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夏禱)
【정견망】
18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은 각종 사조가 가져온 자양분을 흡수하고, 자신의 강인한 위장 속에서 이를 씹고 소화하며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거인으로 성장했다. 이 거인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야 속에서, 멀리 떨어진 중화 고대 문명 또한 계속해서 변모해 갔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동서양은 각자 완전히 새로운 문명으로 탈바꿈했다. 이 새롭고도 낯선 두 문명 사이에서, 지난 100년간 이어졌던 상호 교류 및 상호 보완의 시대는 어느덧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동서양 문명이 아주 오래전 설계된 청사진을 함께 망각했을 때, 인류 문명은 필연적으로 점점 좁아지는 골목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지난 300년 동안 인류 문명이 스스로 해체되고 부정되는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경천동지(驚天動地)’라는 네 글자만으로는 이 천지개벽할 인류의 비극을 형용하기에 부족하다.
태양왕이 부재한 나날들
루이 14세가 후손들에게 남긴 것은 극성기를 지나 쇠퇴하기 시작한 프랑스였다. 5세에 왕위를 계승한 루이 15세는 용모가 수려하여 ‘사랑받는 루이(Le Bien-aimé)’라 불렸으나, 증조부의 결단력 있는 영민함이 없었으며 군주로서의 풍모는 더욱 부족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방탕하고 탐욕스러운 사생활은 군주제의 근간을 흔들었고, 7년 전쟁은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점차 루이 15세는 백성들의 증오를 받는 군주가 되었다.
그의 손자 루이 16세는 조부로부터 미국 독립 전쟁 참여로 인해 짊어진 40억 리브르의 국채와 사회 질서가 혼란하여 붕괴 직전에 몰린 프랑스를 물려받았다. 공식 의례에 노출되는 것을 즐기지 않았던 이 군주에게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은 너무나 눈부신 곳이었다. 그는 태양왕의 침실에서 나와 별도의 사적인 거처를 마련했다. 태양왕이 세상을 떠난 후, 베르사유 궁전의 전성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788년 7월, 달걀 크기의 우박이 하늘에서 쏟아져 농경지를 두들겼고, 광활한 전답의 수확물은 전멸했다. 극심한 가뭄에 혹독한 겨울까지 겹치면서 프랑스의 빵은 심각하게 부족해졌고 가격은 기염을 토하듯 치솟았다. 사망률은 나날이 높아졌고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다. 우아한 건축물, 늘어선 가로등, 조각상들은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지 못했다. 이미 파산 위기에 처한 프랑스에 설상가상의 재난이 닥쳤다. 영불 통상 조약의 여파로 수많은 기업이 도산했고, 연말에는 8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수만 명의 사람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하층민들은 배고픔과 추위가 함께 닥치는 곤경에 놓였다. 굶주림과 죽음의 위협 속에 쌓여가는 원망과 분노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1789년 5월 5일, 전례 없는 국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왕실은 100년 넘게 중단되었던 삼부회(성직자, 귀족, 평민)를 소집했다. 귀족 계급이 협력을 거부하자, 전국 인구의 95%를 차지하며 세금 부담이 가장 컸던 제3계급(농민, 노동자, 상인, 군인, 장인, 지주 및 자산계급 포함)이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입헌 개혁과 군주 입헌제 수립을 준비했다.
루이 16세가 개혁에 찬성하던 재무장관을 해임하자 국왕과 국민의회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7월,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과 가세한 파리 반군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탄약과 무기를 탈취했다. 10월, 프랑스 대혁명의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둥둥 울리는 드럼 소리와 폭도들이 탈취한 대포를 앞세워, 7,000명의 여성이 파리 시장에서 베르사유까지 행진했다. 그들은 수비가 없는 문을 통해 궁전으로 난입해 국왕의 근위병 몇 명을 살해하고 루이 16세를 붙잡아 혼란과 굶주림이 가득한 파리로 압송했다. 돌아오는 길에 행진 대열은 6만 명에 달했다. 호송을 맡은 국민자위대는 총검 끝에 커다란 빵 조각을 매달았고, 일부 시장 여성들은 노획한 대포 위에 흥분하여 올라탔다. 행진하는 이들은 긴 창을 높이 들었는데, 그 창끝에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살해된 군인들의 머리가 꽂혀 있었다.
세상을 바꾼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파리에 도착한 국왕과 왕비 가족은 매우 불편한 튈르리 궁에 구금되었다. “국왕은 절대적 주인이다”라던 태양왕 시대와 대조적으로, 18세기 말의 프랑스는 이미 다른 시대, 다른 세상이었다.
굶주림과 분노(그리고 왕위를 엿보던 귀족들)에 선동되어 왕실과 원수가 된 인민들을 마주하며, 루이 16세는 선한 의지를 품었음에도 위기 처리에 필요한 냉철함과 지혜가 부족했다. 결국 국민의회의 가톨릭에 대한 가혹한 박해를 견디지 못한 국왕 가족은 1791년 평민으로 변장해 튈르리 궁을 탈출했고, 그들의 하인들은 거꾸로 귀족으로 변장했다. 다음 날 국왕은 정체가 탄로나 백성들의 침묵 어린 주시 속에 다시 파리로 압송되었다. 1792년 프랑스 제1공화국이 선포되면서 부르봉 왕조는 타도되었다. 이듬해 1월, 루이 16세는 단두대에 올랐다.
