것을 먹여 살리고 있다.

구소련이나 동구권 등 초기에 해체된 공산당 체계는 모두 당문화가 통제하는 이 부분이 사악한 중공 주체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것으로 중공이 최후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고심하여 당문화를 경영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정신두뇌복제공정을 타파하자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이 한 층면의 소생을 해결하는데 있어 당문화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중공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인간두뇌복제공정을 완수하였고 이런 생명을 구하려면 바로 더욱더 장관인 반대 방향의 분리와 정화 과정이 필요하다. 게다가 중공은 정신복제를 당한 사람들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아 절대로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정신정화공정은 직접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하며 가장 장관을 이루는 정(正)과 사(邪)의 대 결전이 되었다.

중국인들의 몸에 붙어있는 작은 한 층 당문화의 사악한 성질은, 전 우주의 바른 생명 및 반면적인 생명들을 놀라게 했고 인간의 정사(正邪) 대전은 또 다시 우주 생명이 미래를 선택하는 전쟁이 되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청산할 지는 이번 거대한 정화 과정에서 명확해진다.

하늘이 중공을 멸망시키려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당문화의 외피를 없애고 중생을 구도하려는 것으로 바로 사람들이 당문화에서 분리되도록 돕는 것이다. “구평”이든 탈당이든 모두 인간세상에서의 이번 대뇌회복수술공정의 기술적 핵심과 보조적인 약제로, 하늘이 인간에 자비에서 내리신 해독제이다. 그러나 운명의 최종적인 선책은 여전히 사람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복제 인간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인간을 선택할 것인가, 깨달을 수 있고 깨어있는 사람들도 있고 방향을 잃고 생명을 해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문화는 어떻게 인민들의 정신을 복제하는가

당문화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것의 사명은 끊임없는 조정을 거쳐 왔다. 현재 그것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인민들의 두뇌에 영속할 수 있는 생존 공간을 개척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인간의 정상적인 사유를 교란하려 한다.

중공의 당 문화는 두 가지 점에서 커다란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나는 인간으로 하여금 전면적으로 도덕적 사고의 능력을 포기하도록 한 것이며

둘째는 극도로 물질화된 이해득실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추종하게 한 것이다. 전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을 상실하도록 하여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박약하며 몸을 텅 비게 했으며 이 빈 곳에 당문화가 기어 올라가 주재하도록 했다. 후자는 현대사회의 물질화 추세를 이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오로지 이익만을 도모하게 하고, 완전히 이기적이게 만들어 사소한 이해득실에 구애받아 행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당문화가 이렇게 사악하고 사나운 약을 처방한 후, 사람들은 정말이지 쉽게 깨어날 수 없었고 더 이상 응집력이 없어지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당의 노예가 되어 구차한 길을 걷게 되었으며 악당은 또 그 속에서 지속할 힘을 얻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중공의 이해득실과 관련된 전형적인 화제에 대해, 사전을 찾아보며 일치하는지 살핀다. 그들은 또 확실히 하나의 조사표를 설치하여 살인, 거짓말, 탐오, 서양, 미국, 파룬궁 등 글자 항목을 뒤적일 때 조사해 낸 것은 바로 기존 당문화의 주해이다.

인터넷에 발표된 《정상적인 사유로의 회귀》라는 글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열거하고 있다.

예를 들면 분명히 공산당에 의해 박해를 받았지만 일단 누명을 벗겨주면 베풀어 준 은덕에 감격한다.

공산당이 좋은 사람을 다스리려 한다고 말하기만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내가 공산당이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인권을 언급하면, 바로 “정치를 한다”고 말한다.

서양에서 어떤 사람이 중공을 비평하면, 바로 “반중국 세력”이라고 말한다.

중공의 문제점을 폭로하면 어떤 사람은 다른 나라들도 유사한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해외 화교들이 중공의 폭행에 항의하는 것은 애국이 아니며 중국을 먹칠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중공이 대량의 영토를 팔아먹었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매국이 아니라고 할 구실을 찾는다.

CCTV에서 1년 365일 간 주입식 방송을 듣는 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느끼나 중공의 악행을 폭로하는 전화, 우편, 혹은 몇 십분 간의 진상 스폿뉴스를 시청하면 “정상” 생활을 방해했다고 생각한다.

