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호천(王昊天)
【정견망】
(1) 첫 번째 가르침
인간세상에선 800명의 제후들이 주나라 무왕을 중심으로 맹진(孟津)에 모여 연맹을 맺고 호호탕탕(浩浩蕩蕩)하게 폭군 주왕(紂王)을 토벌하러 나서고 각문각파(各門各派)의 성스런 존자들 역시 속세로 내려와 강자아(姜子牙)를 위한 계책을 마련해 한 차례 한 차례 사문왜술(邪門歪術)의 진영을 격파하며 무왕이 주(紂)를 토벌하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화란들을 제거한다. 동시에 선가(仙家)의 여러 존자(尊者)들은 강자아의 봉신기일을 맞추기 위해 봉신 이전에 나타나는 모든 어지러운 일들에 대해 여러 존자들이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아무 조건이나 대가 없이 찾아와 서로 돕는다. 여기에는 강자아의 사부 원시천존(元始天尊)도 포함되는데 여러 차례 하계에 내려와 무왕과 강자아를 도왔다.
사실 무왕이 주를 토벌하는데 천하제후들이 연맹을 맺어 대응하는 이런 것들은 모두 세간에서 겉으로 표현되는 현상에 불과하고 이것이 출현한 이유는 하늘 밖의 고급생명(高級生命)이 각문각파 수련자들의 진실한 정황을 가늠하고 그들의 진실한 위치를 놓기 위한 것이다. 선가(仙家)는 세간의 아주 협소한 땅에서 한차례 거대한 정사대결을 펼쳐냈는데 이 정사대결을 통해 각문각파 수련자들의 진실한 심성(心性)표준을 보기 위한 것이다.
근기가 천박하면 정과(正果)를 얻지 못하며 도(道)를 이루고 신선이 될 복이 없으면 오직 층차와 경계(境界)를 낮춰 삼계 내의 신(神)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삼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육도윤회(六道輪回)에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이 세간을 보면 매 차례 전투 몹시 격렬하고 정과 사의 대결 역시 표현이 대단히 장관이라고 여긴다. 매 한 걸음 발전에는 모두 고층생명이 절대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가령 책에서는 매 한 차례의 진(陣)을 타파할 때마다 어떤 법기(法器)를 사용할 것인지 매 한 차례 진이 누구와 관련이 되는지 적혀 있는데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한데 모여야 한다.
봉신연의는 또 사람들에게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하나 남겨주는데 그것은 바로 주왕은 성격이 포악해서 어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이 결국 신으로 봉해질 수 있단 말인가?
이 단락의 역사가 ‘연의(演義)’로 불리는 이유는 장차 발생할 큰일을 위한 포석을 깔았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성존(聖尊)이 후세인들에게 선악을 똑똑히 가리게 하고 세인을 교화하도록 무왕이 하늘의 뜻에 따라 혼군 주왕을 토벌하고 강자아가 봉신하는 이런 극본을 썼을 것이다. 물론 한 차례 연극에서 좋은 사람을 연기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을 연기한 사람도 있다. 때문에 어느 연기가자 주왕(紂王)의 역할을 맡았다면 주왕의 잔인무도함을 실감나게 연기해야만 무왕의 현명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작용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연히 연기자로서 공(功)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이 한 점에서 말하자면 연극이 끝난 후 주왕 역할을 연기한 사람 역시 자연히 상응하는 보답을 받아야 한다. 후세 군왕들은 또 이 연극을 통해 교훈을 얻고 천의(天意)를 위배하고 간신을 총애하며 여색을 좋아해 백성들을 노역시키면 민심을 상실해 결국에는 반드시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도리를 얻을 수 있다. 군왕이 이를 경계로 삼으면 함부로 무고한 사람들 살해하지 않을 것이며 정(正)과 반(反) 두 방면에서 세인을 교화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극본에 대한 연기와 표현에 국한한 것이다.
만약 장래에 발생하는 일이 더 이상 연의가 아니라 실제로 발생하는 것으로 사악한 공산당이 진선인(眞善忍) 바른 신앙을 지닌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 주왕보다 훨씬 잔인하고 혹독한 고문을 가한 그런 자들과 천하에 충량(忠良)한 사람들을 잔혹하게 해친 자들, 백성들을 고난의 심연 속으로 밀어 넣는 그런 자들이 여전히 신으로 봉해질 수 있는 것일까? 하물며 바른 신앙을 지닌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그런 중공악당 사령(邪靈)은 그것이 제아무리 날뛸지언정 그것들이 신으로 봉해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신봉하는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바로 철두철미한 무신론(無神論)으로 암암리에 그것들의 장래 결말이 이미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즉 신과 철저하게 연을 끊는 것이다.
