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견 문화교재 편집소조
【정견망】
jiāng xíng wàng kuāng lú
江行望匡廬(강행망광려)
qián qǐ
錢起(전기)
zhǐ chǐ chóu fēng yǔ, kuāng lú bù kě dēng。
咫尺愁風雨(지척수풍우), 匡廬不可登(광려불가등)。
zhī yí yún wù kū, yóu yǒu liù cháo sēng。
祗疑雲霧窟(지의운무굴), 猶有六朝僧(유유육조승)。
【작가】
전기(錢起)는 자가 중문(仲文)으로 당나라 오흥(吳興 지금의 절강) 사람이다. 생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으며 향리에서 명성이 아주 높았다. 현종 천보 10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특히 시를 잘 써서 ‘대력(大曆 당 대종 시기 연호) 10 재자(才子)’의 하나로 꼽힌다. 저서로는 《전중문집(錢仲文集)》 10권이 있다.
【주석】
(1) 匡廬(광려 kuānglú):여산(廬山), 광산(匡山)이라고도 하는데 강서성 구강현(九江縣)에 위치한다. 전설에 따르면 주(周)나라 때 광유(匡裕)가 일찍이 이곳에 은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여(廬)란 누추한 집 즉 오두막을 말한다.
(2) 咫尺(지척 zhǐchǐ): 거리가 아주 가깝다는 의미. 고대의 길이 단위로 1지(咫)는 8촌에 해당하고 1척(尺)은 10촌이다.
(3) 祗(지 zhī):다만, 지(只)와 통한다.
(4) 窟(굴 kū):동굴
(5) 六朝(육조 liùcháo):삼국시대 오(吳)나라, 동진(東晉), 남조의 송(宋), 제(齊), 양(梁), 진(陳) 등 여섯 왕조가 모두 건강(建康 지금의 남경)을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 시기를 육조라 통칭한다.
【해석】
지척의 거리지만 비바람에 시름겨우니
광려산을 오를 수가 없구나!
다만 구름 속 저 동굴에는
육조시대 고승이 아직도 살지 않을까?
【관련 일화】
여산은 한마디로 중국의 유명한 선산(仙山)이라 할 수 있다. 주나라 위열왕(威烈王 ?~BC 402년) 때 광유가 여산에 오두막을 짓고 은거했는데 왕이 여러 번 출산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선인(仙人)에게 도를 전수받아 선인과 함께 이 산에 놀러와 산 동굴을 집으로 삼았으며 마지막에 수련 성취해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머물던 곳을 ‘신선의 오두막(神仙之廬)’이라 불렀고 여기서 여산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동진(東晉)시기에 ‘호계삼소(虎溪三笑)’의 일화는 여산에 관해 가장 유명한 전설이다. 당시 고승이던 혜원(慧遠)이 여산 동림사(東林寺)에서 30여 년을 수행하면서 한 번도 산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손님을 배웅할 때 동림사 앞에 있던 호계(虎溪)를 넘어서면 호랑이가 포효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인 도연명(陶淵明)과 도사 육수정(陸修靜)이 혜원법사를 방문했다. 모두 수련하는 사람들이라 서로 대화가 잘 통했는데 혜원법사가 두 사람을 산 아래까지 배웅하다가 대화에 집중한 나머지 무심코 호계를 지나버렸다. 신령한 호랑이가 포효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이 호계를 지난 것을 발견한 세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고 한다.
수련하는 사람은 수신양성(修身養性)에 정통하기 때문에 종종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수도인 팽조(彭祖)는 8백 년을 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배를 타고 장강을 지나면서 지척에 명산을 두고 운무가 가득한 동굴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육조 시기 고승이 아직도 세상에 남아 여산에서 계속 은거하며 수련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 것이다.
역주: 광유는 주나라 무열왕 때의 사람이다. 형제가 모두 일곱인데 모두 도술을 지녔고 함께 여산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나중에 모두 신선이 되었고 텅빈 오두막남 남겼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이 산을 여산이라 불렀다. 나중에 한 무제 때 광유를 존중해 그를 여산군(廬山君)에 봉했다.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48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