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夏禱)
【정견망】
잊힌 전설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난 300년 동안 인류가 지구상에서 탈바꿈해 온 이야기다. 역사의 무대가 대양과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 만큼, 이 거대한 역사의 큰 연극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시간의 축을 길게 늘여야 한다. 그래야만 인류 근대 문명사라는 연극 뒤에 숨겨진, 모든 이를 경악게 할 수수께끼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앞선 장들에서 묘사한 유럽의 ‘중국 열풍’은 19세기 이전 아시아가 유럽에 끼친 영향이 과소평가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만약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 역사가 마치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낯설게 느껴진다면, 우리가 지난 300년 동안 겪은 탈바꿈은 분명히 심오하면서도 기이한 것이었으리라.
18세기 초, 유럽의 석학 라이프니츠는 강희제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중국인들이 서구 사회로 이민 가기 위해 애쓰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그야말로 아라비안 나이트 같은 일이다. 우리가 폴로 셔츠나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는 것처럼, 18세기 유럽 귀족들은 중국산 실크 로브를 입는 것을 유행으로 여겼다. 중국에서 온 고가의 자기와 실크 의복이 대량으로 복제되어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품목이 되었다. 유럽 패션의 중심지 파리에는 중국 기술을 이식한 자기 공장과 실크 공장이 등장했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영향은 유럽의 사상, 제도, 농업, 패션, 생활 등 모든 영역에 깊숙이 침투했다. ‘시누아즈리(Chinoiserie, 중국풍)’에 담긴 오리엔탈리즘 요소를 걷어내더라도, 유럽은 1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중국에 혼을 빼앗겼다. 10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전설 같은 유럽의 ‘백 년 중국 열풍’ 이후, 어떤 천지개벽할 변화가 있었기에 우리는 그 역사를 망각하고 심지어 이런 기문을 처음 들었을 때 그토록 놀라게 되는 것일까?
이어지는 지면에서 우리는 이 300년간의 거대한 변화상을 대략적으로 그려낼 것이다. 지면 관계상 역사의 궤도를 바꾼 몇 가지 핵심 사건에 집중하고자 한다.
추락하는 태양
노년에 접어든 태양왕 루이 14세는 다중적인 좌절과 고통을 겪었다. 정치·외교적으로는 길게 이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의 해군과 육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비록 최종적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이후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의 해외 영토 일부를 포기하게 되면서 루이 14세의 위상은 크게 추락했다.
1685년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위그노 교도들을 추방한 사건은 오랫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많은 학자는 태양왕의 여러 논란 섞인 결정들이 당시로서는 유일한 선택이었다는 점에 동의한다. 루이 14세 본인도 자신이 무엇을 하든 비난받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가톨릭 왕국을 수호하는 것이 태양왕이 스스로 짊어진 사명 중 하나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으로 인한 손실이 가중되던 1709년, 강추위로 곡물 수확이 급감하고 기아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다. 이는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사회를 붕괴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개인적인 삶에서도 루이 14세는 연이은 타격을 입었다. 노년에 왕비를 여의고 왕세자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성홍열이 번지며 왕세손인 부르고뉴 공작과 손주며느리, 증손자까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왕위 계승권은 두 세대를 건너뛰어 겨우 다섯 살 된 증손자 루이(훗날의 루이 15세)에게 넘어갔다. 곧 확인하게 되겠지만, 이러한 계승권 위기는 향후 프랑스의 성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1715년 9월 1일, 베르사유 궁전 앞 광장에는 신하와 백성들이 루이 14세의 마지막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마를리 사냥에서 돌아온 후 국왕은 20여 일간 병석에 누워 있었다. 프랑스 전체가 국왕의 근면함을 알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매주 하루뿐인 휴일이나 병중에도 회의를 소집해 대신들의 보고를 들었다. 백성들은 태양왕을 떠나보내기 아쉬워했다. 아마도 그들은 72년이라는 세월 동안—즉 그들의 생애 전체보다 긴 시간 동안—프랑스를 다스려온 이 군주가 영생불사할 것이라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새벽, 루이 14세는 세상을 떠났다. 창밖 광장에서는 “국왕께서 서거하셨다! 국왕 폐하 만세!”라는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혹자는 루이 14세 사후에 사람들이 전쟁과 중세(重稅)가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며 환호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태양왕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황제로 추앙받으며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루이 14세의 죽음은 세계사의 중요한 분기점이다. 태양왕이 사라진 베르사유 궁전은 빛을 잃었고, 프랑스 역사의 ‘위대한 세기’도 막을 내렸다. 태양왕의 후계자들은 전혀 다른 시대와 뒤이어 닥칠 광풍에 직면하게 되었다. 루이 14세의 서거와 함께 유럽의 문화 및 정치 판도는 급격히 변화했으며, 인류 역사는 또 다른 단계로 진입했다.