광장에서는 산이 무너지는 듯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공화국 만세! 자유 만세!” 사람들은 쉼 없이 구호를 외쳤다. 모든 주먹은 꽉 쥐어졌고, 모든 모자는 공중으로 던져졌다. 수백 년간 억눌려온 분노가 마치 화산처럼 무섭게 폭발한 듯했다. 10분 후, 사람들은 미친 듯이 단두대로 몰려가 손수건, 넥타이, 모자 등 소지한 모든 물건에 루이 16세의 피를 묻혔다.
——『선량한 폭군 – 루이 16세와 프랑스 대혁명』
태양왕과 루이 16세의 재위 기간 사이에는 불과 60년의 간극이 있을 뿐이다. 이 60년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절대 왕권을 누리던 왕실이 이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비록 태양왕이 연루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및 중세 제도가 프랑스 재정 및 사회 위기의 시초로 역사학자들에게 지목되지만, 태양왕의 거대한 빛과 열기 아래서 그 원인들이 이토록 큰 재앙으로 번질 수는 없었다. 루이 15세와 16세로 이어진 평범한 통치, 성격적 결함, 지속적인 전쟁과 천재지변조차 프랑스 대혁명의 필연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면의 심층적인 인연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역사의 많은 중요한 변화와 마찬가지로, 사상적 변혁이야말로 프랑스 대혁명의 근본적인 동력이었다. 태양왕의 세기 동안 유럽에는 새로운 사조의 씨앗이 뿌려졌고, 사회·정치 사상부터 법률, 과학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전방위적인 충격을 받았다.
볼테르, 루소와 같은 계몽주의 인물들은 군주 전제와 종교의 권력 독점에 분노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해 전염성 강한 그들의 언설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땅굴의 문을 열었고 혁명의 불꽃을 지폈다. 유럽 내부로부터, 마치 고삐 풀린 만 마리의 야생마처럼, 기성 체제(이른바 앙시앙 레짐)에서 벗어나려는 억제하기 힘든 광포한 힘이 솟구쳐 올랐다.
무기로 전락한 중국 철학
5,000년 중화 고대 문명을 마주하는 유럽인의 심리는 복잡했다. 호기심과 매료에서 시작해 이를 필요에 따라 활용하기까지, 유럽 학자들은 중국에서 문명의 영감을 찾았다. 중국 고전들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면서, 이 고대 문명의 지혜는 유럽 지식인 사회에 필요한 자양분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문화적 차이와 서구 문명의 우월감으로 인해 강압적인 왜곡은 거의 불가피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초기 계몽주의 운동에 있어 중국 문화는 중요한 촉매제였다. 그러나 우리 한번 상기해 보자. 근현대로 진입하는 중화 제국에게 상황은 대개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중화 문화가 유럽에서 일으킨 역할은 종종 예상 밖이었으며, 심지어 우리를 대경실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서구의 1,000년 넘는 가톨릭 통치와 절대 군주제, 봉건 귀족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럽은 중국의 이성적이고 평등한 유가·도가 전통을 손에 든 창으로 삼아, 폐단이 가득한 가톨릭교회와 천 년간 이어온 유럽 문명의 핵심을 향해 휘둘렀다.
고향에서 십만팔천 리 떨어진 동방의 고국에서 선교사들이 밤늦도록 등불을 밝히고, 상형문자를 하나하나 라틴 알파벳으로 바꾸어 두꺼운 고전들을 인쇄해 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유럽인들이 이 하늘을 공경하는 오래된 문명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경건한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심혈이 담긴 이 고국의 지혜가 전혀 다른 것으로 왜곡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공자가 숭배했던 추상적인 ‘하늘(天)’에 대해 서구 학자들은 진정한 체득을 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비인격적이면서도 숭고하고 구체적인 ‘하늘’은 서구인의 마음속에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라이프니츠, 부베 등은 유교 사상과 성리학의 ‘리(理)’에서 기독교 정신과 갈라지지 않는 자연신론을 보았으나(이러한 견해 역시 강한 목적성을 띠고 있었다), 크리스티안 볼프(중국 철학의 우수성을 강의하다 대학에서 추방된 바로 그 교수)에 이르러 이러한 자연신론은 무신론과 위험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볼테르와 같은 계몽주의 작가들에게 그들이 이해한 중국의 자연신론은 가톨릭 전제를 공격하기에 아주 유용한 무기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고심해서 길러낸 열매가 거꾸로 교회를 공격하는 날카로운 도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중화 고대 문명의 경천(敬天) 전통은 유럽인들의 손에서 하나의 창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계몽주의가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동방 문명을 무자비하게 비판하기까지는 단 한 걸음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 사람을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다음 단계에서 중국 고대 문명은 유럽 지식인들의 습격 대상이 되었다.
