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하(淸河)
【정견망】
거지라고 하면 대다수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더럽고 가난하며 질병 등 부정적인 단어를 떠올린다. 설령 이것이 거지의 실제 생활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남에게 얻어먹고 들판에서 잠을 자며 인간 세상의 온갖 고초를 맛보고 세태의 차가움을 겪는다. 그러나 이토록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적인 인물들이 적지 않게 배출되었다.
거지의 시조
“360가지 업종에 시조가 없는 곳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 거지의 시조를 논하자면 수많은 전설적인 이야기를 간직한 오자서(伍子胥)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순리에 어긋나는 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 명사(名士)는 초나라 대부 오사(伍奢)의 아들었이다. 초평왕이 음란하고 무도해 그의 부친과 형을 죽이자, 오자서는 추격을 피해 도망 길에 올랐다. 그는 길을 가며 음식을 빌어먹었고, 천신만고 끝에 구사일생으로 마침내 오나라에 도착했다. 이후 그는 오왕 합려를 보좌해 초나라를 격파하고, 원수인 초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에 채찍질을 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오자서의 생애를 기록하기 위해 특별히 한 장을 할애했으며, 그가 구걸했던 경험도 기재했다. “오자서가 오나라에 이르기 전 병이 들어 길 중간에 멈춰 음식을 빌어먹었다.”(《사기》) 오자서는 관군에게 쫓기는 도망 길에 불행히 병까지 얻어 길을 따라 구걸해야 했으니, 참으로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오자서가 고소성을 쌓을 때 찹쌀로 벽돌을 만들어 성벽 아래에 묻었다고 한다. 그는 부하들에게 나라에 기근이 들면 성벽을 파헤치라고 일렀는데, 그러면 백성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자서가 억울하게 죽은 후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켰고 성안에 기근이 들었다. 사람들이 오자서의 말을 기억해 내어 성벽을 파헤치고 찹쌀 벽돌을 삶아 먹음으로써 흉년을 넘길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오자서가 소주(蘇州)에서 구걸할 때 현지 백성에게 입은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전한다. 그리하여 소주 일대의 거지들은 오자서를 시조로 받들게 되었다.
거지 황제
오자서 같은 명사에게 거지 신분은 인생의 짧고 고통스러운 한 조각 경험일 뿐이었다. 하지만 중국 역사상 거지 황제의 전설적인 경험은 아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일무이할 것이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가난한 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17세 때 고향에 큰 기근과 전염병이 돌아 부모와 형제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는데, 주원장은 너무 가난해 가족을 장사 지낼 돈조차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황각사(皇覺寺)로 출가해 승려가 되었는데, 말이 승려지 실제로는 승려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어린 행자였다. 하지만 재난이 닥친 해라 절의 식량도 부족해지자, 주원장은 스님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음식을 빌어먹으러 행각에 나서게 되었다.
이 경험은 《명사》의 서두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정(至正) 4년, 가뭄과 메뚜기 떼가 창궐하고 큰 기근과 전염병이 돌았다. 태조의 나이 17세 때 부모와 형이 잇따라 죽었으나 가난하여 장사를 지낼 수 없었다. 이웃 사람 유계조(劉繼祖)가 땅을 주어 비로소 장사를 지낼 수 있었으니 곧 봉양릉이다. 태조는 의지할 곳이 없어 황각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한 달이 지나 합비로 돌아다니며 음식을 빌어먹었다. 길에서 병이 들었는데 보라색 옷을 입은 두 사람이 함께하며 지극히 간호했다. 병이 낫자 그들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무릇 광주(光州), 고주(固州), 여주(汝州), 영주(潁州) 등 여러 주를 3년 동안 두루 다니다가 다시 절로 돌아왔다.”
3년 동안 그의 발길은 안휘(安徽)와 하남(河南) 각지에 닿았다. 주원장은 노숙하며 구걸했고 온갖 냉대와 모욕을 당했으니 그 고생이 상당히 컸다. 구걸하던 도중 마침 곽자흥(郭子興)이 봉기하자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주원장의 능력이 매우 출중했기에 곧 곽자흥의 눈에 띄었고, 두 달도 안 되어 수부(帥府)로 발탁되면서 이때부터 소설 같은 전설적인 인생이 시작되었다.
