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종용(從容)
【정견망】
희미한 기억 속에 외할머니의 온화한 얼굴은 늘 뚜렷이 떠오른다. 외할머니는 오래된 둥근 거울 지니고 계셨으며 온화한 미소에 머리에 남색 두건을 쓰셨다. 푸른색 치마에 전족을 하셨고 허리가 약간 굽었는데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청기와 대문 건물아래서 딸과 외손자들이 오는 것을 맞이하셨다. 이것이 내 어린 시절의 가장 행복한 기억이다.
외할머니는 황해에 가까운 옛 마을 요왕성(堯王城)에서 20세기 초에 출생하셨다. 이곳 사람들은 순박하고 경치가 수려하며 산수에 의지하고 많은 전기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내 기억에 대나무 울타리가 채소밭을 둘러싸고 못이 널리 퍼져있으며 갈대와 부들포가 빽빽이 자라고 있었다. 대나무 숲은 검은 기와에 하얀 벽을 가진 소박한 집이 두드러지며 강물이 깨끗하여 바닥이 다 보였다. 수풀은 그늘이 우거지고 온갖 새가 지저귀고 있었으니 한때 어린 시절의 낙원이었다.
아버지는 ‘국가간부’로 멀리서 일을 했고 그때 7-80년대 간부는 당의 요구에 따라 반드시 “혁명”의 수요에 근거하여 처자식을 데려가지 않고 홀로 혁명에 투입되어 배치하는 대로 복종해야 했다. 이렇게 부친은 비교적 먼 도시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와 어머니는 늘 고향에서 도시로 갔다가 다시 도시에서 농촌으로 돌아오며 움직이는 생활을 했다. 어떤 때 아버지는 일이 있어서 어머니가 빨리 얼른 달려가서 돌보았으며 나는 할머니와 함께 생활해야 했다. 매일 밤 외할머니와 자리에 누웠을 때 늘 외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고 그러면 외할머니는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어린이가 어떻게 부모에 효도하고 착하게 살았으며 나중에 신선을 감동시켜 신선이 돕는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 때문에 나는 신선에 대한 믿음이 깊이 뿌리박혔다.
외할머니는 수차례 나한테 자신이 어렸을 때 고향에서 일어난 진실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것은 여기서 수십여 리 떨어진 해변 근처의 요왕성에서 있었던 일이다. 외할머니가 12 살 되던해 3월 봄날 어느 부잣집 아가씨가 독서하는 것을 모시고 있었는데 마을 앞 보리밭에 한 마리 용이 떨어졌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달려갔다. 외할머니와 소저도 따라서 구경했다. 알고보니 그 용은 신체 길이가 한 두경(畝-밭 이랑의 단위)이나 되며 머리는 마치 물을 담는 나무통만큼 굵고 뿔과 수염이 나 있었다. 온몸에 용 비늘이 나 있었다. 좀 아는 사람은 이것은 용이 하늘에서 잠시 벌을 받아 떨어져 수난을 당하고 있는 중인데 겁난이 다 차면 돌아간다고 했다.