흉악범에 대해서는 진상을 추구하고 법률로 통제하려 하지만 공산당이 역사적으로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악에 대해서는 오히려 항상 용서한 후 그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

그 결과 당신은 다음과 같은 괴이한 현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 정치 평론가는 이것을 “국(國)+가(家) 분열증”이고 칭했다. 개인과 가정과 관련된 인생 화제를 이야기할 때는 이런저런 온갖 관점도 다 존재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일단 중공과 그 당의 악행을 건드리기만 하면 즉각 흑백의 단조로운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도 모르게 “당문화”의 사유모델을 동원하여 “당”의 모든 이익을 순종하고 보호하려고 한다.

약간 과장해서 말한다면, 서양에 여행 온 사람들 가운데 무작위로 한 중국인을 붙들고 국사(國事)에 대해 이야기하면 대개 백만, 천만, 수많은 사람들의 사유모델을 대변한다. 그들은 같은 문장 형식, 같은 전환, 같은 질문과 어조, 같은 비유를 사용한다. 왜 중국사람들은 한 틀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을까? 당 문화에 의해 복제된 것 이외에 누가 인간의 근본적으로 복잡다단한 사유를 이렇게 간단한 몇 가닥으로 규범화 하고 게다가 자아 감각을 마치 타인의 몸에 있는 살처럼 느끼게 만든 것일까. 이러한 생각은 중공의 사고와 중공의 전유물에 속한다.

사실 그는 바로 중공의 전형적인 복제품이다. 근본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문화는 두뇌 속에서 자동적인 여파로 신속하게 문자를 만들어 당신이 사용하도록 강요하며 본능적인 반사를 형성한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가 개시되기 전에 먼저 당문화의 조건 반사가 있어야만 비로소 거대한 암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의학적으로 복제인간을 만들어 낸 적은 없지만, 중공은 정신두뇌 체계 중에 이미 복제를 완성하여 많은 당문화의 정신 칩을 이식하여, 수천수만의 입들이 중공의 나팔수가 되게 하였고 대뇌는 중공의 활성 메모리 판이 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중공이란 서버의 죄악은 조용히 인민들의 책임으로 전가되었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보지 못하는 억울한 누명이자 커다란 고통으로, 산채로 당문화의 일족이 되어 복제 인생의 길을 걸었다.

“뇌복제”야말로 중공의 가장 큰 “공헌”

여기저기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구평>이 사악함을 멸하려 하며 진상을 알게 된 사람들은 조급하게 “삼퇴(三退)”를 권고한다. 만약 중공과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다면, 일단 중공이란 서버가 영원히 작동되지 않을 때 그와 연결된 생명 메모리도 폐품이 될 것이다.

피복제된 인간은 자신의 대뇌가 없어서, 말하는 사유도 당의 올가미와 함께 한다. 이러한 뇌 복제 현상은 매우 끔찍한 것으로 복제 대상의 범위는 국내에서 해외까지, 작은 것에서 큰 것에 이르기까지 더욱 깊이 천편일률적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일단 당의 사악한 폭력 사건에 언급된 것이면, 당문화 프로그램은 즉각 자동 동원되며 중국인들의 사유 논조는 놀랍게도 일치한다. 배우거나 기억할 필요 없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키가 크거나 작거나 뚱뚱하거나 마르거나 상관없이 자유자재로 유포되어 아무런 내통이 없이도 오히려 이구동성으로 같은 목소리를 낸다.

이렇게 제한적인 몇 가지 사유 논조는 무한한 사람 형상을 한 무리가 되어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에서나 적용되며 중공에게 안마, 위로, 보호, 해결을 준다. 이것은 괴이한 일일 뿐 아니라 일반적인 선전 교육의 효과를 뛰어넘어 완전히 80여 년간 중공이 당 문화를 통해 중화 민족에게 행한 두뇌복제라는 거대한 공정의 “걸작”이다. 1억에 달하는 이런 명품들은 자연스레 중공이 중국인들에게 만들어준 최대 “공헌”으로 과시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인들에게 있어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무참히 박탈하여 지각이 없는 상태에서 “살아도 이미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게 아닌” 것이 되게 하였다.