만청(滿淸)의 황위 계승자
“중국 제국의 법률이 각국의 법률이 된다면, 중국은 세계가 지향해야 할 매혹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북경으로 가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하늘의 진정으로 완벽한 형상인 그를 알현하라.”
—— 피에르 프와브르(Pierre Poivre, 1719~1786), 『철학자의 여행기』
여기서 언급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조아생 부베가 파리에서 출간한 『강희제전』을 통해 하룻밤 사이에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 강희제를 의미한다. 어선 위에서 예수회 선교사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을 듣고, 황하 변에서 수위를 측정하던 다재다능한 중국 황제를 기억하는가? 이제 장면을 다시 청나라 제국의 수도이자, 중국 열풍이 외부로 뻗어 나갔던 기점인 북경으로 돌려보자.
청조(淸朝)를 건국한 여진족은 제국 동북부에서 발흥한 유목 민족으로, 그들의 혈관에는 사냥꾼과 기수, 궁수의 기질이 흐르고 있었다. 강희제가 준마 위에서 뽐내던 위용과 평생 포획한 맹수와 기이한 짐승들에 대해 부베는 이미 유럽인들에게 소개한 바 있다. 사냥과 기마에 능했던 여진족의 성격은 열정적이고 직설적이었으며, 이는 황제부터 황자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그러했다.
강희제 55세 되던 해, 세외(塞外) 순시를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오던 중 그는 행궁 앞으로 사람들을 소집해 황태자를 무릎 꿇렸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현장에 있던 모든 이가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강희제는 눈물을 흘리며 태자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한 뒤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며 일어나지 못했고, 태자를 구금하라고 명령했다. 황자들이 달려 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다. (『대청성조실록(大清聖祖實錄)』)
이후 태자를 두 번 폐하고 두 번 세우는 우여곡절 끝에, 강희제는 사람들이 아무리 간청해도 다시는 황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청나라 제국의 대권 계승 문제는 모든 이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만년의 강희제는 뼈만 남을 정도로 야위어, 유럽에 널리 알려졌던 전성기의 풍채 좋은 초상화 속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강희제의 서거
1722년, 강희제는 남원(南苑)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가벼운 풍한(風寒 감기)에 걸려 북경으로 돌아와 창춘원(暢春園) 청계서옥(清溪書屋)에서 정양했다. 강희제의 갑작스러운 서거에 대해 당시 창춘원 근처에 머물던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파(Matteo Ripa, 중국 이름 馬國賢)와 동시대 인물 유석(劉奭)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갑자기 창춘원 내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낮고 혼란스러워 평소와는 달랐습니다. 나라 정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는 즉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동료에게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황제가 서거했거나, 북경에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반란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거처의 담장에 올라가 보니 담 아래로 구불구불한 대로가 보였습니다. 나는 수많은 기병이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사방으로 광분하며 달려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참을 관찰한 끝에 길을 걷던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희 황제가 붕어하셨다.’”
“이튿날, 나는… 원래 궁에 들어가 강희(康熙)황제의 서거에 애도를 표하려 했으나, 끝내 허락을 받지 못했다.” —— 마테오 리파 신부, 『경정십유삼년기(京廷十有三年記)』
“황제께서 서거하신 후, 내시들이 어가(禦駕)를 들고 대궐로 들어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륭커둬(隆科多)가 먼저 넷째 황자 옹친왕(雍親王)을 호위해 조정으로 돌아와 통곡하며 영접했고, 궁궐 문을 지켰다. 여러 왕은 어명을 받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유석, 『영헌록(永憲錄)』
강희제 붕어 후 6일 동안 북경의 9개 성문은 굳게 닫혔다. 당시 구문제독(九門提督) 륭커둬는 보병통령(步兵統領)을 겸임하며 북경에 계엄령을 내렸고, 황자(皇子)와 황친(皇親)일지라도 어명이 없으면 출입할 수 없었다. 국상이 치러지는 와중에 강희제의 넷째 아들 윤진(胤禛)이 황제의 유조를 낭독하며 자신이 황위를 계승함을 선포했다. 이렇게 옹정제(雍正帝)가 대위(大位)에 올랐다.
