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夏禱)
【정견망】
당시의 많은 유럽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매카트니 백작은 라이프니츠의 중국 관련 저작과 뒤 알드의 도판이 곁들여진 『중화도지(中華圖志)』를 숙독했다. 머지않아 그는 영국 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으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자신의 이 사명에 대해 매카트니는 흥분과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
1793년, 영국 사절단이 중국에 도착했다. 머리를 땋고 쪽을 찐 여인들을 보았을 때 매카트니는 찬탄하며 말했다.
“나는 그녀들의 외모에 큰 충격을 받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폭풍우』 속 미란다처럼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오, 기적이여!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니!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이구나! 오, 정말로 멋진 신세계로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들이 존재하다니!’”
그러나 이듬해 3월, 영국 군함이 마카오를 떠나 중국을 멀리하게 되었을 때 매카트니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중화 제국은 한 척의 낡은 폐선에 불과하다. 운 좋게 몇몇 신중한 선장들이 있었기에 지난 150년 동안 침몰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거대한 선체는 이웃 나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지만, 만약 불행히도 무능한 자가 키를 잡는다면 그 운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 즉시 전복되지 않더라도 잔해처럼 이곳저곳을 떠돌다 결국 해안선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금교와 쇄국 이후, 청나라 제국은 강희제 시대의 호기심과 서양 학문을 흡수하려던 용기를 잃고 서양인의 눈에 수리가 불가능한 낡은 전함으로 전락해 있었다. 백 년 전 중국에서 출항한 ‘앙피트리트 호(Amphitrite)’가 생루이 항에 도착했을 때의 성황과 비교하면, 이 낡은 전함의 모습은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세월은 마치 요술이라도 부리듯 인류 문명의 거대한 무대 위에 어지러운 빛과 그림자를 뿌려놓았다.
영국 사절단이 중화 제국을 방문한 이야기는 이미 오늘날의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아래는 1698년, 프랑스에서 온 첫 번째 범선인 ‘앙피트리트 호’가 광주 항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선교사와 청나라 조정이 선장의 강희제 알현 예법 문제를 두고 나눈 논의다. 강희제와 건륭제가 외국 사절을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에서, 우리는 동서양 문명이 이 1백 년 사이 각각 어떻게 변화했는지 엿볼 수 있다.
“흠차대신이 말을 마치자, 우리 선교사들은 두 줄로 서서 중국 관습에 따라 아홉 번 무릎을 꿇는 예로 황은에 감사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수많은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났으며, 현장의 백성들이 이 소식을 성안 전체에 퍼뜨려 광주 내 선교사들의 위신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사례할 때 무릎을 꿇고 복종과 충성을 맹세하는 식의 의식을 치러야 했기에, 나와 조아생 부베(Joachim Bouvet) 신부는 설명했습니다. ‘앙피트리트 호’ 선장은 서방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성한 군주의 관리로서 중국식 의식을 수행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서방의 위대한 군주는 복종을 받을 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중국 관리는 양국 모두에게 체면이 서는 방식, 즉 일부분은 중국 풍습을 따르고 일부분은 프랑스 예법을 따르는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그들은 드 라 로크(De la Roque) 선생이 북경 방향을 향해 서서 맞은편 순무가 낭독하는 ‘선박세 면제 성지’를 경청하되, 모자를 쓴 채 무릎을 꿇고 프랑스식 인사로 사례하거나, 원한다면 모자를 벗고 몸을 굽힌 뒤 무릎을 꿇지 않고 프랑스식 인사로 사례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 『부베 신부가 국왕의 고해신부 라 셰즈 신부에게 보낸 편지』 (1699년, 북경)
여기서 청 조정이 외교적으로 보여준 이성과 관용은 이후의 만주족 황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서양 음악과 서양 건축을 사랑했던 건륭제조차 조부인 강희제가 가졌던 당당하고 여유로운 자신감은 결여되어 있었다.
북경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사절단은 80세 고령인 건륭제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열하 피서산장으로 향했다. 무릎을 굽히지 못하는 영국인들의 뻣뻣하고 긴 다리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영국 사절들은 당시 해상 패권이 절정에 달해 스스로를 ‘지구의 주인’이라 칭하던 잉글랜드에서 온 이들이었다. 동방 제국을 여행하던 그들의 심리 상태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열하에서 영국 사절들은 이른바 ‘남만서이(南蠻西夷)’들 틈에 섞여 밤새 몇 시간을 서서 기다린 끝에야, 위엄 있는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신처럼 군림하며 나타난 건륭제를 맞이할 수 있었다. 불행히도 그들의 몸은 충분히 낮게 구부러지지 않았고, 각국 사절들 사이에서 높이 솟아있던 탓에 황제의 눈에 띄고 말았다. 이후 영국 사절단과 청 조정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결국 ‘지구의 주인’에서 온 사절단은 하룻밤 사이에 짐을 싸라는 명령을 받았고, 수많은 개인 물품을 포기한 채 서둘러 비참하게 중국을 떠나야 했다.
