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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것이 연자루만은 아냐—소동파의 《영우락 명월여상》

청풍(清風)

【정견망】

《영우락(永遇樂)–서리 같은 밝은 달(明月如霜)》

—서주(徐州)에서 꿈을 꾸다 깨어나 북쪽 연자루에 올라 짓다

서리 같은 밝은 달, 물처럼 시원한 바람
해맑은 풍경이 끝없이 펼쳐지누나.
굽이진 항구엔 물고기 펄쩍대고,
둥근 연잎엔 이슬이 쏟아지는데
적막하여 보이는 사람 하나 없어라.
둥둥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
바스락바스락 낙엽 소리,
미인 만나던 꿈 깨어 울적하구나.
망망한 한밤중에 다시 찾으려 해도 찾을 곳 없으니,
일어나 작은 뜰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네.

하늘가에서 지친 나그네, 산 속 돌아가는 길,
고향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이 마음.
텅 빈 연자루(燕子樓)에, 가인은 어디로 가고
공연히 제비만 갇혀 있는가?
예나 지금이나 꿈만 같은 세상사
일찍이 누가 꿈에서 깨어난 적 있는가?
묵은 기쁨과 새로운 원망만 남누나.
언젠가 후인들이 황루의 야경을 마주하고
나를 위해 길게 탄식하리라.

​明月如霜,好風如水,清景無限。
曲港跳魚,圓荷瀉露,寂寞無人見。
紞如三鼓,鏗然一葉,黯黯夢雲驚斷。
夜茫茫,重尋無處,覺來小園行遍。

天涯倦客,山中歸路,望斷故園心眼。
燕子樓空,佳人何在,空鎖樓中燕。
古今如夢,何曾夢覺,但有舊歡新怨。
異時對,黃樓夜景,為餘浩嘆。

역대로 소동파의 이 사(詞)에 대한 해석은 그가 연자루(燕子樓)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꾼 후 깨어난 소감을 적은 것으로 본다.

상편에서는 도치법으로 꿈속에 정원을 노닌 것을 서술하면서 연자루란 작은 정원의 맑고 그윽한 정서를 표현했다.

하편에서는 꿈에서 느낀 소감으로 연자루에 올라 먼 곳을 조망한 감회를 직접 서술했다고 본다. 이런 해석은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로는 틀린데, 맞는 것은 소동파가 확실히 꿈에 반반(盼盼 당대의 유명한 기녀)을 보았다는 것이고 틀린 것은 이 꿈은 속인 층차에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꿈이 아니라 동파의 원신(元神)이 다른 공간에 가서 반반을 본 것으로 이쪽 신체는 잠자고 있었을 뿐이다.

이 사(詞)의 주제는 사실 수련과 반본귀진(返本歸真)에 대한 깨달음이며 연자루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즉, 연자루를 소재로 시인이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뜻을 이끌어낸 것이다.

“서리 같은 밝은 달, 물처럼 시원한 바람
해맑은 풍경이 끝없이 펼쳐지누나.
굽이진 항구엔 물고기 펄쩍대고,
둥근 연잎엔 이슬이 쏟아지는데
적막하여 보이는 사람 하나 없어라.”

여기서는 전체적으로 가을밤의 맑은 정경을 표현한 것으로 필법이 아름답고 직설적이면서 또 섬세하면서도 탁월하다. 이 부분은 굳이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데 여기서 시인이 주로 말하고자 한 것은 원신이 육체를 떠난 후의 느낌이다. 사실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만 속인이 소홀히 여기는 것들을 볼 수 있고, 동시에 신체의 감각도 훨씬 강해진다.

“바스락바스락 낙엽 소리”가 문제를 잘 설명해주는데 오직 원신이 신체를 떠난 상황 하에서만 이렇게 영민하게 감각할 수 있다. 꿈을 꾼 시간은 전체적으로 길지 않은데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와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를 따라 그의 원신이 다시 육신으로 되돌아왔다.