구걸하며 사람을 제도한 신선
거지 명사와 거지 황제가 있다면, 거지 신선도 있을까? 당연히 있다. 많은 이야기 속에는 신선이 사람을 제도할 때 인심을 시험하기 위해 흔히 거지의 모습으로 변해 제도받을 사람 곁에 나타나 그의 선량한 마음과 깨달음을 살피는 대목이 나온다. 팔선(八仙) 중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철괴리(鐵拐李)의 육신도 바로 거지의 시신이었다.
《신선전》에도 이러한 신선 거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름은 이아(李阿)로, 촉지(蜀地) 사람들은 그가 아주 오래 살았으며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그를 보았지만 용모가 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는 성도(成都) 시내에서 구걸하여 얻은 물건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수년 동안 반복했다.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어떤 이가 미래의 일을 물으면 이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는 늘 각기 다른 기색이 나타났다.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의 표정 변화를 통해 미래의 길흉을 예측했는데 매우 영험했다.
그중 고강(古強)이라는 사람이 이아가 범인이 아님을 알고 늘 곁에서 모시며 제도받기를 원했다. 한번은 고강이 이아를 따라 청성산(靑城山)으로 들어갔는데, 길에서 호랑이나 이리를 만날까 봐 칼을 차고 스스로를 보호하려 했다. 이아가 꾸짖기를 “나와 동행하면서 무엇 때문에 호랑이를 두려워하는가?”라고 하며, 고강의 칼을 잡아 돌 위에 내리치니 칼이 부러져 버렸다. 고강이 그 칼을 무척 아까워하자, 다음 날 이아가 공능(功能)을 써서 칼을 새것처럼 회복시켜 주었다.
또 한 번은 고강이 이아를 따라 성도로 가는데, 길에서 질주하던 마차가 이아를 덮쳤다. 이아의 발이 부러지고 죽은 것을 보고 고강은 질겁했다. 그러나 잠시 후 이아는 다시 살아났고 발도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고강이 18세였을 때 이아는 50세 정도로 보였는데, 고강이 80여 세가 되었을 때도 이아는 여전히 50세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계산해 보면 이아는 아마도 구걸한 시간이 가장 긴 거지일 것이다.
성개(聖丐 거지 성자) 무훈
거지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필자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바로 천고의 거지 성인(丐聖) 무훈(武訓)이다. 불행한 모든 사람처럼 무훈은 산동 당읍현(관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함께 구걸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무훈은 훗날의 이름이고 집안에서 일곱째라 무칠(武七)이라 불렸으며, 간질이 있어 자주 땅에 쓰러져 입에 거품을 물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무두말(武豆沫)이라 불렀다. 무훈은 어릴 적부터 매우 효성스러워 구걸해 온 음식 중 맛있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어머니께 드렸다. 그는 가난했지만 글공부를 동경했다. 한번은 서당 앞을 지나다가 들어가서 들으려 했으나, 옷차림이 남루하다는 이유로 훈장에게 쫓겨났다.
15세 때 무훈은 관도현館陶縣 설점薛店薛店의 먼 친척인 장변정(張變征)의 집에서 머슴 살이를 시작했는데, 가장 힘들고 고된 일을 하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불평 없이 일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이 친척은 그에게 품삯을 한 푼도 주지 않았고, 가짜 장부를 만들어 무훈을 속였다. 이 시련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어 무훈은 사당에서 3일 밤낮을 혼수상태로 잤으며, 깨어난 후 다시 3일을 미친 듯이 달렸다. 이때부터 그는 가난한 사람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의학(義學, 무료 학교)을 세우겠다는 큰 뜻을 세웠다.
그 후 그는 구걸하며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입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가 중얼거린 내용은 “머슴 살며 남에게 속느니 구걸하며 내 마음대로 하는 게 낫네. 내가 구걸한다고 얕보지 마오, 머지않아 의학원을 세울 테니.”, “똥을 치우고 김을 매고 돌을 굴려도 좋소, 밤낮 가리지 않고 돈이 많든 적든 상관없소.” 등이었다. 문맹인 사람이 갑자기 이런 구절을 읊으며 학교를 세우겠다고 하니, 일반 사람들은 분명 그가 정신적 충격을 받아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훈은 산동, 하북, 하남, 강소 등지를 두루 다니며 구걸했다. 그의 입에서는 영원히 ‘의학’이라는 두 글자가 떠나지 않았고, 사람들이 그가 ‘의학병’에 걸렸다고 비웃으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의학병은 화낼 일 없네, 사람 보면 예의를 갖추고, 돈을 주면 목숨을 이어 의학을 세워 만 년 동안 흔들림 없게 하리라.”