이 동방 제국 여행에 대해 매카트니의 수행원 앤더슨은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전체 이야기는 단 세 문장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거지처럼 북경에 들어갔고, 죄수처럼 그곳에 머물렀으며, 도둑처럼 그곳을 떠났다.”
치욕과 좌절을 안고, 이 부유한 동방 국가와의 통상을 기대하며 거대한 희망을 품고 왔던 사절단은 초라한 모습으로 영국 본토로 돌아갔다. 그 후 백 년간 벌어진 일들은 이미 역사가 되었다.
원명원의 불길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시대의 거대한 변혁에 따라 유럽의 중국에 대한 태도는 숭배와 매료에서 경시와 조롱으로 변했다. 이러한 조롱은 제국주의의 팽창 욕구와 결합하여 1840년 아편 전쟁을 일으켰고, 영불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울 때 그 정점에 달했다.
아편 전쟁 출정 전 영국 국회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있었는데, 결국 영국의 파병을 결정지은 것은 한 의원의 격정적인 연설이었다. 그 의원은 바로 당시 사절단 부사였던 스톤턴의 아들이었다. 과거 아이였던 그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갔을 때,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이유로 건륭제가 자신의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풀어 선물했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우리는 원명원을 기억한다. 이 환상적인 정원에는 태양왕이 보낸 사절들의 심혈이 담겨 있었다. 아름다운 서양 관현악이 울려 퍼지던 기해취(奇諧趣)란 건물과 음악에 맞춰 춤추던 누각 앞의 대수법(大水法) 분수가 그것이다. 1860년, 꿈결 같던 원명원의 아름다운 풍경과 정자, 누각들은 정교하게 조각된 서양식 건물과 함께 사흘 밤낮을 불길 속에 타올랐다. 불길과 함께 사라진 것은 300명의 내시와 궁녀, 장인들, 그리고 빅토르 위고가 ‘인류 꿈의 극치’라고 표현했던 정원이었다.
원명원의 파괴는 태양왕과 강희제가 손잡고 만들어낸 동서양 문명 교류의 환멸(幻滅)을 상징한다. 오늘날까지도 원명원 대수법의 끊어진 대리석과 서양식 건물의 석벽은 폐허 속에 쓰러진 채, 인류 문명이 스스로를 파멸시킨 그 시절의 이야기를 묵묵히 전하고 있다.
“곳곳에서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과 잔해더미가 우리의 길을 가로막았고, 불길은 이미 근처 수많은 농가까지 번졌습니다. 우리가 원명원의 대궁문을 나설 때, 흥분 속에 섞인 일말의 감상과 함께 뒤를 돌아보니 불꽃이 마치 화려한 꽃 장식처럼 춤추며 문짝들을 집어삼키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거대한 검은 연기 기둥이 무너져 내린 대궁문 지붕 위로 솟구쳐 올라 화염이 연출하는 생생한 그림에 테두리를 둘렀습니다. 불길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타닥타닥 타올랐는데, 마치 주변의 파멸을 환호하는 듯했습니다.”
“이틀 밤낮 동안 과거 번화하고 풍요로웠던 땅 위로 검은 연기 구름이 계속 떠다녔습니다.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미풍은 이 짙은 연기를 우리 진영 위로, 나아가 북경 성 전체로 몰고 갔습니다. 도성과 원명원이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기는 뜨거운 재를 가득 싣고 파도처럼 밀려와 거리마다 내려앉으며 왕실 궁원이 겪은 파멸과 형벌을 소리 없이 고발했습니다. 이 이틀 동안 진영과 원명원 사이의 햇빛은 하늘을 뒤덮은 짙은 구름에 가려져 마치 끝없는 일식처럼 어두웠습니다.” —— 영국 영사 겸 통역관 로버트 스윈호(Robert Swinhoe), 영국군 중령 울슬리(Garnet Wolseley) 등 목격자들의 회고
신들의 퇴장
지난 300년 동안 인류 문명은 자기 해체의 과정을 겪었다. 우선 계몽주의 시대는 중화 고대 문명의 ‘하늘(天)’에 대한 신앙을 ‘자연신학’ 혹은 ‘비초자연적 신앙’이라 부르며, 이를 서구 문명 전통의 핵심인 기독교와 가톨릭을 공격하는 도구로 삼았다. 볼테르는 중국의 자연신학이 이성적이고 평화롭다고 극찬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미신이라 치부했다. 그가 출간한 기독교와 성직자 비판 팜플렛들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프랑스 대혁명 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기독교는 뼈를 깎는 탈바꿈을 겪었다. 18세기 이전까지 가톨릭교회는 유럽 전체를 통치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다윈의 진화론은 만물의 영장인 인류를 원숭이의 후예라 일컬었다. 이 지점에서 수천 년간 인류가 믿어온 창조론은 완전히 찢겨 나갔다. 인류가 스스로를 신이 창조한 생명이 아닌 원숭이의 후예라고 선언했을 때, 인류의 집단적 변모는 완성된 셈이었다. 그 뒤의 전개에 대해 우리는 그리 놀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20세기를 앞두고 철학과 문학 작품 속에서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20세기 하반기에 접어들며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은 하나둘 폐쇄되거나 다른 용도로 변경되었고 신도들은 대거 이탈했다. 물질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무신론이 신학을 대신해 시대의 주류 의식이 되었다. 비록 기독교와 바티칸이 특정 사회 집단 내에서 여전히 중요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나,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인간의 영혼을 주재하던 신은 점차 지평선 너머로 물러나 버렸다.
