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2007년 11월 8일】
*사부님을 찾기까지 힘들었던 길
80년대 기공 열풍이 전국을 휩쓸 당시 나도 이런 기공 열조에 휩쓸렸다. 그 때 나는 장염, 위염, 담낭염, 담결석, 심장질환 등을 앓고 있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성(省)내의 큰 병원은 모두 찾아다녔으며 90년대 초에는 또 북경에 갔다. 유명한 의사도 적지 않게 보았고 약도 많이 복용했으나 병은 조금도 낫지 않았으며 오히려 갈수록 심해져 내내 고통 속에 살았다. 병을 고치고 통증을 해소하기 위해 나는 앞뒤로 몇 가지 기공을 배웠고 어느 새 8,9년이 지났는데 얻은 효과는 미미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신과 부처에 대해 매우 숭배하고 동경해왔다. 그것은 유년시기 모친이 늘 내게 수련하여 신선이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모친은 또 신이 진실하게 존재한다고 알려주셨다. 모친께서는 또 큰 아버지가 젊었을 때 겪은 특이한 일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어느 해 섣달 23일 아침 동이 트기 전의 일이다.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그는 마을 뒤 우물에 가서 물을 긷다가 우물 위에 있던 복숭아를 주어왔다. 집에 돌아와 할머니에게 주면서 자기가 먹겠다고 했더니 할머니는 이것은 선도(仙桃)이니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먹으면 불로장생 하지만 앞으로 낳을 아이가 노소를 분별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큰 아버지는 매우 효심이 깊어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그 선도를 먹지 않았다. 이 선도는 49년 동안 있었지만 상하지 않았으며 말린 복숭아로 있다가 58년 대약진 운동 때 집을 부술 때 행방이 묘연해 졌다 요즘에야 한 겨울에 신선한 복숭아가 있는 것이 그리 큰일이 아니겠지만 예전에는 한겨울에 신선한 복숭아를 시골 우물에서 주웠다고 하면 확실히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아마도 나는 신과 부처에 대해 이런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원래 일부 괴상한 꿈을 잘 꾸었는데 꿈속에 늘 절간에서 거닐고 있었다. 1993년 내가 모(某) 공법을 떠나 고통으로 배회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밤 특수한 꿈을 꾸었다. 나 홀로 어느 장엄하고 웅대하며 위엄 있는 금빛 찬란한 대전(大殿)에 도착했다. 대전은 매우 높았으며 그 안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는데 가부좌를 하거나 서있는 신도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어떤 신이며 이름이 무엇인지 몰랐다. 대전은 매우 길었고 나는 많은 신들을 지나갔는데 이 신들의 형상은 똑똑히 보지 못했으며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들 앞을 하나씩 지나가면서 내 마음은 물같이 고요해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어느 매우 높고 자비로운 불상 앞에 오자 나는 생각지도 않게 두 무릎을 꿇고 그 분을 스승으로 모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 이분이 나의 사부님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 때 큰 부처님 옆에 있던 어느 신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法輪大法를 한권 빌려서 돌아가 배워라.” 그의 말을 듣자 나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한권 사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을 마치자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집안은 매우 어두웠고 아내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불을 켜 보니 새벽 세시인데 나는 비몽사몽간에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나는 또 계속 흐리멍덩한 상태로 다시 잠을 잤다. 깨어보니 이미 한낮이었다. 지난밤 꿈을 돌이켜보니 꿈속의 장면이 너무나 생생하게 눈앞에 전개되었는데 유독 “法輪大法”란 네 글자만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무슨무슨 대법”이라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내 사부님은 불가에 속하시며 불가 수련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사부님을 찾을 수 있고 찾아 뵐 수 있을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나 역시 알 수 없었다.