뜻을 세우기는 어렵지 않으나 오랫동안 견지하기는 어려운 법인데, 무훈의 소중함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구걸로 돈을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가장 힘들고 고된 일을 찾아 했으며 때로는 구경거리 공연을 하기도 했다. 송곳으로 몸을 찌르거나 칼로 머리를 치고 무거운 솥을 짊어지는가 하면, 심지어 독사와 전갈, 기와 조각을 삼키기도 했다. 어떤 건달들은 그에게 똥오줌을 먹으라고 했는데 그는 그대로 따랐다. 이런 고통을 참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훈이 존엄을 포기한 방식이 결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아내도 얻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으며, 의학을 세워야 비로소 무사(無私)하리라”라고 말했다.
무훈의 무사함은 학교를 세우기 위해 고생하는 데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의 선함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선(眞善)이었다. 고향에 생활이 어려운 고부(姑婦)가 있자 무훈은 그들에게 땅 10마지기를 주며 말했다. “이 사람 착하네, 이 사람 착하네, 10마지기 주어도 오히려 적다네. 이 사람 효성 지극하네, 이 사람 효성 지극하네, 10마지기 주어 노후를 편안케 하리라.”
38세 되던 해 산동에 큰 가뭄이 들어 많은 이가 굶어 죽자, 무훈은 구걸해 모은 돈으로 수수 40가마를 사서 기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무훈의 이러한 행위는 앞서 언급한 신선 거지 이아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무훈과 같은 인내력과 고생을 견디는 능력은 일반적인 수도인조차 미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전혀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고 온종일 중얼거리며 즐거워했으니, 진정으로 고생을 낙으로 삼는(以苦爲樂)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루하루 견지해 나가자 무훈의 ‘의학 미친병’은 사람들에게 점차 수용되고 이해되었으며 감동과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1888년, 무훈은 양서원, 누숭산과 함께 첫 번째 의학인 ‘숭현의숙(崇賢義塾)’을 창립했다. 이듬해에는 요증(了證) 화상과 함께 두 번째 의숙을 세웠으며, 1896년에는 시선정과 함께 세 번째인 어사항 의숙을 창립했다. 세 곳의 의학 부지는 300마지기에 달했으며 학교 창립을 위해 무훈은 총 1만 냥이 넘는 돈을 썼다.
무훈은 평생 구걸하여 학교를 세우면서 자신은 단 하루도 좋은 날을 보내지 못하다가 59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출상하던 날, 당읍, 관도, 임청 세 현의 관리와 신사, 학생, 백성들이 모두 나와 배웅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울음소리가 하늘을 찔렀으며, 온 마을 사람이 다 나왔다는 표현으로도 당시의 정황을 묘사하기에 부족할 정도였다.
무훈이 죽은 후 청 조정에서 그를 위해 전(傳)을 만들었고, 민국 정부는 그를 교과서에 실어 집집마다 아는 인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오직 중공만이 무훈을 크게 비판했다. 그 독한 입을 벌려 무훈을 ‘천고의 거지’에서 ‘유괴범, 고리대금업자, 대지주’로 둔갑시켰고 ‘노동 인민의 배신자’로 몰았다. 심지어 문화대혁명 기간 중공은 무훈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끌어내어 조리돌림을 했으며 유골을 가루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훗날 많은 중국인은 이 천고의 성인 거지의 생애를 전혀 알지 못하며, 어떤 이는 무훈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으니 참으로 슬프고 탄식할 일이다.
맺음말
중국인들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인간 중에서 가장 처량하고 하등하며 멸시받는 거지 집단 속에 명사가 숨어 있었고, 황제가 나왔으며, 세상 사람을 제도하는 신선과 사람들에게 무사하게 선을 행하도록 가르치는 성인이 있었다. 우리 사회에도 실제로는 좋은 옥임에 우리가 쓸모없는 돌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이나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