이것이 《봉신연의》에 드러나는 첫 번째 신의 가르침이니 바로 무신론자는 신과 아무런 인연이 없다는 것이다.
(2) 겁수(劫數)
《봉신연의》에서 삼교의 상선(上仙)인 노자(老子)와 원시천존 및 통천교주(通天教主)는 보다 높은 상계(上界)의 천의(天意)에 따라 봉신방을 체결하고 이를 통해 삼교 중의 여러 사람들의 근기와 행실을 보기로 했다. 아울러 근기와 덕행의 크기와 수련에서 치른 대가에 따라 삼계 내의 신으로 봉하기로 했다. 때문에 이것과 관련해 지상의 여러 나라들 역시 천상의 변화에 따라 일련의 변수들이 출현하는데 현대적인 말로 하자면 바로 세간 정세의 변동이다.
상계에서는 삼산오악(三山五嶽)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겁수를 정해놓았다. 주나라 왕조가 누릴 수 있는 연수를 구체적으로 배치하고, 난폭한 주왕 역시 그의 향방을 정했으며 또한 강자아가 일곱 번 죽고 3번 재앙을 당하는 일도 미리 정해져 있었다. 봉신이란 이 큰일은 삼계내외의 모든 생명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 무엇이 겁수(劫數)인가? 라고 물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겁수란 일정한 공간과 일정한 지역에서 모종의 발전법칙에 따라서 일정한 시기에 도달하면 상계 생명이 이 한 구역의 국가에 대해 필요한 수단을 사용해 타락을 청리(淸理)하고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것은 제거하는 것이다. 마치 병원의 의사가 필요한 의료기기를 사용해 환자의 각종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목적은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고 환자가 건강한 신체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겁수가 정해지면 상계에선 곧 이 구역의 국가와 크고 작은 생명들을 심사하며 생명의 선악(善惡)표현에 따라 그들이 이후에 갈 곳을 배치한다. 죄가 지극히 큰 자들은 무생지문(無生之門)에 들어가 영원히 다시 태어날 수 없으며 혹은 귀신이 되거나 혹은 사람이 되며 혹은 신(神)이 되는데 또 보다 높은 경계의 성자(聖者)가 되어 영원히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겁수를 배치하는 의도이며 생명의 진정한 내재가 선을 따르는지 아니면 악을 행하는지 심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본래 삼산오악의 사람들은 수련을 잘 했고 여러 신선들 역시 각자 천국에서 소요자재(逍遙自在)했는데 왜 반드시 봉신방이란 협약을 맺어 삼계 내의 크고 작은 생명들을 휘저어야 하는가? 상계(上界)의 생명은 자비로운데 어찌하여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른단 말인가?
한 가지 비유를 들자면 한 사람의 일생에서 신체의 세포는 끊임없이 신진대사를 하는데 이는 자연적으로 정해진 법칙이다. 신체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낡고 부적합한 생명상태의 세포를 대체하고 도태시키고 있다. 인류의 생명은 바로 이렇게 끊임없는 대사 속에서 지속되어 내려왔고 번성해온 것이다. 사람들은 신체의 신진대사가 자비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여긴 적은 없다.
보다 거대한 각도에서 보자면 지구는 호한(浩瀚)한 우주 중에서 마치 하나의 작디작은 세포나 마찬가지다. 수천 년 인류 역사 중에서 인류는 각종 천재인화(天災人禍) 온역(瘟疫) 전쟁 등을 거쳐 왔다. 되돌아 역사를 바라보면 전쟁은 극히 위험하고 예리한 무기로 무수한 사람들을 해쳤지만 세간의 상생상극의 법리는 전쟁이란 이런 예리한 무기를 통해 신에게 불경한 죄업(罪業)을 지은 사람들을 소멸시키고 사람이 지은 죄과를 없애게 한다.
그러므로 전쟁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민족 전체의 도덕을 승화시켜 선을 행하고 덕을 쌓는 것이다. 사람마다 하늘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개개인이 편안하게 도를 지키며 하늘을 공경하고 천명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온역과 전쟁 등 하늘이 내리는 겁수 역시 자연히 멀어질 것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지금 세상에서는 불가(佛家)의 고덕대법(高德大法)인 파룬궁(法輪功)이 널리 전해지면서 진선인(眞善忍)을 창도하다가 중공의 박해를 받고 있다. 하지만 파룬궁은 평화적이고 이성적이며 대선대인(大善大忍)한 흉금으로 100여개 나라와 지역에 널리 전해졌다. 파룬궁은 동방에서 유래했으며 신주(神州)가 개창된 이래 가장 정통적인 신앙의 정수들을 응집한 것이다. ‘진선인’의 전파는 인류도덕이 지속적으로 추락하는 것을 끊어 막았다. 단지 이 한 점에서만 보더라도 진선인 신앙은 사람들이 겁수를 벗어나도록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봉신연의》가 주는 두 번째 신의 가르침이다.
