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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간(副刊) 작업 과정에서의 깨달음

부간(副刊) 작업 과정에서의 깨달음

작가:대만대법제자

【정견망 2006년 12월 17일】

1. 부간(副刊) 작업과 중생구도

대기원 부간(역주:부간은 주로 매체의 문화면과 같이 직접적으로 시사적인 내용이나 진상을 알리는 내용은 아니지만 매체를 부각시키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현재 중문 대기원 부간에는 문화, 역사, 세계풍경, 생활, 음식, 의료, 유학, 교육, 이민, 문학, 예술, 인물탐방, 장편연재물 등이 있다.) 문장은 한편으로는 매체의 양념이자 매체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진상내용에 접근할 보다 많은 기회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 역시 법을 실증하는 것이자 중생을 구도하는 일부분이다.

사부님께서는 《미술창작연구회의에서의 설법》 중에서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나를 따라 중생을 구원하러 왔으며, 동시에 우리가 중생을 구원하는 의의 중에는 인류의 도덕을 구원함과 구원된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미래에 존재하고 어떻게 생활하며 어떠한 상태에서 생활하는가도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대법제자는 비단 중생을 구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의 중생에게 사람이 생존하는 진정한 한 갈래의 길을 개척해주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수의 수련이 잘된 그 일면과 수련성취 된 신의 일면이 표현되어 나온 문장은 그것 역시 중생을 구도하는 법기(法器)이다. 왜냐하면 부간 문장은 바로 문학, 예술, 음식, 의상, 주거, 여행, 교육, 오락 등 각 방면 문화영역의 주제와 사람의 생활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미래 인류에게 “앞으로 어떻게 미래에 존재하고 어떻게 생활하며 어떠한 상태에서 생활하는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법에 동화된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가 써낸 문장도 보다 정확하게 미래 인류의 바른 길을 가리킬 것이다.

2. 후천적인 사람의 관념을 씻다
내가 또 체험한 것이 있다면 부간 문장을 쓰는 것도 법을 실증하는 다른 항목과 마찬가지로 역시 수련이라는 것이다.

“내가 당신들더러 하라는 것도 모두 다른 사람과 미래의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남겨주라고 하는 것만이 아니며, 당신들 자신의 수련(修煉)에 대하여 도움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모두 이 사회 환경 속에서 생활하며 또한 이 시대로부터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 사람의 관념은 바로 이러한바, 모두 큰 염색독 중에 있는데, 우리 이런 특수한 기능이 있는 이들은 틀림없이 이 방면에서 받은 영향이 다른 사람보다 클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창작하는 중에서 바른 길로 되돌아 걸어오는 과정이 자신을 씻고(洗刷)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술상에서 자신을 되돌아 승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본질상·관념상에서 자신을 개변시키는데 자신을 수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미술창작연구회의에서의 설법》

내가 인식하기에 미술창작 중에서 “본질상·관념상” 법으로 자신이 바른 길로 되돌아 걸어오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면 음악창작이나 문장을 쓰는 등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사진, 웹 페이지, 지면 매체 등을 어떻게 아름답게 할 것인가 하는 이런 것들도 모두 자신의 낡은 관념을 씻는 것으로 모두 자신을 수련하고 있는 것이다.

대법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나는 2년 동안 초서(草書)를 배운 적이 있다. 한 동안 법을 배운 후에 나는 초서를 쓰지 않게 되었고 나는 자신이 한 고비를 넘겼다고 여겼다. 내가 초서를 쓰지 않게 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꿈속에 내 팔을 투시해보니 팔 속이 온통 벌레였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마음속으로나 혹은 손가락에서 시시때때로 자신도 모르게 글씨를 쓰려고 하는데 물론 사람의 그 일면을 방임하는 그런 것들이다. 나는 좋지 않은 그런 것들이 아직도 존재하며 아직 깨끗이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나는 또 끊임없이 법속에서 이런 후천적인 관념들을 씻어버릴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부간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늘 다음과 같은 문제에 봉착하곤 한다. 우리 생활 속에서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속인이 보기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비린내 나고 선동적이고 색정적인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현대파, 초서, 재즈, 동성애 같은 것을 줄 것인가? 이것도 안 된다. 그렇다면 유언비어, 로큰롤, 랩, 미혼모 등을 보도할 것인가? 매 문제마다 모두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본다. 한 수련인의 표준으로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동시에 우리는 속인매체의 형식으로 해야 함을 고려해야 하며 너무 높이 말할 수 없다. 반드시 속인들이 좋아할 내용과 형식으로 그들을 위해 바른 길을 선택하고 바른 문화를 개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끊임없이 수련인의 각도에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 답안을 찾을 때, 특히 동수와 의견이 같지 않을 때, 법에서 교류하면서 공동의 인식을 얻기 위해 노력할 때가 바로 끊임없이 자신의 후천적인 사람의 관념을 제거하는 것으로 바로 착실하고 착실하게 수련하는 것이라는 것을.