마치 아궁이에서 땔감을 빼버린 것처럼, 인류 문명은 생존의 거대한 배경을 잃어버렸다. 하늘과 신들을 잘라내면서 인류는 삶의 반석과 도덕적 좌표를 잃고 공간을 부유하는 뿌리 없는 생령(生靈)이 되었다. 깊이 생각해보면 현대 문명의 모든 변화는 이 근본적인 탈바꿈에서 기인한다.
현대 인류 문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무신론이 새긴 낙인이다. 신이 떠난 자리에 남은 공백은 너무나 거대하여 인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신이 물러나며 생겨난 바닥 없는 블랙홀은 인류가 결코 채울 수 없는 심연이다. 모든 척도를 잃어버린 오늘날, 사람들은 점차 깨닫고 있다. 종교를 잘라내고 중국 철학 속의 하늘을 잘라낸 뒤 남은 인간 중심의 권력 의지야말로 오늘날 사회 무질서의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다행히 살아남은 고 문명
기독교를 해체한 뒤 유럽의 다음 목표는 중화 제국이었다. 계몽시대 중·후기의 중화 문명 비하에 이어,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포화를 장착한 높은 돛대 배들이 바다를 건너 경계가 허물어진 고대 문명의 문턱에 도착했다. 마치 중국인이 5,000년 동안 쌓아온 깊은 업력(業力)을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아편 전쟁, 원명원의 화재, 세 차례의 혁명 등 중화 제국의 고난은 21세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1901년, 의화단의 공격을 받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8개국 연합군이 천진을 출발해 북경으로 남하했다. 8월, 8개국 연합군은 북경을 점령하고 도심을 불태우며 약탈하여 경악스러운 역사의 장면을 남겼다. 연합군이 말을 타고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치솟는 불길과 포화의 연기 속에서 서로 다른 군복을 입고 다른 수염을 기른 8개국 군인들은 술을 마시며 1901년 새해, 즉 20세기의 첫 새해를 축하했다. 만약 우리가 200년 전 베르사유 궁전(그리고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열렸던 ‘중국 황제’ 연회와 카니발을 잊지 않았다면, 당시 유럽이 어떻게 18세기를 맞이했는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8개국 연합군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재앙 이후 청 제국의 국운은 다했다. 1901년은 만청(滿淸)이 멸망하기 정확히 10년 전이었다. 이후 20세기 내내 중국은 세 차례의 혁명을 겪었다. 손중산(孫中山) 선생이 이끈 국민혁명, 공산주의 무산계급 혁명, 그리고 문화대혁명이다.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 이 오랜 나라는 몇 번이고 자신의 길을 바꾸었다. 19세기 이후, 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 문명 고국은 이른바 ‘현대화’에 급급해 서양을 무작정 뒤쫓으며 본연의 모습은 잃고 남만 따라 함을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은 치명적인 갈림길에 들어섰다. 동방의 고국은 한 걸음씩 피로 물든 깃발 아래 ‘신중국’이 되어갔다. 60년 동안 신주(神州) 대지는 서쪽에서 온 유령(공산주의)에게 탈취당했고, 이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 속에서 민족의 맥락은 뿌리째 파괴되었다.
10년의 문화대혁명은 반세기 전의 프랑스 대혁명과 멀리서 조응하며, 고국(古國 중국)의 인민들을 하늘도 법도 모른 채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는 ‘신인류’로 만들었다. 이 지점에서 정신부터 물질적 측면까지 중화 제국의 해체 공정은 완료되었다. 변이된 신중국의 유전자 아래, 이 살아남은 고국의 가짜 화폐(膺幣)가 출현했다. 세계사 무대의 비극적인 한 장면처럼, 중앙(中央) 제국은 제 손으로 자신을 개조하는 데 골몰했다.