한번은 모(某) 공의 책임자가 사람을 보내 나를 찾았다. 나더러 이 공법을 계속 배우라고 하기에 나는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이 공을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불가공을 배우려 하는데 사부님을 찾지 못해 “중국 XX공”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당신이 X공을 배우고 싶지 않다면 “파룬궁(法輪功)”을 배워보세요. “파룬궁”은 매우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다른 한편 한 무더기 쌓인 기공잡지에서 “중국기공”을 찾아 뒤져서 “파룬궁”을 소개하는 글을 찾아주었다. 내가 이 잡지를 받아보니 표지에 있는 사부님의 사진과 사부님께서 공법을 시연하시는 사진을 보았을 때 마음속으로 강렬한 진동이 일었다. “이분이 바로 내 사부님이시다. 내가 꿈속에서 본 사부님이시며 내가 수년간 힘들게 찾았던 사부님이시다!” 보고 또 보면서 내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 기공 잡지는 나의 보물이 되었고 나는 파룬궁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잡지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었으며 사부님의 공법 시연 사진을 보고 또 보았으며 사부님의 동작을 따라 끊임없이 흉내냈는데 아무리 해도 어떤 곳은 이해하지 못하여 마음이 매우 급했다. 즉시 사부님 곁으로 뛰어가 사부님께 가르침을 청하고 해설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펜을 들어 파룬궁을 소개한 기자인 주(朱)모모에게 편지를 한통 썼다. 이후 매일 그의 회신을 기다렸으나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시종 답신을 받지 못해 나는 실망하고 아주 고민에 빠졌다.
이왕 사부님을 찾고 내가 가야할 수련의 길을 찾기 위해 나는 다년간 기공 잡지와 기공 신문을 주문해 거의 한자도 빠지지 않고 찾고자 하는 소식을 찾아보았으나 내가 원하는 소식은 한 글자도 없었고 나는 망연자실해 졌다. 일종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느낌에 실의에 빠지고 고통에 잠겼는데 나 자신도 무엇 때문인지 잘 몰랐다.
당시 기공신문에는 늘 중국 XX공을 소개했는데 XX공은 병을 고치는데 신기하다고 했으나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파룬궁이 내가 늘 그리던 공법이라고 느꼈으나 파룬궁과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당시 직장 상사가 내가 기공을 배우는 것을 지지해 기공학습비용을 직장에서 처리해 주었다. 나는 이 기회를 잃지 않으려고 안휘(安徽)성 숙주(宿州)에 가서 어떻게 된 일인가 알아보기로 결정했다.
숙주는 내가 사는 곳에서 천리나 떨어진 곳으로 당시 숙주에 갈 수 있는 직행버스가 없었다. 당시 사회는 아직 혼란하여 외지로 출장하는 사람은 강도를 당하는 일이 많아 속으로 좀 걱정이 되었다. 나는 바깥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차를 타고 수백 리 떨어진 아들의 직장에 갔다. 아들에게 내 계획과 걱정을 말했다. 아들은 내 건강을 위해 내가 기공을 배우는 것을 매우 지지해주었고 숙주로 가는 직행 침대칸 표를 사면 안전문제는 걱정 없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당장 기차표를 사기로 결정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사흘 후면 숙주로 가리라, 나는 중국 모모공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생각하고 하다가 나는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엄중해져서 앉아 있을 수 없었고 자동차 안에서 반쯤 누워 빨리 집에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2백리 길을 아직 반도 가지 못했는데 마치 머리가 갈라지듯 머리가 아팠고 두통 때문에 견딜 수 없을 때 갑자기 나는 그 공을 배울 수 없으며 내가 찾는 공법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나는 속으로 묵묵히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이 생각이 나오자마자 바로 머리가 아프지 않았으며 마침 방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우 신기했다. 집에 돌아와서 즉시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길에서 일어난 일체를 말해주고 숙주로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숙주로 가지 않기로 결정한지 며칠이 안 되어 뜻밖에 주(朱)모모의 회신을 얻었고 사부님께서 전국 각지에서 설법하고 공을 가르치시는 일정을 얻었다. 다년간 기다리며 사부님을 찾으려 했던 일이 실현되려 하기에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1994년 정월 초하루, 사부님께서 산동성 간리(墾利)에서 파룬궁 전수반을 여셨다. 나는 사부님을 뵙고 싶은 절박한 심정을 품고 섣달 그믐날 출발해 간리 전수반에 참가하려 했다. 하지만 온 가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특히 아들은 내가 설도 쇠지 않고 공을 배우러 가려고 한다면서 큰 불만이었다. 가족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나는 포기 하는 수밖에 없었 이 얻기 어려운 기회를 놓쳤다. 사부님의 전수반에 참가하는 시간을 3월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1994년 3월 2일— 3월 12일은 사부님이 하북성 석가장에서 파룬궁 전수반을 여셨다. 원래는 2기를 계획하셨는데 1기는 기공협회에서 독촉했기 때문이고 다른 1기는 시 총공회에서 반을 열었다. 1기가 끝나자 또 이어서 1기를 열었는데 나는 이것이 천재일우의 기회임을 탐지했고 직접 2기 학습반에 참가할 수 있으니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식구들은 사회가 불안정하니 혼자 가는 것은 안심할 수 없다면서 허락하지 않아 같이 갈 사람을 찾으려 하니 또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파룬궁이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 파룬궁을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고 배우려는 사람은 더욱 적어 동반자를 찾기는 매우 힘들었다. 학습반을 여는 날짜가 점점 다가옴에 따라 나는 동반자를 찾지 못해 마음이 타들어갔다. 갖은 고생을 하며 동반자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기공에 대해 그리 열렬하지 않은 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와 함께 가겠다고 하여 나는 매우 기뻤고 식구들도 안심하였다.