더욱더 비참한 것은, 이런 악독한 두뇌복제 사업은 도처를 오염시킬 수 있으며, 조류독감, 사스(SARS) 등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복제 수술은 대부분 장기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단계별로 완성되며, 중공 선전 매체 앞에서 감염 효율이 가장 높다. 한 사례에서는 중공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하고 있는 일부 중국인, 서양인, 해외 국적을 가진 중국인들이 일단 중공 범위 내에서 며칠만 여행하고 돌아와도 얼굴과 말투가 변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중공이 중점적으로 강도 높게 짧은 시간 내에 인간의 뇌를 복제한 것이다. 다시 그 복제된 사유를 통해 사악한 당의 인사를 평론하든지 풍자와 욕설을 하든지 상관없이 중공의 사악한 혼(魂)에게는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으며 “작은 비난으로 큰 어려움을 돕”는 것으로 당문화의 복제 공간에서 춤을 추며 분위기를 띄우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읊어대는 대사는 중공 당문화의 관념이 그의 입을 빌어 선전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복제 뇌”를 때려 부술 좋은 기회

이렇게 복제된 방대한 종족 환경 가운데서 좌우를 둘러보면, 모두 이러한 사람들이라 서로 의지가 되며 이상한 일을 만나도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마치 화장실에 오랫동안 있으면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하는 것처럼, 캄캄하고 오랜 어둠에서 동공도 적응력이 커진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일부 경계심을 가지고 독립적인 사유를 하는 인성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은 오히려 사회에서 이상한 취급을 받는다.

고통 속에서도 고통을 모르는 중국 동포들은 인류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역사적 대격변을 알고 있다. 하늘이 주는 기회는 공평한 것으로 인간은 미래를 선택할 복을 가졌다. 그러나 중국인에 대해 말하자면 두뇌가 복제된 당문화 사유는 자생적인 보호벽이 되어 눈앞을 가로 막아 실제적으로 이미 중국인들이 하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장애가 되었다.

이 국민들의 머리에 두른 정신적 올가미는 마치 주문처럼 사물을 통제하는데, 다른 점이라면 스스로 주문을 외면서 자신을 해친다는 것이다. 당문화의 사악한 논조는 자신이 외우면 외울수록 올가미는 더욱 바짝 죄어져 더 깊이 제어한다.

그러나 머리에 마귀의 올가미를 쓴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중국인들이 만약 스스로 공평한 기회와 인연을 추구한다면, 자신의 혼백과 미래를 불러 들여 이 당문화에 도망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을 유지하기는 어렵지 않다. 바른 마음과 바른 신념을 가지고 사악함을 다시 인식하며 “당의 서적[黨經]”을 읽지 않고 복제 뇌의 올가미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다.

스스로의 복제 뇌를 때려 부수려면 지금이 바로 적당한 시기이다. 천상의 변화와 커다란 조류에 힘입어 역사를 변경하는 힘으로, <구평>을 읽고 전하며 올가미를 없애고 뇌를 안정시켜 중공을 탈당하는 것이다.

당문화의 사악한 논조 분석

다음은 당문화가 발작할 때 반드시 제창하는 가장 광범위한 조문들이다. 미력이나마 “사람이 아닌” 커다란 고난을 해소하는 것을 돕고자 한다.

1. 모호한 수법과 생명에 대한 경시

중공은 지금까지 살인을 중단한 적이 없으며 폭력이야말로 그것의 본성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다른 의견을 탄압하고, 다른 한편 중공에 대한 두려운 기억을 불러일으켜 끝내 조건반사적으로 대중이 스스로 조율할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 중공의 살인은 보기만 할 뿐 말하지 않으며 마음속에 새겨두게 하는 것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긴다.

물론 사회 도의의 목소리는 여전히 존재하며 그것의 살인 사실과 본성은 용감한 해외 매체들에 의해 즉각적으로 폭로되었다. 이때 당문화의 대책은 바로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광저우 당국이 주민들을 총으로 살해한 사건이 알려지거나 파룬궁을 잔혹하게 박해하여 죽게 한 사건이 폭로될 때 당문화의 즉각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살인하지 않는 국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은 이라크 사람들을 살인하지 않았습니까?”, “문화대혁명 때는 살인한 것이 더 많았는데 당신은 어째서 거기에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까?” 등등.

