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2007년 11월 25일】
대륙대법제자 심득교류회에 다시 참가할 수 있게 되어 정말 영광이다. 이번에 법회 투고를 준비하려고 생각할 때 내심 순간적으로 신성(神聖)함이 충만했다. 8년간 법을 실증하면서 우리 매 사람은 모두 아주 많은 느낌이 있다. 이 소중한 기회를 빌어 정법수련 심득을 써내어 동수들과 나누고 우리가 함께 걸어가는 길을 소중히 하도록 하자.
1. 명혜망에 투고하면서 승화
대략 2002년 말 나는 시험적으로 명혜망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명혜망에 우리 지역 박해 소식을 보냈고 몇 차례 투고하자 어떻게 명혜망 투고를 잘할 수 있는지 자신감이 생겼다. 나중에 신변에 발생한 일부 일에 대한 소감이 있어 한편의 법리교류 문장을 명혜망에 보냈다. 이 문장은 곧 발표되었고 또 명혜주간에 게재되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겠지만 처음 심득을 쓴 내게 있어 이것은 아주 큰 감동이었다. 나는 이것이 사부님의 격려임을 알고 더욱 신심이 증강되었으며 또한 원고를 투고해 법을 실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한 단락 시간마다 나는 문장을 써서 명혜망에 보냈는데 대개 주변에서 발생한 일에 대한 나의 느낌과 나의 인식이었다. 이렇게 한 목적은 보다 많은 동수들이 교류하여 상호 제고를 촉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사람 중에서 수련하므로 사람의 집착은 때때로 우리 생활에 반영되며 설사 대법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집착심이 있으며 작용을 일으킨다. 실제로 한차례 씩 글을 쓰는 것 역시 점차 후천적으로 형성된 나의 각종 집착심을 버리는 과정이었다. 매번 이 한 가지 마음을 버리면 자신은 늘 끝없는 대법 중에서 승화되었다. 예를 들어, 내 글은 대부분 명혜망에 발표되었고 주간에 올라온 글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과시심과 구하고자 하는 마음, 친정에 집착하는 것 등이 모두 폭로되어 나왔다. 가장 뚜렷한 것은 처음 내 글이 발표되었을 때 나는 모친이 내가 쓴 것임을 알아줬으면 했고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것은 정이며 과시심이 아닌가? 너는 자신을 실증하는가 아니면 대법을 실증하는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모친에게 알리려는 염두를 지워버렸고 암암리에 이런 집착심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동시에 투고하는 문장이 기술류, 소식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법 중 어느 사건에 대해 이성적으로 인식한 문장이라 비록 처음 생각은 문장을 쓰는 것을 빌어 정체 제고를 하려는 것이고 정법 중 대법제자에게 나타난 부정확한 인식을 깨우치려는 것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문장이 점차 발표되자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이 점점 더 노출되어 나왔다. 주로 자신의 인식이 매우 옳고 이성이 강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문장을 보낼 때는 비록 100% 자신은 없었지만 적어도 90%는 내 글이 반드시 발표되리라 여겼다. 이 얼마나 강한 자아에 대한 집착인가? 그러나 나는 내내 인식하지 못했다. 올해 한 동안 연달아 몇 편의 글을 보냈음에도 명혜망에 발표되지 않았다. 비록 몇 주 후에 발표되긴 했지만 많이 수정되어 있었다. 전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 나는 자신을 반성하면서 이것이 나의 심성에 문제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찾아보았다. 그 한 단락 시간 내가 보낸 글들은 모두 지금 어떻게 진상을 잘할 것인가에 관한 것으로 시사적인 문장들이라 상식에 따른다면 마땅히 발표되었어야 했다.
나중에 끊임없이 법공부를 하고 명혜망 문장을 읽는 중 나는 자신과 동수와의 차이를 보았고 내가 뒤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세 가지 일을 하긴 했지만 충분히 마음을 쓰지 못했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으며 법리적인 인식도 자연히 따라가지 못했다. 단지 자신이 인식한 것이 비교적 좋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그럼 왜 이런 결과가 야기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집착심이 조성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눈을 가리는 것처럼 방향을 잃게 했고 단지 자신의 주변에서 맴돌게 했으며 마음을 협애하게 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진보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점을 인식했을 때 정말 두려웠다. 정법노정을 따라가지 못했고 아득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 때 발표되지 않은 나의 글을 다시 생각해보고 명혜주간에 나온 유사한 문제에 대한 동수의 인식을 대조해보니 확실히 자신과 차이가 많이 났으며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이 정진하지 못해 조성된 것이다.