3월 1일 나는 행장을 꾸려 북경에 가는 차에 올랐고 흔들거리는 차에서 네 시간이나 걸려 새벽 두 시에 석가장 정거장에 도착했다. 3월 초 북방의 날씨는 매우 추웠고 길거리의 정적은 기이했으며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가끔 몇 대의 자동차가 나는 듯이 질주했으나 길을 물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두 시간을 걸었는데 어느 삼륜 인력거가 뒤에서 오는 것을 보고 기뻐서 가는 곳을 물어보았다. 길을 가르쳐 준 사람에게 작별하고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 10분 후 유화로 6번지에 등록처를 찾았다.
7시 경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학습반에 참가하러 왔고 우리 두 사람은 비교적 일찍 온 편이라 각각 6, 7번을 받았다. 50원 학비를 내자 어떤 사람이 우리를 데리고 석가장 호텔로 데리고 갔다. 사부님의 전수반에 참가하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호텔은 매우 큰 T자 형의 건물인데 학습반을 여는 회의장과 매우 가깝고 동쪽은 석가장 박물관과 광장이 있어 환경이 매우 좋았다. 숙소와 식사를 안배한 후 책임자는 우리에게 8시에 국면 6광의 회의장에서 사부님의 보고를 듣고 저녁에는 국면 2광에서 사부님의 강의를 들으라고 하며 입장권을 나누어 주었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니 갈수록 사부남의 자비로움과 위대함을 느끼게 되며 사부님께서 제자들에 대해 세심하게 보살피시고 관심을 갖고 곳곳에서 보호하고 계신 것을 느낀다.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 사부님께서는 적시에 내게 방향을 점화해 주셨다. 내가 잘못된 기로에 들어가려는 중요한 시점에 사부님께서는 나를 일깨워 주셨고 막아주셨으며 한 걸음씩 법을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다. 내가 동반자가 없어 식구들이 못 가게 할 때도 사부님께서는 제자를 보살펴주셔서 동반자를 얻게 해주셨다. 미혹 중에 사부님께서는 또 우리에게 등록처로 가는 방향을 가르쳐 주셨고 굽은 길을 가지 않고 제 때에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주셨다.
*법을 얻다
그날 1천여 명이 학습반에 등록했는데 대부분 외지에서 왔으며 북경 사람이 가장 많았다. 북경 수련생의 말을 들으니 북경에서 600여 명이 왔는데 그들은 북경에서 이미 여러 차례 학습반을 참가하였으며 현재 북경에는 파룬궁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리 선생님이 어디에서 학습반을 연다는 말만 들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온다고 했다. 사회적인 압력을 경감시키기 위해 사부님께서는 이미 북경에서 더는 학습반을 열지 않으신다고 했다. 그러다 사부님께서 석가장에서 학습반을 연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들은 급히 온 것이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키가 크고 영준한 남자 동수였는데 이야기 도중 사부님께 대한 숭배와 존경, 파룬궁에 대한 독실한 믿음이 스며나왔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매우 기뻤으며 내가 이 천재일우의 기연을 얻게 된 것을 매우 다행으로 여겼다.