당 문화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도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치중하는 것은 살인 자체이지 도의상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단 생명이 분명하게 도덕적 태도를 성명하면 우선적으로 중공의 살인에 대해 도덕적인 부정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당문화가 발작할 수 있는 공간은 크게 제한하기 때문이다.

복제된 뇌의 특징은 중공이 아무리 잔혹하고 깜짝 놀라운 사건을 저질러도 그에 대한 태도를 표명하기를 원하지 않고 도덕적인 태도 문제를 멀리하거나 혹은 모호하게 “살인은 당연히 좋지 않죠.” 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뒤이어 중공의 살인에 대해 변호하기 시작한다. 그의 중점은 영원히 앞에 한 말이 아니라 뒤에 하는 책임회피에 있다.

인간의 정통문화 이치는 당연히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중국 전통문화와 서양의 종교문화 역시 이러하다. 그러나 중공 당문화는 이와 상반된 것으로 일관적으로 생명을 경시하는 관념적 사유를 복제한다.

중공이 살인 문제를 모호하게 만드는 당문화의 두 가지 방식

(1) 도덕 문제를 수치화하고 살인을 희화화

수치를 가지고 살인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찾으면 살인이 줄어들었다고 모호하게 하며, 마치 살인이 줄어든 것은 중공이 관대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사회가 발전했다고 여기게 한다. 이는 살인 자체의 도덕범죄의 심각성을 회피하는 것이며, 게다가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살인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것이다. 심지어 과거의 죄악을 가지고 현재의 죄악과 비교하며, 죄악의 경중을 비교하는 것은 부도덕 가운데서 부도덕을 수호하려는 것이다. 과거 살인으로 현재의 살인을 모호하게 한 것처럼 당문화는 이렇게 비인간적인 지경에 이르렀다.

만약 외계인이라면 사람을 짐승으로 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 공간에서 이렇게 조금의 부끄럼도 없이 언급하는 것을 볼 때 중공 당문화의 사람 뇌에 대한 복제를 알 수 있으며, 실질적으로 사람을 사람이 아닌 악령(惡靈)의 일족으로 변이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 당문화는 더욱더 기고만장하게 “중국인들은 너무 많다. 몇 사람 죽여도 대수롭지 않다. 아니면 누가 중국인이라고 하겠는가?”라고 공언한다. 이를 통해 당문화의 인성에 반하는 본질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중공이 사악함의 근원으로써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살인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중공이 악을 행하는 것을 중단할 을 기대하지 않지만, 인체생명은 이에 대해 분명한 도덕적 태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도의적으로 중공의 폭력을 단호히 부정하는 것은 사실상 중공을 제한하는 것으로 점차적으로 그것이 악을 행하는 두뇌 공간을 잃게 할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무조건 그를 부정한다면, 중공은 인간의 정념(正念)을 말살하고 살인할 기회를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중공이 살인을 하는 것은 그 사악한 본성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과거와 현재 모두가 그 본성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2) 배경을 만들어 살인의 초점 분산

중공도 살인이 정상적인 사유에 대해 말한다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때는 강제로 흑백을 전도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지만 그래도 보는 눈이 있다. 그래서 당문화는 사이비 논리를 만들어 살인을 커다란 배경에서 모호하게 해버린다.

흰 배경에 검은 점이 눈에 두드러지겠지만 만약 검은 점이 많다면 그다지 눈에 띠지 않는다. 이렇게 당문화는 먼저 일련의 모호한 작업을 한다. 예를 들면 중공은 인간 죽음의 성질, 사건의 경위 등을 개괄하여 단순히 “살인”이라는 글자를 취해 전 세계적으로 모호하게 하고는 일부러 이렇게 커다란 배경을 만들어낸다. “세계에 살인 사건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은 중공과 다른 모두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중공은 너무나도 모두와 같아지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본질은 사악한 영이고 인류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실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가정에서도 살인 통치를 하며 또한 인류의 전쟁을 가지고 은폐하고자 하는데 마치 쟁투에 속하는 것을 정상적인 희생의 예에 속하는 것처럼 만든다.

