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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외운 이야기”를 읽고

글 / 원화(文華)

[정견망] 2월 8일 명혜망에 오른 글 “법을 외운 이야기”를 읽고 나는 감동되어 눈물까지 흘렸다. “법을 외우기 좋아한다”는, 법속에 용해된 동수의 행복한 기쁨은 나를 깊이 감화시켰다. 그렇다, 어느 생명이 자신의 생명을 만들어 낸 근본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나는 며칠 전 한 기독교인과 법리에 대해 토론했는데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는 그 때 토론을 거쳐 그녀를 계발하려고 했는데 그녀는 한편으로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바로 <<성경>> 중의 관련된 부분을 찾아 펼쳐 보였다. 나는 속으로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비록 그녀는 아직 대법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한 문(門)에서는 합격이였다. 나는 <<전법륜>>을 외울 수 있는가? 나는 마치 얻고 싶은 물건을 얻었으나 진정으로 장악하고 소유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법을 외운 이야기”에서 동수는 이렇게 썼다. “나는 동수들이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았는지 모르겠다. 만약 정법과 수련이 끝나는 그 날이 있다면 우리가 법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도 끝날 때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루 배우면 하루 적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동수들이 정력과 생각을 모두 불필요한 데 쓰는 것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러 여기 왔는지, 가장 아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명의 가장 크고 근본적인 행복은 도대체 무엇인지 정말 반복적으로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한 단락을 읽고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점화하여 주신다는 것을 깨닫고 법을 외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막상 외우기 시작하니 즉시 산처럼 큰 어려움이 가로막고 있음을 느꼈다. 법공부를 이렇게 오랫동안 하면서 <<전법륜>>을 몇 백번도 더 읽었지만 지금도 읽은 글자들은 머리 속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사라져 버려 항상 머리 속에 담아 넣었다는 느낌이 없었다. 이전에는 이런 느낌을 대법이 가없이 넓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법을 외워 봤지만 그런 느낌은 여전했고 어떻게 해도 외워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한 번 또 한 번 반복하여 읽었는데 아주 짧은 한 단락을 열 몇번 읽어도 아무런 인상이 없는 때가 있어 한동안 정말 매우 어려웠다.

