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대법제자
[정견망]지금부터 “현지의 민중에게 현지의 사악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자사(自私), 자아” “개인 수련의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원용불파한 정체를 형성할 것인지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체험을 이야기하여 동수들과 같이 교류하려고 한다.
전에 중국대륙의 대법재자들이 진상을 알리는데 이용된 내용은 주로 명혜망에서 다운받은 진상자료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자체로 조금씩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평론하여 주를 단”현지의 민중에게 현지의 사악을 폭로하자”라는 문장을 본 뒤, 진상을 알리는 내용과 방식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현지의 사악을 폭로하는 것이 중점으로 되었고 폭로하는 내용도 대부분 현지의 대법제자가 현지 사악의 박해를 받은 과정이었으며 폭로당한 사악에 대해서는 모두 실명을 밝히게 되었고 대법제자가 박해를 당한 사실도 실제 있은 일들을 소재로 한 것이였다. 비록 때에 따라 실명을 밝히지 않았지만 대법제자를 박해한 사악이든 진상자료를 받아본 민중이든 박해를 받은 과정을 보기만하면 누구의 일을 쓴 것인지 알게 된다. 이는 대법제자가 정(正)과 사(邪), 선과 악을 모두 세상사람들 앞에 놓아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한 것은 모두 선한 일면이고 보여준 형식도 모두 선한 행동으로서 목적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표면 공간의 그 어느 한 사람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대법제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떠한 기점에 서서, 어떤 태도와 심태로 이 일에 참여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매 사람의 수련하는 층차가 다름에 따라, 법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같지 않음에 따라, 또 박해를 받은 정도가 다름에 따라 이 일에 대한 관점도 같지 않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현지의 민중에게 현지의 사악을 폭로”하는 것은 정법 흐름의 체현인바, 한 대법제자를 놓고 말하면 인식되였지를 막론하고 “자아”의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정체적인 정법 흐름에 따라가야 한다고 인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사부님께서 “대륙의 전체 대법제자와 신수련생들이 모두 이 일을 잘하기를 바란다.”고 하신 것은단 한명의 제자도 빠뜨리지 않으려는 제자들에 대한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로서 매 한 제자에게 정법에 참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땅히 법공부를 잘하여 법리를 이해한 전제하에서 모두 제고되어 이 일에 같이 참여할 수 있도록 매 한 동수(여러 가지 원인으로 아직 걸어 나오지 않은 동수들을 포함)를 도와주어야 하며 일부분 동수들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동수들은 전에 우리는 현지의 사악을 폭로하였고 명혜망에 올리기까지 했으므로 사람마다 진상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지금처럼 안전하고 조용한 법공부 환경을 어렵게 개척했으므로 마땅히 지금의 환경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비록 전에 현지의 사악을 폭로하기는 했으나 그다지 상세하지 않고 전면적이지 못하여 아직 진상을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민중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지금은 전면적이고 체계적이며 상세하게 진상을 알림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진상을 알게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구도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한 이렇게 해야만 사악의 요소를 철저히 제거하여 환경이 더 좋아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밖에, 일부 동수들은 아직도 무서워하는 마음과 집착때문에 걸어 나올 용기를 잃었으며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눈앞의 형세가 여전히 험준하므로 방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쉽사리 어떤 행동을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일찌기 여러가지 부동한 인식이 있게 되는 원인을 알려 주었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에 대해 정통한 정도가 같지 않은 수련자들을 놓고 볼 때, 표현되어 나오는 견정한 정도도 같지 않고 현재 정법 형세에 대한 감수도 같지 않다. 자신의 상태는 자신의 감수가 같지 않음을 조성하게 될것인바, 어떤 사람은 형세가 험악하다고 느끼지만 어떤 사람을 놓고 말하면 형세는 이미 느슨하게 변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을 놓고 말하면 마침 세인을 구도하고 진상을 똑바로 알리는 아주 좋은 시기라고 느낄 것이다. 법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정도가 같지 않음은 현재의 형세에 대한 같지 않은 느낌을 조성하는데, 이 일체는 모두 부동한 사람의 마음을 겨냥한 것이다.”<<2002년 워싱턴DC법회에서 설법>>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식이 부동한 원인을 알려 주었는데, 이는 우리가 자신에게 타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인식을 고집하거나 법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핑계로 자신이 이해한 그 정도까지만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자사(自私), 자아”와 개인 수련의 작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동을 정체에 용해되어 들어가게 하고 정확한 선택을 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정월대보름날 설법>>에서 우리에게 이런 경고를 했었다. “정법 중에는 하나의 이치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처리하든지 간에 모두 바른 것이다. 당신들은 사부가 한 이 한 마디 말을 기억하라. 즉 내가 어떻게 처리하든지 간에 모두 바른 것이며 처리당한 것들은 모두 그릇된 것이다. (박수) 왜냐하면 그것은 우주의 선택이며 미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날 정법 중에서 한 일체, 내가 가지려고 하는 일체는 명백히 말하면 바로 미래 우주의 선택이며 미래 우주의 수요이다.” 나는 한 동수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하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하겠다.” 그 때 나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 대도(大道)는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것이다. 수련은 바로 “법을 사부”로 삼고 모든 것은 사부님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어떤 선택을 하면 우리도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는 사부님을 따라 내려와 정법하는 정확한 선택한 선택을 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부님과 연분을 맺게 되었고 서약을 했으며 큰 뜻을 품은 것이다. 지금은 마침 그 모든 것을 실천에 옮길 시기이다. 세간에서 중생을 구도하는 일은 무수한 작은 입자가 모인 하나의 정체가 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 중의 하나이다. 매 입자는 모두 자신이 법을 원용하는 하나의 책임을 지고 있다. 일을 하는 과정에 인식이 같지 않다든가 혹은 작은 모순과 쟁론이 생기는 것은 모두 정상이다. 그러나 하나의 전제가 있는데 중생을 구도하는 대사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 이는 매 한 대법제자가 모두 반드시 기점을 법에 두고 서로 조절, 협조를 잘 할 것이 요구된다. 수련함에 있어서 서로 보완하고 서로 도와주고 호응한다면 사악이 들어올 틈이 어디에 있겠는가?
법을 증실하고 중생을 구도한 경험은 대법제자가 자신의 피눈물, 교훈과 생명으로 바꿔 온 것이다. 그리고 느슨한 환경도 대법제자 모두가 그렇게 하는 과정에 사악을 대량으로 제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진상을 알게 했으며 주위 환경 속의 바른 요소를 강화하여 형성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갈수록 진상을 더 명확하게 알리고 갈수록 더 철저하게 사악을 폭로하고 제거해야만 환경이 좋지 않던 지역의 환경이 진정으로 좋아질 수 있고 점점 더 느슨해 질 수 있다.
때문에 매 한 대법제자는 모두 마땅히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기점에 서서 정법수련을 보아야 하고 “현지의 민중에게 현지의 사악을 폭로”하는 일을 보아야 하며 “자사(自私), 자아”의 작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무사(無私), 무아(無我)”한 원용불파의 정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발표시간: 2004-02-02
문장분류: 정법수련>수련체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4/2/2/256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