3월 2일 7시 40분,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수련생들 앞에 나타나셨다. 어떤 사람은 소근거렸다. “이 분이 바로 리훙쯔 대사님이다.” 사람들은 존경하는 눈빛으로 사부님께서 회의장에 들어오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오랫동안 밤낮으로 뵙고 싶었던 사부님을 오늘 마침내 본 나는 심정이 매우 격동되었고 눈물이 핑 돌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웃을까 봐 힘껏 억제 했으나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고 속으로 묵묵히 말했다. “사부님, 저는 마침내 당신을 만났습니다. 제가 파룬궁을 배우려고 한 것이 마침내 실현되었습니다.” 이 때 나는 불광(佛光)이 널리 비치는 행복에 푹 빠졌으며 이것은 일생 영원히 잊지 못할 행복한 시각이었다.
사부님께서 강단에 오르시자 회의장은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으며 사부님께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신 후에도 회의장에는 또 이어서 끊임없이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님께서 보고를 하실 때 기침소리조자 없었으며 아무도 왔다 갔다 하지 않았고 모두들 정신을 집중해 사부님의 강의를 들었다.
설법 중간에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의 수련을 돕기 위해 진정하게 수련하는 수련생의 신체를 청리해 주셨으며 매 사람마다 자기의 병을 한 가지씩 생각하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회의장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손을 두 번 흔드시고는 수련생들에게 오른발을 구르게 하셨다. 회의장은 순간적으로 거대한 굉음이 울렸고 이 순간 많은 사람의 고질병이 부지불식중에 소실되었다. 이번 설법은 하오 12시에 끝났으며 수련생들은 숭경하는 심정을 품고 서운해 하며 회의장을 천천히 떠났다.
저녁이 되자 사부님께서는 제2 면예당에서 두 시간 동안 설법을 하셨다. 이 법은 내가 태어나서 들어본 적이 없었고 어떤 책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비록 당시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우주대법이라는 것은 몰랐지만 사부님에 대한 존경은 인류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부님의 설법을 듣고 여관에 돌아가자 온몸이 말할 수 없이 괴로웠고 마치 큰 병이 온 것처럼 복통, 현기증, 눈을 뜰 수 없어 씻지도 않고 바로 침상에 누웠는데 그런 고통은 이전에 병원에 입원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약 집에 있었더라면 아마 병원에 입원하였을 것이며 나와 같이 간 사람은 내가 불편한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나를 위로하며 한편으로는 사과를 씻어주며 먹으라고 하였다. 나는 먹을 마음도 없고 먹을 수도 없었는데 확실히 말하면 근본적으로 먹을 생각이 없었다. 비록 내가 괴로웠지만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는데 사부님의 보고 중에 이미 신체정화 과정 중에 어떤 반응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비록 병이 매우 엄중하다고 느꼈지만 견딜 수 있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깨어나니 완전히 사람이 변한 것처럼 온몸이 가볍고 병이 없어 건강한 사람의 행복을 처음으로 경험하였다.
나는 만성 장염, 담낭염, 담결석을 여러 해 동안 앓아서 늘 복통, 설사를 했고 소변에 갈색의 점액이 나왔었다. 때로는 만성 담낭염이 급성으로 발작해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병의 통증을 피하기 위해 평소 생활에서 많이 주의했다. 생것은 못 먹고 찬 것도 안 되며 심지어는 찬 수돗물도 마시지 못하여 생활하는데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학습반을 이틀간 참석하고 나의 신체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공을 배우는 동안 우리는 단체급식을 했는데 매일 십여 전의 생활비로 6인이 한 식탁에서 6가지 채소와 탕 두 그릇인데 그중에는 찬 것도 있었다. 채소가 있어도 먹을 수 없었고 특별히 먹을 수 없는 것은 일부 찬 것과 자극적인 채소였다. 먹으려고 했지만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신체를 정화시켜주신 후 뭐든지 먹을 수 있었으며 그 어떤 불편한 느낌도 없었다. 원래 매일 대변을 4, 5차례나 보고 복통과 설사가 나던 것이 이제는 모두 정상으로 되었다.
학습반은 비록 겨우 9일간(원래 10일로 예정되었는데 하루 앞당겨 끝냈다)이었지만 나의 신체는 건강을 회복하였고 사상도 승화되어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병 없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아마 사부님이 설법하시는 제 6일째 되는 날로 기억하는데 기공협회의 사람이 전체 수련생들이 사부님과 단체 사진을 찍도록 안배했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참가한 사람들을 20개 조로 나누었는데 북경시의 수련생이 제 1조를 이루어 나와 동료는 제 1조에 참가했다. 당시 사진은 석가장 체육관 서쪽에서 찍도록 안배했는데 사부님께서는 순서에 따라 모든 수련생들과 단체 사진을 찍으셨다. 사진을 찍은 후 수련생들은 대부분 현장을 떠나지 않고 여전히 원래 장소에서 바라보았으며 어떤 이는 사부님의 뒤를 따랐다.
