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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논어》의 참뜻: 학이편 (1)

――먼저 ‘학습(學習)’ 두 글자의 본뜻을 바로잡다

유여(劉如)

【정견망】

【서언】

공자(孔子)의 《논어(論語)》는 누구나 다 알며, 맨 앞의 첫 문장이 바로 “배우고 때로 익히면(學而時習之)”이다. ‘학습’이라는 두 글자가 눈앞에 바로 나타난다. 하지만 바로 이 두 글자는 모든 이가 입에 달고 살며 지극히 익숙한 나머지, 현대인들에게 가장 깊이 오해받고 있는 단어이다. 이 두 글자의 본뜻이 밝혀지지 않으면 책 전체가 잘못 해석된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육을 이야기할 때는 대개 지식, 능력, 기술, 학위를 떠올리고; 학습을 이야기할 때는 대개 시험, 일, 성취, 경쟁을 떠올린다. 이를 위해 배운다. 하지만 《논어》는 사람에게 지식을 더하라고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사람에게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하며 어떻게 덕을 닦고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책이다. 이것이 바로 학습의 방향이다.

《논어》는 《대학》, 《중용》, 《맹자》와 함께 사서(四書)라 불리며 사서의 으뜸을 차지하는데, 그것은 문채(文彩)가 가장 성대하거나 분량이 가장 길어서도 아니라, 그것이 먼저 하나의 근본적인 물음에 답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배우는가? 무엇을 배우는가? 마지막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논어》는 공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와 재전(再傳)제자(제자의 제자)들이 평소 공자의 언행을 정리한 것이다. 제자들은 거창하고 유창한 글을 쓰지 않았고, 화려한 문체를 억지로 꾸미지도 않았으며, 한 구절 한 구절 가장 소박한 대화를 그대로 보존했다. 소박할수록 공자의 본래 가르치심에 가깝고, 꾸밈이 적을수록 후세 사람들이 성인의 사상을 문채 속에 매몰시키지 않게 된다.

제자들은 왜 이토록 공을 들였을까?

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도덕이 타락하여 예악(禮樂)이 무너지고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며 천하가 어지러워 백성들이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며 덕정(德政)과 교화로 인심(人心)을 구하고자 했으나 사방에서 벽에 부딪혔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그는 사람의 덕을 바로잡겠다는 심지(心志)를 바꾸지 않았고, 마침내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도덕이 있는 사람을 기르고자 한 것이다.

공자는 덕행이 없는 사람은 재주가 클수록, 능력이 강할수록 가져오는 해로움 또한 반드시 더 커질 것임을 알았다. 반대로 사람이 먼저 덕을 세우고 지식을 배우며 기예를 배우면 능력이 바르게 쓰일 수 있고 그것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러므로 《논어》가 전하는 것은 비단 공자의 언론뿐만이 아니라 바로 교육의 방향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학습’에 대한 이해가 이미 커다란 편향을 겪었다. 학습은 지식을 구하고, 기술을 구하고, 공명을 구하는 것이 되었고; 교육 역시 점점 능력을 기르는 쪽으로 치우치며 수신(修身), 정심(正心), 중덕(重德)은 소홀히 하게 되었다.

근대 이후 전통교육은 각종 관념의 충격으로 인해 학술화되고 변방으로 밀려났으며,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 악의적인 왜곡과 비판을 받으면서 《논어》의 아주 분명했던 많은 뜻이 점차 가려지고 이견이 빗발쳤다.

그리하여 나는 《논어진의(論語真義)》를 쓰고자 마음먹었다.

《논어》를 다시 주석하려는 것도 아니고 역대 주석가들과 높낮이를 다투려는 것도 아니며, 오직 공자의 본의로 돌아가 《논어》가 애초에 대답하고자 했던 물음, 즉 “사람은 마땅히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다시 찾기를 바랄 뿐이다.

이번 해설은 지식을 조금 더 늘리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덕성(德性)을 조금 밝히기 위함이고, 견해를 조금 다투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인심(人心)을 1분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이로 인해 경전이 더는 먼지를 뒤집어쓰지 않고 사람들이 번잡한 세상 속에서 사람 되는 법과 학습의 방향을 다시금 찾아내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쓰는 가장 큰 바람이 될 것이다.

통행본 《논어》는 모두 20편인데, 《학이(學而)》가 제1편에 놓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첫 편은 반드시 먼저 근본을 세워야 하고, 첫 장은 반드시 먼저 뜻을 밝혀야 하며, 첫 문장은 반드시 대의를 명확히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논어》의 첫 문장은 비단 《학이》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논어》 전체의 시작이고, 나아가 공자의 교육 사상을 밝히는 시작이다. 따라서 ‘학습’ 두 글자의 본뜻을 반드시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

아래에서 우리는 《학이》 제1장부터 시작하여 진의를 복원하고자 한다.