인류는 전쟁 중에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당문화는 그의 시스템적인 살인, 무고한 살인, 양심적인 사람에 대한 살인을 종종 전쟁의 인명 피해와 연관시키고는 비로소 안전하다고 느껴 이렇게 모호한 배경을 찾는다. 이렇게 되면 중공의 살인 사건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되며 혹 많아지더라도 복제 뇌에 의해 자연히 용서될 것이다.

그러나 통계에 따르면 20세기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사실은 수백 건의 크고 작은 전쟁 가운데, 민주 국가 사이에 발생한 전쟁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독재와 공산이 인류의 전쟁과 살육의 화근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민주화 과정에서의 희생과 중공이 독재전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행한 살인은 완전히 서로 다른 성질의 문제이다. 특히 현대 문명사회에서도 그것은 여전히 살인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것은 중공이 행하는 살인은 근본적으로 인류와 동일한 역사 과정이 아니며, 그것은 인류를 파멸시키는 그것의 독립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사악한 노선을 걷는 것으로 그것이 인류에 반대하는 역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비록 표면적으로 그것은 인류와 100년을 공존해 왔지만, 실질적으로 작용하는 공간은 다른데 바로 인간의 정신적 공간, 복제된 공간이다. 바로 그런 공간에서 인류를 파멸로 치닫게 한 것이다. 그러나 정신의 파멸은 필연적으로 물질 문명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대 파멸 커다란 블랙홀이 초래될 것이다.

인류가 자유민주의 과정을 추진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중공은 정신 공간에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살인은 이러한 근본적인 충돌의 외재적 표현이다. 당문화의 가소로운 점은 서양 국가의 어떤 전쟁을 이용해서 중공이 살인한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심지어 대자연의 재해로 인한 인명 상해와 비교하는데, 어쨌든 모두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이 세계에서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하고, 어떤 사람이 죽으면, 나도 죽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논리인데 이것이 인간의 이치란 말인가? 오직 사악한 영만이 비로소 이러한 문화사유가 있을 수 있다.

만약 인류가 정말로 평화롭고 자연재해가 없어진다면 중공은 인간이 늙어 사망하는 것을 사망으로 삼아 어쨌든 늙어서 죽은 것이나 살해하여 죽은 것이나 조금 앞서 사망한 것에 불과하다며 같은 것이라고 추론할 것이다.

중공 사령의 생명에 대한 경시는 당문화를 통해 살인 문제에서 비열하고 천박한 논조가 전 체 중국인들에게 복제되도록 했고, 생명을 중시하는 정통적인 인본(人本)문화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모든 사건의 성질을 모호하게 하여 살인을 숫자놀음으로 바꿨다. 그리고는 다시 “어쩔 수 없는 살인”, “죽이지 않으면 나라가 어지럽게 된다”, “내가 그 상황이라도 죽였을 것이다”라는 등등 도덕적 판단을 버린 일련의 사악한 논리와 함께 이러한 문화는 국민들의 머릿속에 광범위하게 만연되어 중공에게 광활한 살인 공간을 제공했다. 그 결과 중공은 자연스럽게 살인을 해도 걱정하지 않으며 순조롭게 아무런 방해 없이 살인할 수 있었다. 당문화는 바로 이렇게 중공을 도와 복제 생존하게 한다.

당문화 복제의 허위변천 과정

당문화가 가장 두려워하는 점은 바로 진지함이다. 어떤 문제를 만약 철저히 간파한다면 당문화는 즉시 붕괴될 것이다. <누가 신(新)중국인가>라는 책은 마치 중공을 오싹하게 만들 정도로 속속들이 중공의 본질을 파헤쳤다. 그래서 현재 중공은 이 책에 대한 대규모 비판을 개시하였다. 중공 집권기간에 비정상적인 사망인구는 8000만 명인데도 당문화는 과거에 눈도 깜빡하지 않고 기세등등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표면적으로 모호한 뜻을 품은 글을 발표한 것은 역사가 있고 현재의 원인이 있다.