나와 장가구 의학원의 어느 수련생, 또 하남에서 온 한 모자와 함께 모두 제 1조에 참가해 사진을 찍었는데 찍은 후 우리는 떠나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 사부님을 따라 제 2조부터 20조까지 가서 최후의 한조가 사부님과 단체 사진을 찍은 후 사부님은 돌아가려고 하셨다. 우리 네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함께 체육관 계단에 서있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사부님과 작은 단체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고 사부님께서 우리 가까이 오실 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박수를 쳤다. 뜻밖에도 사부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 네 명 앞에 서셨고 기공협회의 책임자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수련생이 우리 행렬에 들어와 때맞춰 이 행복한 역사적 시각을 찍어 우리에게 영원한 기념을 남겨주었다.
대자대비하고 위대하신 사존께서는 중생을 보호하시며 인연 있는 모든 사람을 구도하신다. 내가 기억하기에 반을 연지 사흘 째 되는 날, 여관 식당에서 백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나에게 75세라고 하며 중경(重慶)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일부러 사천에는 고인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이 연분은 만나기 어려운 기회다. 자기가 아끼는 것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어떤 노인은 내몽골에서 비행기를 타고 달려왔는데 그는 사부님의 설법반에 여러 번 참가했으나 석가장의 이번 기회를 여전히 놓치지 않았다. 비록 좀 늦은 것을 알았지만 급히 달려왔다. 어떤 사람은 사부님의 설법을 듣고 수련의 길을 걸었으며 어떤 이는 오히려 이 만고의 기연을 아끼지 않는데 그것은 놓친 것이다.”
나와 함께 간 그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학습기간에 모든 수련생은 일찍 단체연공에 참가하여 연공장에는 적지 않은 노수련생이 주동적으로 사람들에게 공법을 가르쳐 주며 시범을 보였는데 모두 이 얻기 어려운 기회를 소중히 여겼으며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유독 나의 동반자는 여관에서 잠을 자며 권해도 듣지 않았다. 학습반이 끝나 직장으로 돌아간 후 그는 수련을 포기했다. 나는 그가 너무 애석하다.
학습반 기간에 사부님께서는 늘 아침 일찍 오고 늦게 가셨으며 나는 정말 사부님께 다가가 몇 마디 말을 하고 싶었고 “안녕하십니까!” 하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저 약간 떨어져서 사부님을 바라보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각을 누렸다.
한번은 사부님의 설법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데 내 옆에 앉아 있던 하남에서 온 온(温)씨 성을 가진 동수가 말하기를, 그는 많은 기공반을 참가했는데 그 기공사들은 모두 바른 길이 아니며 그들은 그저 돈만 뺏으려고 한다. 특히 ××공은 속임수이며 조금의 도덕도 없다고 했다. 그는 매우 화를 내면서 그 기공사가 나쁜 일을(덕을 잃는 일) 적지 않게 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나는 활연대오했다. 내가 왜 그 사람을 찾을 수 없었는지, 왜 숙주에 가려고 하면 두통이 났는지. 이것은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나를 찾아 보호하시며 기로에 빠져들지 않게 하시며 한 갈래 금광 대도를 가르쳐 주신 것이었다. 이런 것들을 기억할 때 마다 나는 만분 감격하며 사부님에게 감격의 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학습반이 끝나려 할 때 사부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모두 심득체험을 쓰라고 하시면서 직접 보시겠다고 했다. 나는 당시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 몰랐고 머릿속에 단지 몇 마디 순구류(順口溜)가 떠올랐는데 기억나는 대로 써보면 아래와 같다.
공을 배움
5년이나 기공을 배워도 망연하여 아는 바 없다가
고통 중에 배회하면서 찾아다니지 않은 곳 없었네. 석문에서 우연히 은사님을 뵈니
파룬은 대법이라 오묘한 도의 현기(玄機)이네
뜻을 세워 힘들게 수련하노니 원만은 돌아갈 때이라.