【원문】

子曰(1):“學(2)而時習(3)之,不亦說(4)乎?有朋(5)自遠方來,不亦樂(6)乎?人不知(7),而不慍(8),不亦君子(9)乎?”

【주석】

(1) 자(子): 고대에 덕행과 학문이 있는 이에 대한 존칭. 《논어》 속의 “자왈”은 모두 공자를 가리킨다.

(2) 학(學): 공자가 말한 ‘학’은 단순히 지식이나 기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의를 배우고, 덕행을 배우고, 사람 되는 도리를 배우는 것이며 수신과 정심을 근본으로 삼는다.

(3) 시습(時習): 시(時)는 때때로, 늘; 습(習)의 본뜻은 반복하여 실천함으로써 배운 바가 일상생활 속에 떨어지도록 하는 것이며, 단순히 지식을 익히는 것을 넘어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4) 열(說): ‘悅(열)’과 통하며, 마음속의 기쁨이다.

(5) 붕(朋): 같은 문하에서 배운 이를 붕이라 하며, 뜻이 맞고 도를 같이하여 함께 덕을 닦고 이치를 밝히는 사람으로 뜻이 확장된다.

(6) 락(樂): 외면의 즐거움. 옛사람이 말하길 “기쁨은 안에 있고, 즐거움은 밖으로 드러난다.”

(7) 지(知): 알다, 인식하다, 또한 알아주다, 이해하다의 뜻도 있다.

(8) 온(慍): 마음속의 불평, 불만, 원망과 노여움.

(9) 군자(君子): 공자의 이상 속에서 덕행이 고상하고 자신을 닦아 남을 편안하게 하는 사람.

【번역】

공자가 말했다. “사람 되는 도리를 배우고 그것을 늘 일상생활 속에서 반복하여 실천하니, 어찌 진심으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뜻을 같이하는 동료가 먼곳에서 찾아와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서로 격려하니,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이해하지 못해도 내가 원망하거나 화내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본장 요지】

학습으로 덕(德)을 이루고, 자신을 닦음으로써 성인(成人 온전한 사람)이 된다.

공자가 ‘배움[學]’으로 장을 연 것은 먼저 지식을 구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먼저 덕을 세우라고 가르친 것이며, 먼저 일하는 법을 물은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 되는 법을 물은 것이다. 《논어》 전체가 바로 이로써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해설】

《학이》가 《논어》 제1편에 놓였고, 이 장이 또 《학이》 제1장에 놓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옛사람들이 책을 편찬할 때, 특히 유가 경전의 경우 첫 편에는 대개 책 전체의 근본을 먼저 세우고, 첫 장에는 편 전체의 취지를 먼저 밝힌다. 그러므로 《논어》를 이해할 때는 먼저 “무엇을 읽었는가, 무엇을 배웠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먼저 물어야 한다. 공자는 왜 ‘배움’에서부터 시작했을까?

오늘날 사람들이 “배우고 때로 익힌다(學而時習之)”를 읽고는 대개 책을 읽고, 수업을 듣고, 지식을 복습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장 전체가 사람에게 부지런히 학습할 것을 권하는 명언처럼 읽히게 된다. 사실 배움[學]과 익힘[習]은 전혀 별개의 다른 개념이다. 근본적인 의미가 오늘날과 완전히 다르다.

먼저 배움[學]을 보자. 만약 ‘학’이 단지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면, 뒤의 “뜻을 같이하는 이가 먼곳에서 찾아온다(有朋自遠方來)”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人不知而不慍)”라는 두 구절과 온전한 문맥을 이루기 어렵다. 서로 연관이 없는 세 마디 말로 이해되게 된다.

본장에서 진정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사실 단 하나, 바로 덕을 이루기 위한 배움(學以成德)이다.

주희는 이 장을 평하여 “도(道)에 들어가는 문이요, 덕(德)을 쌓는 기초”라 하였는데, 이 여덟 글자가 그 중요성을 짚어주었다. 《학이》는 사람에게 어떻게 더 많이 배워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유학의 도에 들어서는 첫걸음은 먼저 덕을 세우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은 단순히 서주(西周)의 예(禮), 악(樂), 시(詩), 서(書)를 배우는 것이 아니며 지식과 기능을 장악하는 것만도 아니고, 사람 노릇을 배우고 이치를 배우며 덕을 닦는 것을 배우고, 어진 이를 보고 자신을 돌아보며(見賢思齊), 날마다 자신의 언행을 반성하여 자신의 마음이 점점 인의의 도와 가까워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배움의 핵심은 사람 되는 도덕이다.

