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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깊이 묻어둔 진정한 소원

원형(源馨)

【정견망】

한 수의 좋은 시는 종종 사람들에게 한 층 화면이나 시공(時空)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여러 층을 보여주는데 그 의미가 심원하기 때문에 심경(心境)에 따라 읽는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백의 시 《광릉 가는 맹호연을 보내며(送孟浩然之廣陵)》도 그중의 하나다.

먼저 전문을 감상해 보자.

“오랜 친구 서편의 황학루를 떠나,
아지랑이 속에 꽃 피는 3월 양주로 내려가네.
외로운 배 돛 그림자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
오직 하늘 끝까지 흘러가는 양자강만 보이는구나.

故人西辭黃鶴樓
煙花三月下揚州
孤帆遠影碧空盡
惟見長江天際流.”

“오랜 친구 서편의 황학루(黃鶴樓)를 떠나”[故人西辭黃鶴樓]에서 시인은 오랜 친구(맹호연)와 황학루에서 작별하는데 이 누각은 또 천고에 널리 전해진 신화의 무대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것이다. 세상이란 늘 헤어지기 마련인데 생명이 이곳에 모인 것에 제거하기 어려운 명리정 외에 또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지랑이 속에 꽃 피는 3월 양주로 내려가네.”[煙花三月下揚州]에서 음력 3월은 꽃들이 만발한 시기인데 이렇게 멋진 풍경조차 사람을 떠나지 못하도록 막진 못한다. 시인은 이곳에서 아지랑이 속에 꽃 피는 3월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연화(煙花)”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즉 아지랑(또는 안개) 속에 핀 꽃을 통해 속인의 눈으로는 투철히 볼 수 없는 미혹의 요소가 있음을 뜻한다.

“외로운 배 돛 그림자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孤帆遠影碧空盡]”라는 이 구절에서는 장면이 바뀌면서 밝고 활달해지는데 마치 떠나는 벗의 마음을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일반인과는 달리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투철함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이백의 오랜 벗 맹호연(孟浩然)은 왜 이렇게 남다를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그는 가장 경건한 소원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 석성사(石城寺) 미륵불 앞에서 예를 올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서원(誓願)을 말한 적이 있다.

“다음 생에 미륵불을 뵙고 한마음으로 귀의하고자 하오며,
(下生彌勒見,回向一心歸……)

원컨대 공덕의 물을 받들어 지금부터 속세의 때를 깨끗이 씻고자 합니다.
(願承功德水,從此濯塵機)”

만약 윗 구절에 나오는 “사라지고(盡)”가 “속세의 때를 깨끗이 씻은[濯塵機]” 표현이라면, 눈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사라져, 마음 역시 무명(無明) 고통에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그럼 자연히 현묘(玄妙)를 꿰뚫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오직 하늘 끝까지 흘러가는 장강만 보이는구나.”[唯見長江天際流]” 사실, 여러분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중국 고대의 유명한 시인들은 모두 부처나 도(道)를 믿었다. 이는 중국 전통 문인(文人)의 주류(主流)이자 중화 신전문화(神傳文化)를 지켜온 굳건한 기둥이었다. 마치 저 도도한 장강의 물이 생명의 본원 및 상계(上界)의 연계를 이어받은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이런 신전문화가 기술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윤회 전생하면서 대대로 이어온 인연으로 최후에 당신이 세상에 내려왔을 때 마음속 깊이 묻어둔 진짜 소원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5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