나는 동수들이 매번 교육수준이나 후천적인 관념의 장애로 인해 명혜망에 투고하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매우 유감스러웠다. 더욱이 이런 대형 교류회는 얻기 힘든 기회인데 참여하지 않는다면 손실이 아닌가. 내 자신이 글을 쓴 체험으로 보아 글을 쓰는 과정은 붓으로 대법을 실증하는 것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제고도 그 속에 녹아들어 있다. 나는 교육수준이 높진 않지만 이 몇 년간 명혜망에 투고하는 과정에 후천관념이 제거되는 것을 깊이 느꼈으며 사부님께서 나의 지혜를 점점 열어주셔서 마음의 용량이 커지고 번티가 승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 투고할 때는 한편의 글을 쓰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음에도 말하고자 하는 것을 똑똑히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조금씩 유창하게 마음속 생각을 써낼 수 있음을 느꼈다. 의사표현을 비교적 뚜렷하게 할 수 있게 되었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 늘 단숨에 완성할 수 있었다. 또 매번 써 내는 과정에 이런 집착, 저런 생각이 모두 나왔으며 쓰는 과정 중에 이런 집착심을 버려 그것들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게 했다. 동시에 나는 자신이 순정한 심태로 글을 완성한 후 발정념할 때 매 하나의 세포가 진동하는 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에너지는 정말이지 매우 강했다. 더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과정 중에 마음의 용량이 끊임없이 커져 자연히 자신을 전체에 용입시켜 대법제자의 사명을 실현할 수 있게 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동수들이 모두 펜을 들고 이 만고의 기회를 소중히 여겨 자신의 수련심득을 써내어 미래 역사에 남기는 견증으로 삼았으면 한다.
2. “능력”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다
몇 년 동안 나는 우리 지역에서 자료점 일을 맡았다. 전에는 이 방면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기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경험 있는 동수에게 묻기도 했고 대부분 시간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 연구하고 실천하며 배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존께서 나의 지혜를 열어주신 것이며 효율적으로 그런 것들을 장악하게 하신 것인데 왜냐하면 나는 원래부터 총명한 사람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비교적 겸허했고 자신이 어떠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법을 실증하는 항목을 맡는 일이 늘어나고 또 약간 성과가 나오자 나는 속인의 표면적인 능력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느꼈다. 이런 마음은 나타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이는 사람 표면의 가상을 중시하고 문제에 봉착했을 때 사람의 기술과 방법으로 해결하게 했으며 법에서 문제가 발생한 배후의 원인을 생각하지 않게 했다.
“능력”에 대한 집착은 나로 하여금 갈수록 담이 커지게 했으며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느껴 무엇이든 감히 시도하게 했다. 가장 뚜렷한 것은 기계를 수리하는데서 드러났다. 기계를 수리하자면 그것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해야 하는데 만약 잘 모른다면 기계를 상하게 하거나 심하면 파손시킬 수 있다. 나는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오랜 동안 예전처럼 기계고장이 생겼을 때 우선 심성에서 찾거나 정념으로 사악의 교란을 배제하지 않았고 사람의 인식에 머물러 기계가 일으킨 고장이므로 수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펜치나 드라이버를 가져와 분해하여 고쳤다.
종종 많은 시간을 소모했음에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기계를 크게 손상시키진 않았지만 이런 행위는 이미 법에 있지 않았다. 내가 마음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법공부하며 이 표면적인 현상을 중요하게 보지 않았을 때 머릿속에 갑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떠올랐다. 사실 사부님의 점화였는데 문제는 매우 빨리 해결되었다.
내 주변에는 속인의 각도에서 보자면 확실히 매우 능력 있는 동수들이 있는데 정말 뭐든지 다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 중에서 나도 자연히 그중에 포함시켜 스스로 좀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문제에 봉착했을 때 능력으로 해결하려 했으며 해결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어 했다. 나중에 사존의 여러 차례 점화를 통해 내 생각에 본래 속인의 표면적인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긴 일이 해결될 수 없어 아득해졌고 이 때에야 비로소 문득 크게 깨달았다. 사람 표면의 능력을 중시하는 것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사실 사람의 일체는 신이 부여한 것이며 능력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신이 지혜를 주면 총명해지고 신이 지혜를 막으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단지 늘 겸손한 태도를 지니고 신에 대한 경외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심태이다. 더욱이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우리의 일체는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고 우리 사람의 능력은 우리가 사람을 구하는데 편리하게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 우리가 그것을 일종의 자본으로 삼아 우쭐거리며 자신을 실증한다면 우리는 법을 어디에 두었는가? 자아를 내려놓자, 자아를 내려놓자, 이것은 내가 늘 자신을 경계하는 말이지만 아직도 때때로 나를 실증하고 있다. 내가 본질적으로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새로운 우주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나”를 내려놓지 못하면서 또 어떻게 사람을 잘 구할 수 있겠는가?
2007년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 VCD를 본 후 나는 감동이 매우 깊었다. 사존께서는 자아를 내려놓고 자기를 실증하는 집착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매우 장시간 설법하셨다. 동수 간에 협조하지 못하고 대법 일에 협조를 잘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이 자아가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모두 자신이 능력이 있고 자기 생각대로 하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법 속에 있지 않으면 흔히 결과는 좋지 않으며 대법을 실증하는 일에 영향을 준다. 사존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표면적으로 법을 위한 환경이 좋은가 나쁜가는 관건이 아니며 관건은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 없는가, 자기를 실증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을 실증한다면 하는 과정 중에 기적이 출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원말씀은 아니고 내가 이해한 대략적인 뜻이다)
이 단락의 설법은 능력에 대한 나의 집착을 많이 내려놓게 했으며 “수련은 자신에게 달려있고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는 말의 내포를 더욱 깊이 깨닫게 했다.