중화민국 시기 사람들은 신에 대해 경건하고 존경했으므로 사람들은 스스로 대열을 이루어 용에게 물을 뿌려주었다. 3,4일이 지나자 그 용은 점점 더 괴로워하는 것 같았고 몸에 많은 파리가 날아들었다. 나이 많은 어떤 분이 대나무와 돗자리로 장막을 만들어 태양을 가려주었다. 어떤 사람은 두부로 만든 탕을 가져와 용에게 먹여주었는데 용은 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잘 먹었다.이렇게 밭에서 오일장이 열릴 때가 될 때까지 있었다. 용은 수난기간이 차자 한바탕의 폭우가 내릴 때 천둥번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 번개가 빽빽이 몰아치는 하늘에서 성 쥐위를 몇 바퀴 돌더니 고개 숙여 감사를 표시하고는 사라졌다. 이때부터 요왕성 이곳에서는 해마다 비바람이 순조로웠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외할머니는 여러 차례 직접 신기루를 보았는데 구름 끝에 또렷이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 피난하는 사람들은 모두 고대복장을 했고 성벽 담 위에 몰려서서 해일을 피하는 진짜의 모습이었다. 과거 그곳에는 3-4년 마다 신기루가 나타났기에 사람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일생 경건하게 신과 부처를 믿었으며 다른 사람을 질투하지 않고 자기는 비록 풍부하지 않지만 다른 곤란한 사람을 보면 늘 사심 없이 도와주었고 물과 식량을 낭비하지 않았다. 더욱이 여자는 깨끗해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조금도 물을 낭비하지 않았다. 아무리 촌에서 늘 물이 흐르는 큰 강이 있었고 앞쪽에는 또 물이 흐르는 못이 있었는데도 외할머니는 옷을 씻으러 갈 때마다 겸손한 마음을 품고 물을 사용하며 낭비하지 않았다. 여인이 물을 낭비하면 사후에 벌을 받아 그 물을 다 마셔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여자가 사후에 물소의 머리를 묶어 물 마시는 것을 도와야 한다고 했다.
매년 명절이 되면 만두를 찌던지 국수를 만들던지 외할머니는 늘 경건하게 하늘과 땅에게 고시레 한 후 식구들이 먹도록 했으며 절대 함부로 자기가 먹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늘 마당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 : 사람 마음이 갈수록 나빠지니 하느님은 대홍수나 지진으로 사람을 도태시킬거야! 어머니 말에 따르면 지주와 토지를 나누느라 다툴 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재물을 탐내지 않고 지주 동씨 집(東家)은 위인됨이 두터워 우리를 홀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공산당의 공작조직에 의해 부구회장(婦救會長 일종의 부녀회장 같은 직)의 직위를 빼앗겼다. 외할아버지는 민병의 몸이었으나 오히려 지주를 때리지 않아 민병에서 제외되고 입당도 하지 못했다. 먹고 놀기를 좋아하는 일부 가난한 사람은 대개 공산당 적극분자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대중 앞에서 지주와 아내의 옷을 벗겨 옷을 찢은 뒤 입으라고 주었고 어떤 사람은 지주의 딸과 보물을 빼앗아 자기가 차지했다. 적극분자는 좋은 땅을 다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외할머니집안은 척박한 몇 경의 토지만 나누어 가졌고 지주와 토지를 나누기 전에 비해 땅은 면적이나 질적인 면에서 더 못했다. 까딱하면 중농과 부농으로 분류될 뻔 했다. 마을 뒤에 있는 큰 강의 모래톱에 당에서 미친 듯이 사람들을 이끌고 수백 가구의 지주와 그 아들 딸들을 때려죽여 강이 붉게 물들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정치운동을 빌어 재물과 여자를 빼앗은 자들은 하나도 끝이 좋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일생동한 착하게 살다 병 없이 생을 마쳤다.
외할머니는 1989년 대학생들이 단식하던 때에 신체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식구들을 연루시키기 싫어 단식했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는 생전에 나를 가장 만나보고 싶어 했는데 그때 오히려 나는 먼 곳 러시아 접경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입학시험 준비에 몰두하느라 외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선량한 외할머니가 내게 신과 부처, 사람이 부모에 효도하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신과 부처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고 이것은 내가 이후에 법을 얻는데 깊은 기초를 닦아주었다. 물과 양식을 낭비하지 않고 대학에서 한밤중에 늘 화장실에 가서 수도꼭지를 잠갔다.
긴 세월이 지나 30년 후에 고향을 방문하여 보니 강물은 말라 바닥이 드러났고 숲에 나무는 다 잘리고, 연못도 다 말랐으며 바람과 먼지가 일고 새소리 물소리는 끊어져 있었다. 외할머니의 옛 집도 이미 어디간지 사라져 가슴 아프기 그지없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외할머니 어디계세요? 저는 외할머니께서 천당에서 저를 지켜보고 계시고 조만간 제가 원만하게 조사정법하고 진정한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으로 믿어요.”
발표시간: 2012년 10월 22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node/113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