1994년 3월 8일
* 홍법
석가장에서 고향에 돌아온 후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신체는 건강을 회복했고 얼굴은 붉그스레 하게 변했으며 일을 해도 힘들지 않았다. 인생관도 근본적으로 바뀌어 명리를 그리 중하게 보지 않았다. 친구들은 나의 변화를 보고 신기하게 느꼈다. 내가 그들에게 원인을 말했을 때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놀랐고 어떤 사람들은 반신반의 했으며 어떤 이는 근본적으로 믿지 않았다. 내 말을 믿은 사람들은 나를 따라 파룬궁을 배웠다. 특히 일부 만성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은 곧 연공장의 일원이 되었다. 몇 개월의 연공을 배운 후 그들의 몸에도 모두 기적이 나타났다.
어느 노간부가 일찍이 심근경색을 앓았는데 병원에 수개월 입원하여 생명은 잠시 연장했지만 혼자 생활할 능력을 잃어 화장실조차 아내의 부축이 필요했고 앉아 있어도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했다. 때문에 약은 그의 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었으며 매일 각종 약을 잔뜩 먹었는데 무슨 활혈거어약, 심장기능 강화제, 혈관연화제 등등 이었다. 이렇게 해도 병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고 갈수록 나빠졌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 의사는 그의 심장 벽에 괴사한 병소가 있어 회복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집에 돌아가서 잘 쉬고 때맞춰 약을 먹되 화를 내지 말라고 했다.
의사의 말을 듣고 그는 이전처럼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괴로웠으며 사상적인 부담이 매우 심했다. 이 사람은 나와 다른 직장에 있지만 거리가 매우 가까워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파룬궁을 배워 건강을 회복한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실오라기만한 희망이 일어나 파룬궁을 배우고자 했다. 나는 이것을 알고 그의 집에 가서 파룬궁을 소개해주고 <중국 법륜공>책을 한권 주었다. 이때부터 그는 연공을 시작해 집에서 아내와 함께 연공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좋은 변화가 나타났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이 감소했으며 힘이 증가했다. 그는 매우 기뻐하며 신체의 상황을 내게 이야기하면서 우리 연공장에 나와 연공하겠다고 했다.
이때부터 그는 우리 연공장의 일원이 되어 신체가 좋아지고 약도 적게 먹으며 연공을 3개월 했을 때는 한 가지 약만 먹었다. 한번은 연공이 끝난 후 내게 물었다. “나는 지금 가슴 아픈 것이 사라지고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약을 전부 끊어도 되지 않을까요?” 이때부터 그는 다시는 아무 약도 먹지 않았다. 또 몇 개월이 지나자 기적이 나타났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이 그들 돌보아야 했으나 돌볼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삼륜차를 타고 아내와 손자를 데리고 시장에 가서 채소를 사며 친구들을 방문하였다.
연공을 시작한 후 이 공우(功友)의 변화는 뉴스처럼 우리 이 작은 지역에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배우려 했다. 연공하러 오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져 2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마당에 매일 새벽에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빽빽했다. 신성하고 즐거운 연공음악 소리가 울릴 때면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한 줄로 서서 음악의 선율과 구령에 따라 가지런히 진지하게 동작을 하였다. 연공장에 연공하러 오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병든 사람이었고 또 일부 건강한 젊은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파룬궁이 좋다고 느껴 연공하러 온 것이다.
수개월의 수련을 통하여 사람들은 모두 파룬궁에 대해 깊은 취미가 생겼으며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친척, 친구 이웃을 통해 서로 전해져서 하나가 열 명에게 전하고 열 명이 백 명에게 전했다. 파룬궁은 마치 한 가닥 따뜻하고 강렬한 춘풍처럼 시의 온 거리, 골목에 퍼졌다. 곧 적지 않은 길거리나 공터에도 역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적지 않은 신수련생이 연공을 통하여 파룬따파의 신기한 효과를 체험하여 사존에게 무한한 경앙과 직접 만나 사존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사부님의 전수반에 참가하기를 갈망했다.
* 끝없는 불법 속에 잠기다
1994년 6월 2일부터 12일까지 사부님께서는 제남(濟南)에서 전수반을 여셨다. 우리는 먼저 이 소식을 듣고 제남 2차 학습반에 참가하려는 동수들은 제남의 책임자에게 표를 예약하였다.