“망망한 한밤중에 다시 찾으려 해도 찾을 곳 없으니,
일어나 작은 뜰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네.”

이곳에서 시인은 마치 조식(曹植)이 《낙신부(洛神賦)》에서 낙수(洛水)의 신을 만난 후와 마찬가지로 아주 처연하다.

또 하편에서 “하늘가에서 지친 나그네, 산 속 돌아가는 길, 고향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이 마음.”에서 고향[故園]이야말로 전체 사의 핵심어에 해당한다.

전체적으로 이 사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데 여기서 가리키는 고향은 사람 생명의 진정한 집 즉 진정으로 우리 생명이 태어난 우주 깊은 곳으로 우리 이 공간의 고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가에서 지친 나그네”는 인생에 대한 대단히 깊은 감회인바 바로 사람이 사람 층차에 가라앉아 각종 집착과 욕망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피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고금(古今)을 가리지 않고 지역을 나누지 않으며 사회계층도 따지지 않으며 모두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전반 인류사회가 모두 이 한 층차 속에 있기 때문이다.

“텅 빈 연자루(燕子樓)에, 가인은 어디로 가고 공연히 제비만 갇혀 있는가?”

여기서 연자루가 누가 언제 지은 것인지는 이미 상세히 고찰할 방법은 없다. 당대(唐代) 정원(貞元) 연간에 장상서(張尚書 역주: 장 씨 성의 상서)가 서주절도사로 있을 때 일찍이 연자루를 지어 자신이 총애하던 기생 반반(盼盼)에게 주었다고 한다. 반반은 가무에 뛰어나고 자태가 우아해 장상서의 총애를 받았다. 장상서가 사망한 후에도 10년 이상 연자루에 머물며 개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겉으로 보면 시인이 가인(佳人 반반)에 대한 감상을 표현했지만 사실 이를 통해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설명한 것이다. 즉 당신이 속인 중에서 무엇을 지녔든, 명예라도 좋고 이익이라고 좋고 정(情)이라도 좋은데 백년 후에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여전히 윤회해야 하는데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텅 빈 것은 연자루만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꿈만 같은 세상사
일찍이 누가 꿈에서 깨어난 적 있는가?
묵은 기쁨과 새로운 원망만 남누나.”

법(法)에서 알다시피 속인의 일생은 마치 꿈과 같아서 진정한 자신이 작용할 때는 아주 드물고 기본적으로 각종 관념과 욕망에 통제 당한다. 아울러 다른 공간에서 사람의 일생을 보면 또 아주 짧은 것이다. 소동파는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이 한 점을 깨달았거나 또는 보았던 것이다.

사실 그가 《염노교 적벽회고》에서 “인생이 꿈과 같으니 강 속에 비친 달을 향해 술 한 잔을 쏟아붓네.(人生如夢,一尊還酹江月)”라고 노래한 것과 같은 뜻을 표현한 것이다.

“언젠가 후인들이 황루의 야경을 마주하고 나를 위해 길게 탄식하리라.”

이 부분은 왕희지가 《난정집서》에서 말한 “후세에 지금을 본다면 마치 지금 옛날을 보는 것과 같으리라”와 같은 뜻이다. 단지 말하는 방식이 다를 뿐인데 앞 구절과 연결해서 보면 의경(意境)이 투명하고 드넓으며 여운이 길다. 좀 감상적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속인 층차의 단순한 감탄이 아니며 속인의 명리정(名利情)이란 올가미를 뛰어넘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심오한 내용을 아주 쉽게 표현했다.

소동파의 이 사(詞)는 맑고 아름다우면서도 완곡하다. 즉 연자루를 이용해 반본귀진(返本歸真)이란 주제를 이끌어낸 것도 참신하고 글의 흐름도 자연스러우며,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이끌어내니 대가의 필치에 전혀 손색이 없다.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279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