유럽의 ‘백 년 중국 열풍’은 이제 돌아보기 힘든 과거사가 되었다. 서구 열강의 대군 앞에서 동방의 고국은 패배한 문명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지구상에 유일하게 생존한 고대 문명이라는 사실을. 현대의 폐허 속에 우뚝 서 있는 이 고대 문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늘로부터 온 고대 문명이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패자(敗者)가 되었을 때, 이 모든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21세기에 되돌아보다
오늘날 통제 불능의 도덕적 타락과 모든 척도의 부식은 인류를 낭떠러지 끝으로 몰아넣었다. 21세기의 벼랑끝에 서서 되돌아볼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300년 전 태양 왕조가 강희 대제에게 내밀었던 그 너그러운 손길의 깊은 함의를 깨달을 수 있을지 모른다.
태양왕의 세기에는 동서양 문명이 서로 보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개화를 향해 나아가던 유럽에 필요했던 것은 바로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본받으며 도덕을 중시하는 이 고대 문명의 전범(典範)이었다. 전투적이고 오만한 앵글로색슨, 코카서스, 슬라브, 켈트, 게르만 민족들에게 유가의 중용과 도가의 무위는 최고의 중화제였다. 또한 유럽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사실주의 회화와 관현악은 서구 문명이 하늘로부터 받은 정수로서, 신운(神韻)과 기운을 중시하던 고대 문명에 견고한 자양분을 제공했다.
1789년, 유럽의 ‘백 년 중국 열풍’이 종결된 이 해에 천재일우의 기회는 돌이킬 수 없이 사라졌다. 21세기에 되돌아보면 인류 문명이 걸어온 길은 선명하다. 사물의 변화는 거부하기 힘든 부식성을 띠고 있어, 대개 큰 잘못이 저질러진 뒤에야 우리는 수습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결과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하늘이 고심해서 안배했던 동서양 문명의 만남은 어긋나버린 역사의 기회였다. 이 천고의 기회를 놓친 뒤 동서양 문명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오늘에 이르렀다. 태양왕 서거 300년 후 인류가 도달한 처지가 이토록 참혹하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 모든 것에 더 높은 차원의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발문(跋): 태양왕 서거 300년 후
태양왕이 남긴 유산인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서는 것은 마치 위대한 세기의 유적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태양왕이 인류에게 남긴 문화유산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훨씬 넘어선다. 인간의 영혼에 심오한 영향을 끼친 보이지 않는 것들, 인류 문명 전체에 깊은 각인을 남긴 것들, 그리고 태양왕이 설계했던 세계 문화의 청사진이야말로 그가 우리에게 남긴 진귀한 유산이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베르사유 궁전은 폭도들에게 여러 차례 약탈당했다. 궁 안의 화려한 가구, 벽화, 태피스트리, 샹들리에는 남김없이 털렸고 문과 창문은 부서졌다. 1793년, 궁 안에 남은 예술품과 가구들이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전 유럽 왕실이 부러워하던 베르사유 궁전은 폐허로 변했다.
1833년, 베르사유 궁전은 복원 공사를 거쳐 옛 영광을 되찾았다. 현재 베르사유 궁전은 역사 박물관이 되어 매일 전 세계에서 수만 명의 사람이 찾아와 이 끝없는 예술의 궁전을 거닌다. 다시 한번, 기세가 웅장한 천장 벽화와 거울의 방에서 빛나는 수정 샹들리에와 수천 개의 거울 조각들은 태양왕이 살아있을 때처럼 비할 데 없는 광채를 발하며, 300년 동안의 밀물과 썰물 같던 대하극의 흔적을 씻어내고 오직 신들의 조각상과 영원한 원소인 금, 수, 화(金, 水, 火)만을 남겨두었다. 앞뜰에서는 아폴론이 여전히 늠름하게 마차에 앉아 준마를 몰고 깊은 바다에서 파도를 가르며 솟구쳐 올라 천하를 다스리고 있다.
300년의 세월이 쏜살처럼 흘렀다. 베르사유 궁전은 파괴되었다가 다시 세워졌으며, 마치 그 맹렬한 불길과 무기를 겪지 않은 듯하다. 마치 그 모든 일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직 이 영원한 예술만이 시간을 뚫고 사람들의 눈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21세기, 인류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인 듯 사라졌던 역사의 기연(機緣)이 조용히 되돌아오고 있다. 찬란한 모든 결실을 품고, 버려졌던 고국(古國)의 문명이 다시금 사람들의 시선으로 돌아오고 있다. 중국에서 온 거대한 배가 다시 한번 출항했다. 영광스러운 그 배가 막다른 길에 다다른 인류 문명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어느덧 오늘날 인류 ‘진보 문명’의 해독제가 되어 있다. 300년 전 놓쳤던 역사의 기연과 우리는 다시 맞닿아 있다.
(시리즈 완결)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6/2/6/n4635218.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