6월 1일 우리 일행은 차를 타고 제남에 도착했다. 당시 제남은 도로 공사 중이라 제남으로 가는 승객들은 모두 동부터미널에서 하차해야 했다. 하차 후 우리는 어떻게 그곳에 가야할지 몰라 길을 물어볼 사람을 찾으려고 했는데 마침 중형 마이크로 버스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그 버스를 타고 국면 6광 초대소에 도착했을 때 뜻밖에도 북경 동수들이 이미 초대소에 머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석가장에서 법을 배울 때 이미 함께 지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매우 기뻐했으며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사부님께서는 황정(黄庭)체육관에서 설법하셨는데 국면 6광 초대소와 황정 체육관의 거리는 수십 리 가량 되었다. 비록 길이 멀긴 했지만 초대소 버스가 학습반을 여는 열흘 동안 매일 데려다 주어 매우 편리했다. 이런 작은 일을 통해 볼 때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돌봐주심을 알 수 있었다.
6월은 한창 더운 여름이었고 제남은 또 덥기로 유명한 곳이라 고온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번에는 학습반에 참가한 사람들이 매우 많아 4천여 명이 체육관에 물샐 틈 없이 가득 차 있었다. 늦게 간 사람들은 체육관 바닥에 앉아야 했다. 체육관에는 에어컨 설비가 없었고 그저 몇 개의 작은 선풍기만 공중에 달려 있었는데 별 작용을 하진 못했다. 뜨거운 기온에다 사람들의 몸에서 발산하는 열기는 정말 불난데 기름을 끼얹는 것 같았다. 만약 보통 사람이 그런 계절에 그런 대형 회의를 소집한다면 열흘은 말할 것도 없고 단 하루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견지해나갔으며 한 사람도 늦거나 일찍 가지 않고 더욱이 한 사람도 결석하지 않았다.
매번 사부님께서 강단에 나타나실 때면 회의장에는 즉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실 때 회의장은 기이하게 조용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숨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전부 정신을 집중해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다. 고심한 대법의 오묘한 우주 법리는 매 사람의 심령을 진감시켰으며 사람의 사상과 관념을 조용히 바꾸었다. 사람들은 사부님의 법을 듣는 외에 마음속으로 아무런 잡념이 없었으며 담배 애호가들도 담배를 피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회의장에서 누구도 더워서 견디기 어려운 느낌이 없었으며 그저 소수의 사람이 습관적으로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연공인이 이런 고통도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고통을 겪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부채를 부치던 사람들은 즉시 부채를 거두었다. 그 후 사람들은 한 가닥 시원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옴을 느꼈다. 이 미풍이 불 때 나는 아주 편안하고 시원함을 느꼈는데 당시 나는 체육관에 에어컨이 있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체육관에는 에어컨 시설이 전혀 없었다.
사부님께서 제남에서 법을 전하시는 동안 내가 평생 잊지 못할 일이 또 발생했다. 6월은 산동의 우기(雨期)인데 제남도 예외가 아니어서 열흘 전법기간동안 많은 비가 내렸다. 이번에 비는 모두 사부님께서 설법하실 때만 내렸고 사부님의 강의가 끝나 사람들이 회의장을 나갈 때면 곧 비가 멎거나 좀 드문드문해졌으며 수련생들은 비에 젖지 않았다. 당시 나는 사부님의 자비롭고 신성하며 위대함을 느꼈으며 파룬궁은 결코 일반적인 기공이 아니고 사부님의 법력이 끝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사람들에게 신체를 정화해 주시려고 석가장과 마찬가지로 매 수련생마다 자기의 병을 한 가지씩 생각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부님께서 오른 손을 뻗어 체육관 주위를 두 번 휘두르시고 사람들에게 오른발을 구르라고 하자 발을 구르는 그 순간 많은 사람의 만성병이 즉시 사라지고 신체가 건강하게 되었다. 나와 같이 갔던 동수 중에 이씨 성을 가진 한 동수가 만성 위염을 앓아 오래 치료해도 치료하지 못했으나 이번에 철저히 건강을 회복했다. 전에는 국수도 먹지 못했고 먹으면 배가 아파 설사를 했지만 사부님께서 신체를 정화해 주신 후 그녀는 무엇을 먹어도 반응이 없어 아주 기뻐한다.