(3) 세 번째 가르침
1) 궁문을 닫고 강의를 중단하다
《봉신연의》에서는 봉신(封神)의 시기가 가까워지자 각문각파를 관장하는 사부들이 강의를 중단한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교(敎)를 장악한 그런 사부들이 반드시 도(道)를 말하는 것을 중단하고 각문각파 역시 반드시 문을 닫아걸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련하면서 일체는 모두 다 봉신이 지나간 후를 기다려야 하는가?
현대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바로 삼계(三界) 내부의 일부 불량한 현상들을 바로잡아야 하며 삼계 내에서 국부적으로 법을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봉신은 가장 중요한 큰 일이었기 때문에 각문각파 모두 이 일을 교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와 비교해보자. 만약 지금 과거의 봉신보다 훨씬 큰 일이 출현해서, 가령 성자(聖者)가 우주의 법을 바로 잡으려 한다면 그럼 천하의 여러 거대 종교들과 각문각파 역시 이로 인해 강의를 중단하고 우주정법(宇宙正法)이란 이런 큰일을 교란하지 말아야 한다. 책에서는 누가 교란하든지 장차 층차와 경계가 떨어지는 동시에 반드시 여러 정신(正神)들의 토벌을 받아 다년간의 고심한 수행이 무효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 역시 그 수도인들이 사부의 명을 따르지 않고 질투심과 무명(無明)의 불꽃을 움직여 멋대로 행동하면서 주왕의 폭정을 도운 궁극적인 악과이다.
2) 육신으로 성인이 되다
《봉신연의》에서 이정(李靖), 양전(楊戩), 뇌전자(雷震子) 등 일곱 사람은 육신을 지니고 성인(聖人)이 된다. 하지만 그들의 경력을 보면 그들이 성인이 된 길은 마치 사람들의 전통적인 수련개념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일곱 사람은 주나라가 흥성하고 주왕을 벌하는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이들은 주나라를 일으키기 위한 각종 정치활동에 참여해 다양한 계책을 내놓았고 또 천하에 무도한 혼군이었던 주왕을 토벌하는 각종 전쟁에 실제로 참여했다. 이들이 성인이 된 특별한 방식은 낡은 수련의 개념을 타파한 것이다. 기존에 수련을 언급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누가 사찰에 들어가 출가하고 속세를 멀리 떠나는 것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이정 등 일곱 사람이 육신을 지니고 성인이 된 것에서 보자면 수련에는 본래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며 기어코 산속이나 사찰 속에 제한된 것만이 아니다. 오직 수련하는 사람이 바르게 걷기만 한다면 설사 그의 몸이 속세에 있고 정치에 참여할지라도 여전히 정과(正果)로 수련성취 할 수 있다. 이 점은 현대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아주 큰 계시를 준다.
이정은 주왕이 잔인무도해서 포락(炮烙)을 만들고 채분(蠆盆)을 만들어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해치는 것을 알았다. 이에 연등도인(燃燈道人)의 권고를 받아들여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혼군을 제거할 기회를 기다렸다. 만약 당시였다면 주왕은 “이정 너는 원래 총병(總兵)으로 조정에서 봉록을 받았는데 어찌 감히 나를 토벌하려 하는 것이냐? 정신이 나간 것이냐?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은 십악불사(十惡不赦)한 것으로 국가전복죄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할지 모른다.
아마 이런 주장은 지금 우리가 들어도 아주 황당하고 가소로울 것이다. 무도한 혼군을 토벌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민족의 대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통치자의 잔인한 폭정에 직면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생명과 생존의 자유를 지킬 권리가 있으며 사람마다 모두 포학을 ‘전복’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중공 통치하에서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만약 어떤 사람이 좋은 의도로 나와서 “공산사당은 지금까지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고 여러 차례 운동에서 팔천만 동포를 살해했으며 온갖 죄악의 기록이 흘러넘칠 정도로 이렇게 많은 불의한 짓을 저질렀으니 반드시 자멸할 것입니다. 하늘이 중공을 멸하려 하니 빨리 악당을 탈퇴해서 생명을 보존하세요.”라고 하는데 이런 말을 듣고도 그가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면 그럼 앞서 주왕이 한 말과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75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