몽테스키외는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파리 사람들과 파리 문화를 날카롭게 조롱했듯이, 중국을 하나의 괴물로 묘사했다. ‘법’의 정신이 없기에 중국은 몽둥이로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중국의 전제주의는 스스로의 쇠사슬로 무장했기에 더욱 잔인해졌다. 그러므로 중국은 전제 국가이며, 그 원칙은 공포다.”
“중국인의 생활은 전적으로 예(禮)를 지침으로 삼고 있으나,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남을 잘 속이는 민족이다. 이는 특히 그들이 무역에 종사할 때 두드러진다. … 그들에게 물건을 사는 사람은 자기 저울을 가져가야 한다. 모든 상인은 세 종류의 저울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살 때 쓰는 것, 하나는 팔 때 쓰는 것, 그리고 하나는 정확한 저울인데 이는 자신을 경계하는 사람들과 거래할 때 쓰는 것이다.” ——『법의 정신』
루소는 『학문과 예술론』에서 중국 문명을 예로 들어 자신의 ‘문명 부정론’을 증명했다. 그는 중국의 문명이 중국인을 더 도덕적으로 만들지 못했으며, 이민족의 정복을 피하게 해주지도 못했다고 질타했다. “그들이 쌓아 올린 영예들이 도대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그 결과는 노예와 악한들로 가득 찬 곳이 된 것 아닌가?”
한때 문명의 유토피아로 추앙받던 동방의 고국은 순식간에 무자비하게 비판받는, 낙후되고 쓸모없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
새로운 유럽
밤사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계몽주의는 태양왕의 문화 왕국을 덮쳤다.
1717년, 태양왕이 서거한 지 2년 후 볼테르는 프랑스 궁정의 사치를 조롱하는 시를 썼다가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다. 1721년, 몽테스키외는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발표했다. 당시 루이 14세 시대를 다룬 대부분의 작품과 달리, 이 책은 파리, 즉 프랑스 문화를 무자비하게 조롱한 작품이었다. 1728년, 몽테스키외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프랑스 과학원에 입성했다. 1746년, 프랑스 궁정에서 줄곧 위험인물로 간주되던 볼테르 역시 그토록 꿈꾸던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들어갔다. 이 계몽주의 검객들이 루이 14세가 남긴 문화유산 안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는 태양왕이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신시대의 거대한 변혁이 돌이킬 수 없이 도래했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인류는 300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며, 외면부터 내면까지 인류는 점차 낯설고 알아볼 수 없게 변해갈 것이다.
유럽은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거대한 몸체를 옮겼고, 마침내 180도 탈바꿈하는 변화를 완성했다. 18세기 후반, 유럽의 중국에 대한 매료는 거부감과 신랄한 조롱으로 변했다. 미래를 향해 성큼 내딛는 유럽은 이제 고국의 온화한 절제와 도덕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유미주의적이고 부드러운 실크나 깨지기 쉬운 청화백자를 더는 숭상하지 않았다. 열강들이 앞다투어 식민지를 쟁탈하고 금광과 철광을 채굴하던 시대에, 강력한 함대와 대포를 앞세운 유럽과 노자의 무위(無爲), 공자의 중용(中庸)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멀었겠는가!
몽테스키외는 군주권을 제한하기 위해 삼권분립을 제안하며 군권신수설을 부정했고, 루소는 자연과 인간의 천부 평등설을 역설했다. 볼테르는 종교적 전제와 미신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큰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날카로운 사상만큼이나 이 계몽주의 작가들의 언어는 신랄했으며, 대중의 원한과 열망을 부추기는 물질적 렌더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분노와 열망은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들의 글을 읽고 루이 16세는 깜짝 놀라 말했다. “이 두 사람(볼테르와 루소)은 펜대 하나로 내 왕조를 끝장낼 수 있겠구나.” 계몽주의 시대가 진전됨에 따라 유럽이 군주 전제를 뒤엎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사회 구조와 생활 측면에서 계몽주의와 함께 들이닥친 산업혁명은 전통적인 삶을 완전히 해체하고 인류를 전혀 새로운 생존 방식으로 인도했다. 산업혁명 시대에는 인류의 외형마저 변화했다. 공장에서 매일 장시간 이어지는 육체노동의 압박 속에 유럽 남성의 평균 신장은 1.73미터에서 1.67미터로 줄어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계화된 생산 방식, 즉 이 시대의 거대한 변혁이 인류에게 남긴 낙인을 볼 수 있다.
제국주의는 무장한 거선(巨船)에 올라타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확장해 나갔다. 프랑스 역시 영국, 네덜란드와 합세하여 먼 곳에 영토를 개척했다. 동시에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지구상에 일찍이 본 적 없는 굴뚝, 자욱한 연기, 톱니바퀴, 증기기관차가 지평선 위에 나타났다. 영국식 산업 풍경이 인류 내면의 격변하는 선풍과 결합하면서, 안팎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고 있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6/2/4/n4632710.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