나는 이는 속인들이 말하는 무슨 기억력이 좋고 나쁜 문제가 아니라 수련 중의 문제이며 내가 반드시 넘어가야 할 한 관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인 수련 과정에 줄곧 나를 괴롭히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꿈 속에서의 나와 깨어 있을 때의 나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는 꿈 속에서 한 번도 수련인처럼 행동한 적이 없었다. 어느 것이 진실한 나일까? 꿈으로부터 한 사람이 착실하게 잘 수련했는지 여부를 보아 낼 수 있다. 잘 생각해 보니 깨어 있을 때 내가 한 많은 일들과 생각한 많은 문제들도 수련인이 마땅히 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많은 경우에는 일이 지난 뒤에야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데 애초의 첫 일념마저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법공부를 잘 하지 못한 것이 내가 법을 외우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름길은 없는바 노력하여 외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겨우 한 번 외웠지만 다시 외워보라고 하면 나는 여전히 조금도 외우지 못한다. 그러나 법을 외우는 과정에서 나는 정말 많은 제고를 가져왔으며 나의 기억 속에 남겨진 법의 흔적이 더 깊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칼로 돌에 글을 새기는 것처럼 한 번 또 한 번 그렇게 견지해 나간다면 반드시 기억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내가 집착심들을 닦아 없앤 후에는 더 쉽게 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자신이 수련인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법을 외우는 동시에 주의식을 강화하는 훈련을 했는데 틈만 나면 마음 속으로 “나는 파룬따파 쩐싼런(眞善忍)을 수련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홍지 사부님의 정법제자이다.”라고 묵념했다. 자전거를 타고 갈 때나 직장에서의 휴식시간에나 할 것 없이 늘 이렇게 자신을 일깨웠다. 처음에는 좀 이상했지만 짬만 있으면 묵념하면서 반복하여 강화한 결과 서서히 이 말이 점차 나의 몸에 용해되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문제에 부딪치면 먼저 자신은 수련인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공력을 들여 법을 외우는 것은 우리의 제고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동수들도 조건이 되면 모두 시도해 보기 바란다. 우리의 수련이 미시적인데로부터 표면으로 돌파함에 따라 우리 사람 이 표면도 나중에는 법을 외울 수 있을 것이다. 법을 외울 때 나는 사부님의 설법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는데 이전에 가볍게 지나쳤던 법리도 그 배후에 있는 내포를 깨달을 수 있었고 동시에 나 자신의 수련에 대한 지도 작용도 갈수록 선명해 졌다. 예를 들면, 매일 아침 가부좌할 때 많은 경우에는 그날 해야 할 일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면서 조용해 질 수 없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가부좌 상태, “마치 달걀 껍질 속에 앉아 있는 것처럼 미묘하고 아주 편안한 느낌이다.”(<<전법륜>>)를 외우고 이 구절을 떠올리기만 하면 매우 쉽게 그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난 번 베를린 법회 때 나는 한 이스라엘 제자와 함께 <<전법륜>> 제 9강을 읽었는데 그녀는 읽다가 눈물을 흘리던 일이 기억난다. 나도 사부님의 기타 경문을 읽을 때 눈물을 흘린 적이 있지만 <<전법륜>>을 읽을 때는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법을 외우는 과정에 나는 반복하여 읽다가 어느 하루 문득 사부님의 자비를 깊이 느끼면서 눈물이 샘처럼 솟아 올랐다. 그렇다, 사부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없고 대법이 없어도 모든 것이 없다. 우리 새로운 생명은 전적으로 대법에 의해 육성되는데 우리가 어찌 법공부를 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법은 마치 하나의 다리와 같은바 우리가 낡은 우주에서 새로운 우주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대법이다. 대법을 통해서 만이 우리는 피안으로 구도되어 갈 수 있고 우리 신체의 매 한 미시적인 구조도 모두 법을 통해 금강불괴지체로 연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매일 하는 법공부는 양식과 공기처럼 필수적인 것이다. 점차 나도 법공부를 하는 그런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었다.

법을 외우면서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는데 바로 <<전법륜>>은 “살아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느 한 부분을 외우고 있으면 사부님께서는 나의 생활속에 일부 일들을 배치하여 내가 정말 이해했는지 고험하셨다. 유감스러운 것은 나는 몇 번이나 모두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내가 “수구(修口)”를 외울 때였다. 그 때는 바로 4월 25일이었는데 우리는 외지에 진상하러 가게 되었다. 가는 길에 차 안에서 한 동수는 한 가지 일을 말하면서 화를 냈는데 나는 그가 틀렸다고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그를 미워하면서 극단적인 말로 그와 맞섰다. 그 결과 우리가 탄 차는 길을 잘못 들어 섰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계속 그 동수와 얘기했는데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차는 검은 연기를 뿜었으며 핸들에 고장이 생겨 더 갈 수 없었다. 나는 주저앉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자신이 말한 말이 이렇게 큰 효과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며 이러한 “현세현보”를 체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 깨달은 것은, 법공부는 시간이 길고 짧은 것이 문제가 아니며 어떤 심태로 하는가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대법서적을 사부님의 법신으로 삼고 존경하며 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을 때처럼 경건하다면 효과가 좋지만 만약 임무를 완성하는 것처럼 한다면 하지 않은 것과 같게 된다.

작은 체험을 써냈는데 더 많은 동수들이 시간이 긴박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진정으로 대법제자로 된 행복을 체험하길 바란다. 사실 법공부보다 더 유쾌한 일은 없다.

문장발표: 2004년 5월 12일
문장분류: 정법수련>법공부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4/5/12/271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