또 한 동수는 술을 마시는 버릇이 있었는데 하루 세끼 술이 없으면 안 되었고 이 때문에 아내와 늘 다투었는데 친구들이 권해도 소용이 없었다. 사부님의 설법을 듣고 나서 그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으며 신체에도 변화가 있었다. 부부 사이에 화목해졌고 그의 아내는 늘 사부님 덕분에 남편이 술 중독을 고쳤다고 했다.
대자대비 하신 사존께서는 우리에게 우주대법을 말씀해주셨을 뿐 만 아니라 심령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위사위아(爲私爲我)한 사람 마음을 개변시켜 주셨으며 작은 일까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돌봐 주셨다. 제남 제2차 학습반이 끝난 후 사부님께서는 이어서 대련에서 학습반을 열고자 하셨다. 제남 학습반이 끝나는 날 저녁에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일 비행기로 대련에 파룬궁 학습을 참가하려는 수련생들은 비행기를 타지 말고 모두 기차를 타세요.” 어떤 수련생은 사존께 광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련으로 가려 하는데 역시 기차로 갈아타야 하는지 물었다. 사부님께서는 “제남에만 국한된다”고 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남에서는 다음 날 폭우가 내려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이런 작은 일까지도 수련생을 생각하셨으니 정말 대자대비하시다.
사부님께서는 이처럼 대자대비 하셨지만 또 매우 친근하여 다가가기가 쉬웠다. 사부님과 단체 사진을 찍으려고 안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체육관 대문 앞에 밀쳤다. 사부님과 사진을 찍는 장소가 워낙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가 되자 사진사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매우 조급했다. 사부님께서는 어려움을 생각지 않으시고 몸소 안배하시어 사람들과 한조씩 단체 사진을 찍었다. 북경에서 온 동수들은 제 1조에서 사부님과 사진을 찍도록 안배했는데 우리도 그중의 일원으로 제 1조에서 사진을 두 번 찍었다. 그중 한 장에는 사부님께서 사람들을 지휘하시는 자세를 볼 수 있다. 위대하신 사존께서 몸소 4천여 명의 많은 사람들을 지휘해 조직하고 순서 있게 사진을 다 찍었는데 이는 정말 기적이었다.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우주대법의 법리와 어떻게 수련하는가 하는 것 외에 직접 우리에게 동작을 시범보여 주셨으며 친히 다섯 가지 공법을 하는 요령을 가르쳐주셨고 수련생들이 연습할 때면 사부님은 계속하여 순시하며 매 수련생을 보아주셨다. 체육관은 매우 커서 아래위 두층이었는데 사부님께서는 끊임없이 일층의 수련생을 지도하고 교정하신 후에 또 이층으로 올라가 세심하게 관찰하셨다. 나와 함께 간 동수는 파룬을 밀어 돌릴 때 반대로 돌렸는데 그녀 옆에 있는 나도 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사부님께서 발견하셨다. 사부님께서는 강단에서 그 동수를 지적하시며 손으로 동작을 교정해주셨다. 이 동수는 사부님께서 자기를 지적했지만 오히려 반응이 없었고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앞에 있던 어느 북경 동수가 몸을 돌려 그녀에게 “사부님께서 당신의 동작을 교정하신다”고 말해 주자 비로소 자신을 지적하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북경 동수가 그녀의 동작을 고쳐주는 것을 보고서 사부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셨고 비로소 다른 수련생에게 눈길을 돌리셨다.
열흘, 불과 짧은 열흘이었지만 매 수련생의 마음에는 모두 아름다운 기억을 남겼으며 대자대비하고 위대하신 사존의 일언일행(一言一行)은 모두 매 한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사부님께서는 우주대법의 법리로 매 하나의 진수제자에게 견실한 기초를 닦아주셨고 우리가 하나하나의 난관을 지나갈 수 있도록 지도해주셨다. 특히 7.20 이후 대법제자들이 우주법리로 정사(正邪)를 분별하고 거짓을 알고 독해를 피해 잔혹한 박해 하에서도 한 차례 한 차례 걸어 나와 정법시기 진수제자가 되어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해 끊임없이 자신의 과위를 원만하며 사전의 홍원(洪願)을 실행하도록 하셨다.
다시 한 번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존께 감사를 드린다!
(명혜망에서 전재)
발표시간 : 2007년 11월 8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7/11/8/492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