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섬(纖纖)
【정견망】
명대(明代)의 대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왕수인(王守仁 왕양명)의 시 《범해(泛海)》는 당나라 시처럼 이해가 쉽진 않지만 담겨진 의미가 자못 깊다. 이에 그의 시를 가져다 독자들과 교류해보고자 한다. 전체는 28자에 불과하다.
험하고 평탄함 따위 원래 가슴에 담아두지 않거늘
뜬 구름이 하늘을 지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고요한 밤 파도 소리는 3만 리에 이르고
밝은 달에 운유(雲遊)하는데 하늘 바람 내려오누나!
險夷原不滯胸中
何異浮雲過太空
夜靜海濤三萬里
月明飛錫下天風
“험하고 평탄함 따위 원래 가슴에 담아두지 않거늘
뜬 구름이 하늘을 지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여기서 ‘험이(險夷)’란 험하고 평탄함을 가리킨다. 이 구절의 대체적인 뜻은 험하거나 평탄한 처지 모두 가슴에 담아두지 않으니 마치 뜬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사실 여기서 ‘흉중(胸中)’이란 마음속에 지닌 뜻을 말한다. 이 당시 시인은 정의감에서 직언(直言)으로 간언하다 환관의 박해를 받아 거의 죽을 뻔 했지만 가까스로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 아직 놀란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바로 이 시기에 시인이 느낀 소감을 펼쳐 이 시를 쓴 것이다.
“고요한 밤 파도 소리는 3만 리에 이르고
밝은 달에 운유하는데 하늘 바람 내려오누나!”
시인은 이 때 마침 바다 위에 있었는데 거대한 풍랑(風浪)을 만났다. 끝이 보이지 않은 아득히 큰 바다 위에 떠서, 또 하늘에는 밝은 달이 떠 있으니 고향이나 가족을 생각하기 쉽다. ‘비석(飛錫)’이란 승려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를 말하는데 여기선 운유(雲遊)나 행각이란 뜻이다. 운유를 하다 보면 자연히 가족 정을 내려놓아야 하니 밝은 달이 떠도 가족 정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생겨나게 않는다.
‘하늘 바람이 내려옴(下天風)’을 어떤 사람은 정기(正氣)로 해석하는데 이렇게 해석해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때 시인이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만난 상태이기 때문에 이때의 큰 바람과 파도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시인은 사실 출가만 하지 않았을 뿐 재가(在家) 수련자였다. 이때 시인이 겪은 것은 한마디로 운유할 때 마난(魔難)을 만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 바람’은 하늘이 내린 고험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낭송이 쉽지 않아 널리 전해지진 않았지만 내함(內涵)이 아주 깊어 일부 인사들에게 특별한 호평을 받았다. 시인은 막 환관에게 살해당할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또 다시 바다 위에서 큰 풍랑을 만났다. 사람의 말로 하자면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것들을 자신에 대한 하늘의 고험으로 여겼으니 자연히 같지 않았다. 어떤 문제나 번거로움에 봉착했을 때 낙담하면서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 않으며 담담히 마주 대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가장 좋은 상태이자 수련인으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보면 또 다른 하늘과 또 다른 천지가 광활하게 펼쳐질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7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