과거 중공의 문화 정책은 직접적인 찬양이나 노골적인 것들이 독무대를 차지했다. 당시 설사 중공이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선량하고 인내심을 가진 백성들은 그것에게 선의의 기회를 주었다. 그래서 중공은 이러한 빈틈을 파고들어 이러한 노골적인 찬양을 크게 선전하고 중국인들의 머리 속에 직접적으로 “큰 별”, “붉은 태양”, “큰 은인”, “무조건 좋다” 등등의 것을 새겨 넣었다.

만약 빠진 게 있다면 지금의 북한을 참고할 수 있다. 최근,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일의 최신 명언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한다면 조국 전진의 발걸음이 한 걸음 늦춰질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나는 휴식도 제대로 취할 수 없다.”는 것을 게재했다. 그 오만방자한 심태와 자부하는 어투는 심각한 정신병환자들조차 부끄럽게 만들며 말문을 막히게 할 뿐이다.

현재 이런 말을 들으면 당신은 가소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북한 사람들은 정말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신문에서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중공은 바로 이런 공개적이며 노골적인 복제를 통해 먼저 주인으로 들어가 당신의 머리 속에 진실이든 논리이든 관계없이 당신의 머릿속에 확고한 작은 배경을 구축하고 매일 자동적으로 중공의 “위대하고 광명하고 정확함”을 찬양하게 했다.

지금 사람들이 이런 배경을 없애려면 어려움이 매우 크다. 마치 문신처럼 문신을 시작했을 때는 그리 뚜렷하지 않은 마성의 행동이었으나, 나중에 깨어나고 난 후에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당문화의 뇌 속 반응은 세심한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꼭두각시가 중공을 충분히 비난하고 나서 기뻐하면서 노래를 부르지만 입을 열면 도리어 “앞사람의 일을 이어받아 발전시켜 나가자, 우리의 길을 영도하는 사람은…”와 같은 중공의 노래이다. 그러므로 사악한 영은 다른 공간에서 사람의 취약함을 비웃는다.

사람의 마지막 지주

중공 당문화를 없애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진지하게 대처하는 것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중대한 의미와 엄숙성을 아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미 중공에 의해 신앙이 없고 세상을 업신여기며 그 어떤 것도 진지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중공은 현대사회에 걸 맞는 인간의 “진지”란 두 글자를 고의로 없애버렸다.

중공이 집권한 후 오늘까지 저지른 어두운 사실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실망과 함께 어쩔 수 없어 한다. 그 결과 보편적인 생활 태도를 함부로 하는 것이 초래되었다.

어떤 때는 거짓 선전을 분명히 알면서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즐거움을 취하는 형식으로 대뇌에 보존된다. 예를 들어 중공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 어쨌든 이것은 노래에 불과하며 이렇게 많은 노래들 내가 부르거나 부르지 않거나 상관없이 당의 혁명을 찬양하는 가곡은 계속해서 불려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면 부르는 사람에게 그대로 영향을 주는데 당문화의 우회적인 포위공격은 이렇게 흉악한 것이다.

이번에 중공 해외 보선(保先)에서 “동일송가(同一首歌)”를 제목으로 갈라 공연을 하기로 했다. 이것은 이런 이름으로 중공과 동일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바로 그것을 위해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사악한 물질이 바로 당신의 몸에 주입될 수 있다. 사실상 이것은 해외 당 문화의 보선 버전이다.

이런 모든 현상들은 당문화의 모호화 책략의 표현이다. 비록 사람이 흐리멍덩하다고 할지라도, 당문화는 분명한 체계와 사전 모의가 있는 것으로 철저하게 인간의 마지막 남은 약간의 양심과 정의마저도 조금도 남지 않도록 재촉하려는 것이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명백한 일면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은 사람을 구할 수 있으며 당신이 최후에 의탁할 수 있는 곳이다. 또 다시, 정말로 당문화가 당신을 철저히 변이시키고 완전히 복제하여 당신이 사악한 당의 한 분자가 되어 “완전한 짐승의 인간”이 된다면, 다시 말해 정말로 우주의 쓰레기가 된다면 당신의 운명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해질 것이다.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원문위치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6/1/14/3532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