강희제의 의문스러운 서거를 둘러싸고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많았으나, 정사(正史)에서 많은 진실이 인멸되었기에 오늘날 그 핵심적인 역사 현장을 복원하기는 매우 어렵다. 강희제가 서거한 날부터 민간과 사학자들은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많은 공력을 들였으며, 오늘날까지도 학자들은 새로운 증거와 논점을 제시하며 더욱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새로운 황제의 스타일
새로 등극한 옹정제에 대해 유럽 선교사들은 몇 가지 기록을 남겼다. 그들의 기록 속에서 이 새로운 황제는 강희제와 확연히 다른 풍모를 보였다.
“황제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모든 종교가 그 자체로는 선하지만, 신도들 중에는 항상 교리와 교규를 위반하는 나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 나쁜 자들은 처단해야 마땅하지만, 그들을 처단하는 것이 그들이 믿는 종교를 압제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롭장단진(羅蔔藏丹)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수천수만 명의 라마를 죽였고 얼마나 많은 라마 사원을 파괴했는가!’
자신의 이러한 논단이 옳음을 증명하려는 듯, 황제는 두세 번 크게 웃으셨습니다. 그는 말을 할 때 거침이 없었고 자신감이 넘쳤기에, 우리 선교사들은 대답할 기회조차 없었으며 이의를 제기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또한, 누구든 부적절한 대답으로 황제의 말을 가로막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알현 전에 태감들은 이미 황제 앞에서 말조심해야 한다고 몇 차례 주의를 주었습니다.
우리가 황궁의 외궁문(外宮門)을 나섰을 때 태감들이 다시 우리를 불러 세워, 황제께서 우리 각자에게 하사하신 하미과(哈密瓜 멜론의 일종)를 받게 했습니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하례를 올린 뒤, 태감 앞에서 세 번 머리를 조아려 감사를 표하고 각자 하미과를 들고 궁을 나왔습니다.”—— 장 가브리엘 파피용(Jean-Gabriel Papillon, 嚴嘉樂) 신부가 츠비커에게 보낸 편지, 북경, 1725년
사료에 따르면 옹정 2년 3월 9일, “이번 전투에서 악종기(嶽鍾琪)가 수천 군사를 이끌고 적의 소굴을 급습하여 수만 명을 사살하고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예수회 선교사 엄가락의 기록과 일치한다.
등극 전부터 윤진은 오랫동안 선(禪) 수행에 전념했으며 도사의 금단(金丹)을 복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양에서 온 천주교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불신을 품고 있었다. 이는 그와 유럽 선교사들 간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선교사들 역시 부친과는 판이한 이 새 황제의 스타일에 대해 어떤 예감이 들었는지 깊은 불안감을 느꼈다.
금교(禁敎)와 쇄국
중국 신자들이 조상 제사를 지낼 수 있는지에 관한 ‘전례 논쟁’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1707년, 교황청 사절 투르농(Maillard de Tournon, 鐸羅)은 강녕(江寧)에서 중국 교도들의 제사와 공자 숭배를 금지하는 금령을 발표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강희제에게 이 금령을 번역해 보고하자, 강희제는 대노하여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도리는 끝이 없고 문장의 뜻은 심오하니, 너희 서양인들이 함부로 논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강희제 재위기에는 천주교 금령이 엄격히 시행되지는 않았다. 중국에 체류중인 선교사들이 북경에서 허가증을 받고 중국 전례를 따르겠다고 표명하면 중국에 남아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옹정제가 즉위하자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옹정 원년 말인 1724년 1월, 금교령이 반포되었다. “북경에서 복무하는 자를 제외한 모든 서양인은 일체 마카오로 추방한다.” 외국 선교사들의 애절한 간청 끝에 옹정제는 마카오 외에 광저우를 추가 추방지로 허용했다. 동시에 전국의 수많은 성당이 파괴되거나 천후묘(天后廟), 무묘(武廟), 창고 등으로 개조되었고, 만주인과 한인 신자들은 가혹한 고문을 받거나 구금되어 신앙 포기를 강요받았다. 중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선교사들은 내륙 오지로 숨어들어 고통스럽고 위험한 지하 선교를 이어갔다. 이때부터 한 세기 넘게 이어지는 종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북경에서 한 통 한 통 편지가 날아와, 이제 막 시작된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 소식을 알리고 있습니다. 북경의 소식에 따르면 모든 기영(旗營) 내에서 기독교를 믿는 만주족과 한족 관병들을 매우 엄격하게 수색하고 있으며, 고문을 통해 신앙 포기를 강요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일한 명령이 곧 푸르단(富爾丹 청 장군)에도 전달될 예정입니다.” —— 예수회 도미니크 파레냉(Dominique Parrenin, 파도명) 신부가 본회 뒤 할드(Du Halde, 두혁덕) 신부에게 보낸 편지, 1736년, 북경