이어서 두 번째 글자 — 익힘[習]을 보자.

‘습’은 지식을 반복하여 능숙하게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 사람 되는 도리를 계속해서 생활 속에 실천하여 반복해서 실행하는 것이다.

매일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처하고, 이익에 직면하고, 갈등에 직면하는 것이 모두 ‘습’의 기회이다. 배움은 마음에 있고, 익힘은 일상생활에 있다. 배우기만 하고 익히지 않는 것은 책을 외우는 것과 같아서, 알기는 하되 실제로 실천하지 못하면 공허한 도리만 있을 뿐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이며 실수가 없으니 참으로 터득할 수 없고 자신의 학문이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했다. “배우고 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않은가?”

이 ‘열(說/悅)’은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은 기쁨이 아니며, 능력이 향상된 만족이 아니라,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을 바로잡고 도의를 실천할 때 도덕 경계의 향상으로 인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다. 옛사람들은 이를 “마음속의 기쁨(悅在心)”이라 불렀다.

바로 이 때문에 두 번째 구절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뜻을 같이하는 이가 먼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않은가?”

붕(朋)은 단순히 친구가 아니라 같은 문하, 같은 도, 뜻이 같은 사람이다. 모두 덕을 닦고 이치를 밝히는 길을 함께 걸어가며 서로 탁마하고 서로 격려하기에 ‘락(樂)’이라 한다. 기쁨은 안에 있고, 즐거움은 밖에 있다; 마음속이 기쁘니 겉으로 즐거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세 번째 구절이 바로 장 전체의 진정한 귀결점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원망하지 않는다”이다. 이러한 이해도 일정한 타당성은 있으나, 만약 첫머리에서 대의를 명확히 밝히는 위치에 둔다면 여전히 공자의 근본을 말한 것이 못 된다.

본 장의 앞 두 구절은 모두 수신을 말하고 있으므로, 세 번째 구절 역시 자연히 수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知)’는 알다, 이해하다 외에도 식견, 재지의 뜻도 가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재주를 좋아하고 어리석음을 업신여기기 쉬우며,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을 좋아하고 식견이 부족한 사람을 배척하기 쉽다. 그러나 공자는 설령 타인의 경계가 높지 않고 이해가 다르며 말이 편파적이고 심지어 자신을 오해할지라도 원망을 품거나 노여움을 일으키지 않으며, 남의 부족함 때문에 자신의 인후(仁厚)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이 진정한 군자이다.

그러므로 본 장의 세 구절은 사실 하나의 완전한 수신 차제(次第)이다.

배움은 덕을 근본으로 삼고, 익힘은 실천으로 덕을 검증하며, 동료는 도로써 서로 성장하고, 성내지 않음으로 덕이 남을 포용하며, 마지막에는 군자의 경계로 귀결된다.

어떤 이들은 이 세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자신의 학설이 사회에 채용되어 기쁘고, 명성이 널리 퍼져 친구들이 사모하여 찾아오니 즐거우며, 설령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 이러한 설명은 앞뒤가 이어지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장 전체를 그릇되게 인도하여, 후세에 공명을 좇으며 공부하는 공리심을 공자에게 덧씌우는 것으로 성인의 가르치심과 정반대로 어긋나게 된다.

이를 보면 인심이 마비되어 변질되면 경전의 참뜻이 먼지를 뒤집어쓰게 됨을 알 수 있다. 도덕과 관념의 타락은 바로 경전이 왜곡되고 가려지게 되는 원인인 것이다.

공자가 즐거워한 것은 자신의 학설이 얼마나 고상하고 얼마나 돋보이는지, 다른 사람의 칭찬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마음을 닦고 도를 즐기는 것이었다.

안회(顔回)의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표주박 물로 누추한 골목에 있으매,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거늘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았다”에서 공자가 칭찬한 것은 바로 이러한 도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학업 태도였으며, 개인의 명리와 득실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

《학이》 제1장이 《논어》 전체의 으뜸에 놓인 것은 바로 학습의 본뜻을 먼저 바로잡고 학습의 방향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먼저 사람 되는 법을 묻고, 다음에 일하는 법을 물으며;
먼저 덕행을 묻고, 다음에 재능을 묻으며;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다음에 그 지혜를 길러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자 교육의 근본이자 교육의 목적이며, 《논어》의 첫머리 제1장이 진정으로 후세에 알려주고자 하는 도리이다. 이 때문에 옛사람들은 이렇게 밝혔다. 스승이란 도를 전하고, 업을 가르치고, 미혹을 풀어주는 자이니, 이것이 바로 천명(天命)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