3. 법을 외운 체험

이상은 내가 부간 작업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사실 우리가 오직 법을 배우고 법을 얻으며 시시각각 법속에 있기만 하다면 그럼 우리가 하는 매 하나의 일은 부간이라도 좋고 사악을 폭로하는 뉴스라도 좋으며, 전화를 걸어 진상을 알리거나 진상자료를 부치거나, 신당인, 희망의 소리, 대기원 일을 하거나 상관없이 매 항목의 매 하나의 사업이 수련이 아닌 것이 없으며 모두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외에 나는 또 자신이 법을 외운 심득을 교류하고자 한다. 올해 연초(당시 명혜망에 많은 동수들이 법을 외운 심득문장을 발표했다.)에 동수의 격려 하에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매일 대략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들여, 처음에는 하루에 한두 페이지씩 외웠고 몇 달 후에는 매일 2~3페이지를 외웠다. 간혹 외우기 어려운 때를 만날지라도 나는 대부분 하루에 최소 한 단락 외우는 것을 견지했다. 도저히 방법이 없을 때는 일단 넘어간 후 며칠 후 다시 외웠다. 또한 몇 차례 나태하거나 또는 씬씽을 지키지 못하고 화를 내어 한 단락도 외우지 못한 날도 있다.

이제 곧 법을 외운지 1년이 되어가며 또 법을 외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명혜망에 발표된 대부분 동수들의 교류와 비교하면 내가 외운 것은 속도가 아주 느린데 지금까지도 줄곧 이렇다. 나는 이것이 내가 마음을 조용히 할 수 없고 쉽게 정신을 팔기 때문에 속도를 빨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안다. 한 단락 수련을 했음에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는 상황(연공을 포함)에는 그리 큰 변화가 없다. 나는 내가 아직도 수련을 잘한 그런 동수들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비록 이렇긴 하지만 그래도 법을 외운 것이 나의 수련에 촉진작용을 일으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생활 속에서 차를 타고 갈 때면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차가 너무 빠른 것이 아닌가, 빨간 불인데 왜 우회전을 하지 않을까, 원래 차도를 벗어나진 않았는가 등을 생각하곤 했는데 이 방면에서 최근에 큰 진보가 있었다. 그 외에 소파에 앉아서 법학습을 할 때면 갈수록 자세가 흐트러져 엎드려서 책을 본다거나, 자신도 모르게 유행가 가사를 따라한다거나, 예전의 자랑스러운 장면을 회상하는 등등. 이런 것들은 법에서 시시각각 내가 제고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느끼지만 나는 잘하지 못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

또 있다면 바로 동수와 모순에 직면하는 문제이다. 최근 한동안 편집을 맡은 일부 동수들 사이에 모순이 있었다. 몇 차례 교류를 통해 지금은 정말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나는 또한 나에 대해 자비롭게 포용해준 동수들에게 감사드린다) 여전히 일부 모순이 있다. 나는 거의 조금의 진보도 없었고 최근 몇 차례 고험에서 씬씽도 지키지 못했으며 한 번도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잘하지 못한 곳이 있지만 보다 노력하고 보다 냉정해진다면 반드시 변화가 있을 것임을 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법을 외운 것이 나로 하여금 이전보다 법이 내 주변에서 나를 일깨워주고 있다는 것을 더욱 느낄 수 있었으며 일상생활 속의 언행거지에서도 수련인(修煉人)답게 해야 하며 동수와 모순이 있을 때도 좋지 않은 염두가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마음속으로 화를 내거나 억울함을 당할까 회피하거나 동수와 교류하려고 생각하지 않거나 심지어 원망하거나 미워하면서 도피하고 자신이 현재 하는 항목을 방치하기도 하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

이상의 심득교류와 제출한 집착은 내가 깨달은 것으로 내 생각에 분명 자신이 깨닫지 못한 부족점이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런 부족을 보았다면 동수들이 나를 도와 지적해주기 바란다.

발표시간 : 2006년 12월 17일
정견문장: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6/12/17/4139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