“나는 매일 밤 안륙(安陸)으로 갔다가 동이 트기 전 배로 돌아옵니다. 길거리나 골목은 텅 비어 있어 나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우리가 수년간 예수님을 경배하던 신성한 성당이 이제 이교도들에게 점령되어 우상 숭배 등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것을 보며 마음속 깊이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거의 동시에 남창산, 곡성(谷城), 광화(光化) 등지에서도 유사한 수색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여러 곳에서 들었습니다. 관아 관리들로부터 전해 듣기로는 황제의 밀지에 따른 수색이라고 합니다. 황제는 많은 선교사가 더 이상 광저우에 나타나지 않고 다른 성(省)으로 들어가 기독교인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관리들은 기독교를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돈을 요구했고, 기독교인들이 돈을 모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 주스트 에베르(Just Hebrard, 顧鐸澤) 신부가 모 신부에게 보낸 편지, 1730년
많은 학자는 해금(海禁)이나 폐관(閉關)보다 금교(禁敎)가 진정한 의미의 ‘쇄국’이었다는 데 동의한다. 옹정제의 금교 이후, 선교사들이 유럽으로 보낸 편지 속 중국의 이미지는 급변했다. 선교사들이 추방됨에 따라 여러 세대의 심혈을 기울여 한 벽돌 한 벽돌 쌓아 올렸던 동서양의 문화 가교는 허리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후 만청 제국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탈바꿈하는 만청 제국
살아생전 강희제는 친민(親民)적이고 늠름한 군주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그는 남순(南巡) 6회, 서순 5회를 다녀왔고 북순은 더욱 빈번히 행하며 준마를 타고 국토 구석구석을 누볐다. 남순 시기 어선이 물 위에 정박해 있을 때 황제는 등불 아래에서 자정까지 책을 읽었다. 말을 타거나 배로 이동하며 온종일 고단한 날에도 강희제는 수면 시간을 쪼개어 상소문을 결재했으며, 결코 다음 날로 미루지 않았다.
순행 중 강희제는 백성들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있도록 친근하게 대했다. 이에 대해 수행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백성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갔으며, 모든 이가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애썼습니다. 북경에서의 관례처럼 그는 호위병들에게 백성들의 접근을 막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백성은 그들의 황제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성안(聖容 황상의 존안)을 한 번 뵙기 위해 그들은 먼 길을 달려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황제의 친림은 전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황제 또한 신민들의 진실한 감정 표현에 매우 기뻐하며, 위엄의 모든 장식을 걷어내고 백성들을 가까이 오게 함으로써 조상 대대로 내려온 소박한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 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남회인), 『타타르 여행기』
“황제께서 식사하실 때 멀리서 몇몇 농부의 아이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황제는 아이들을 가까이 데려오게 하여 만두와 고기, 과자를 먹이셨습니다. 아이들이 집으로 달려갔다가 곧 돌아왔는데, 저마다 바구니 하나씩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자기 상 위의 음식들로 아이들의 바구니를 가득 채워주라고 명하셨습니다.”
——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일기』
하지만 옹정제의 치국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말 타기와 사냥을 즐기지 않았고, 재위 13년 동안 동릉(東陵) 참배를 제외하고는 순행을 나가지도 않았다. 대신 궁궐 안에 자신을 가둔 채 엄청난 수의 상소문을 세밀히 검토하며 수십만 자에 달하는 주비(朱批, 붉은 글씨의 결재)를 남겼다. 이 주비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옹정제의 심중과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옹정제는 탐관오리를 척결하는 수단이 매우 맹렬하고 효율적이었다. 너그러웠던 강희제와 비교해 만청의 관료 풍토는 단숨에 변모했다.
청제국에서 옹정제는 부친과는 천양지차인 낙인을 찍었다. 강희·건륭 두 시대에 비해 옹정 시대의 문자옥(文字獄)은 규모가 더 컸고 연루된 범위도 넓었다. 또한 옹정제는 7년 동안 관풍정속사(觀風整俗史 풍속을 감찰하고 바로잡는 특수 관원)를 두었으며,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라는 기이한 책을 편찬해 전국 군현의 교육 관리들에게 한 권씩 나누어주고 온 국민이 학습하게 했다. 심지어 황제의 10대 죄상을 폭로했던 증정(曾靜)을 전국으로 돌리며 강연하게 하여 참회하고 개과천선하도록 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반면교사’의 보급은 훗날 신중국(공산화 이후 중국)의 문화대혁명 정풍 운동과 유사한 면이 있다.
조선 사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청 황제(옹정제)는 스스로 성인인 체하며 가혹한 정치를 많이 하여, 강희제의 옛 신하 중 죽은 자가 수백 명에 달한다.” (『조선왕조실록』 중 중국 관련 사료) 동시에 옹정 왕조 전체를 통틀어 윤진의 형제 여럿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데, 이는 옹정제를 논할 때 피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이다.
옹정제의 통치 스타일에 대해 저명한 역사학자 전목(錢穆)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리가 지금 그의 주비유지를 보면 청대 황제가 중국을 어떻게 통치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전국 각지 지방 장관의 모든 활동을 그는 다 알고 있었는데, 아마 전국 각지에 그가 사적으로 파견한 특무 요원들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많은 이의 사생활은 물론 가족, 부자, 친척 간의 사소한 일까지도 그를 속일 수 없었다.” (『중국역대정치득실』)
유명한 중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중국 이름 史景遷) 역시 옹정제가 제국 신민들의 동향을 감시했으며, 주비를 통해 관리들에게 야간 통행 선박의 목적지와 만주족 병사들의 행적을 조사하라고 요구했음을 논의한 바 있다.
개인 영역까지 침투한 고압적 통치 아래서, 서양 학문을 흡수하는 데 적극적이고 관대하며 서양 선교사들을 예우하던 중화 제국은 점차 탈바꿈했다. 만청 중·후기의 폐쇄적 성격이 날로 굳어졌으며, 이는 견유주의(Cynicism) 스타일의 건가(乾嘉) 고증학 풍토를 낳았다.
1735년, 윤진은 의문의 급사를 당하며 또 하나의 풀리지 않는 역사적 미스터리를 남겼다. 강희제가 생전에 무척 아꼈던 손자 건륭제가 등극했다. 건륭제가 즉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옹정제에 의해 구금되었던 황족과 신하들을 석방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강희제의 아들들 중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건륭제의 14번째 숙부, 즉 과거 티베트를 평정하고 개선할 당시 위풍당당했던 무원대장군(撫遠大將軍) 윤제(胤禵)였다.
많은 이에게 윤제가 석방된 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강희제의 14번째 아들이 그곳에 갇혀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 아무도 그를 언급하지 않아 많은 이가 그가 이미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겹겹의 큰 문을 열고 나서야 죄수를 찾아냈습니다. 그는 담장이 너무 두꺼워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말이 오가는지 전혀 들을 수 없었기에 자신의 넷째 형(옹정제)이 죽고 조카가 즉위했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12년 동안 갇혀 있던 친왕이 가혹한 어둠 속에서 끌어내 졌을 때 얼마나 놀라고 기뻐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행인들은 그 기마 행렬이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멈춰 서서 구경했습니다. 사람들은 곧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습니다. 모두가 고난을 겪은 친왕이 석방되는 장면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소식은 즉시 북경으로 퍼졌고, 14친왕부가 행렬이 들어온 성문에서 가까웠기에 백성들이 떼를 지어 달려와 영접했습니다. 그들은 기쁨을 표하기 위해 모두 무릎을 꿇고 그를 맞이했으며, 손에 향을 들고 그에게 절을 했습니다.”
—— 파르냉 신부가 뒤 알드 신부에게 보낸 편지, 1736년, 북경
옹정 원년부터 만청의 대문은 세계를 향해 닫혔다. 자신감 있고 너그러운 태도로 고대 문명의 결실을 유럽에 전해주던 중화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신주(神州) 대지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에 갇히고 말았다.
이후 약 300년 동안, 유럽인들이 열광하며 동경했던 동양의 고대 문명은 뼈를 깎는 듯한 탈바꿈을 겪었다. 이와 나란히 지구 반대편 유럽에서는 전 인류를 휩쓸어버릴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6/1/16/n4618136.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