3. 자아를 내려놓고 자비를 닦아내다
이 몇 년간 법을 실증하다보니 나는 많은 동수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각기 장점이 있어 법을 실증하는데 많은 작용을 발휘했다. 그러나 인류의 이런 대 오염 속에서 수련하므로 우리는 때때로 정진하는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데 조금만 나태하고 방임하면 곧 사악이 틈을 타게 되고 천천히 우리의 집착을 증가하게 만들어 사람 속에서 망치게 한다. 내가 아는 동수 중 어떤 사람은 근 2년 동안 천천히 수련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속인의 집착에 심하게 제어되어 사람 속에 미혹되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나는 정말로 마음이 조급했다. 몇 년 전 그들이 그렇게 순정하게 법을 실증하던 심태와 그런 무사무아하고 법을 제 1위로 놓는 경지를 생각해보니 그들이 정진하지 않는 것이 더욱 마음 아팠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곡히 타이르자, 이것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기회가 있으면 나는 도리 상에서 그들이 반드시 정진하도록 권했다. 비록 표면적으로 내가 동수를 돕는 것 같지만 실제상으로는 이 과정에서 내 심성이 용련 되고 있었다.
그런데 동수와 교류하는 중에 상대방의 말이 늘 나를 건드렸다. 처음에 내 마음에 파동이 일어나 다시는 그 동수와 말을 나누지 않았고 더 이상 그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매번 “영원의 시편”에 나오는 말을 생각했다. “헤어질 때 그들은 서로 당부하기를, 정법이 개시되고 대법이 널리 전할 때 만약 누구라도 아직 사람 중에 미혹되어 있으면 반드시 그를 깨우쳐 주어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 주어야 한다.”
나는 마음 속으로 동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정념이 일어났다. 사실 이것은 바로 사존께서 나의 용량을 증가시킬 기회를 주신 것이다. 사람 속에서 나는 그리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동수가 대법의 아름다움과 대법제자의 선량함을 보여주어 다시 법으로 되돌아올 수 있게 하자면 나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관용할 수 있어야 하며 사람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자비를 수련하여 순진하고 선량한 힘을 구비해야만 비로소 남을 개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사업 중의 어투, 선한 마음(善心), 게다가 도리(道理)는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킬 수 있으나 명령은 영원히 될 수 없다!”(『정진요지』 「청성」)
또 한 동수가 있는데 오랫동안 상태가 좋지 못하여 매우 속인화 되었다. 그에게 권고했던 동수들이 그는 이미 신심을 잃었다고 말했다. 나는 당시 그가 한 일부 일에 대해 몹시 화가 나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 사부님께서 여러 차례 점화해 주시어 나로 하여금 그를 동문제자로 인식하게 하셨다. 우리는 동수가 구세력에 의해 훼멸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으며 나는 응당 그를 끌어당겨야 한다. 최종 결과야 어떻든 적어도 끊임없이 동수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매 하나의 제자도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어찌 동수를 밀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비록 도리는 알지만 실제로 동수를 대할 때 심리적으로 아직도 어려움을 두려워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래서 묵묵히 사부님께 가지를 청했고 제자에게 자비를 부여해주시기를 청했다. 이와 동시에 끊임없이 “자비는 안 좋은 일체를 용해시켜 천지에 봄이 오게 하고 정념은 세상 사람을 구할 수 있도다”(『홍음 2』「법정건곤」) 을 외우며 정념을 증강시켰다.
그 때 한번은 동수와 이야기가 아주 잘 되었고 전체 공간장이 매우 상화했는데 동수도 마성을 내보내지 않았으며 매우 평온했다. 그 본인도 자신의 부족을 보았다. 나는 당시 매우 감동되었으며 불법 자비의 역힘을 깊이 체험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전체 대화 과정에서 모두 사부님께서 제자를 가지해주신 것임을 알았다. 일부 말은 내가 어떻게 그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는데 당시 그런 상화한 심태는 역시 이전에 있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 이후 나는 결심했다. 평소 자신에게 평정한 마음과 상화한 심태를 힘껏 유지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진정으로 자비심을 수련해내야 하는데 이것은 수련인이 반드시 도달해야 할 표준이다.
이렇게 나는 차차 동수와 깊은 교류를 했다. 비록 여러 차례는 아니지만 나는 자신에게 제거하지 못한 많은 집착, 자기 보호, 남에게 죄를 지을까 두려워하는 것, 질책, 관용하지 못하는 마음 등을 절실히 느꼈다. 더욱이 최근 내가 내려놓아야 할 가장 큰 사람마음, 즉 자신을 실증하며 일을 하는데 결과를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했다.
많은 경우 동수와 교류한 후 한동안 동수의 상태가 좀 좋아지면 나로 하여금 결과를 중시하게 하는 마음이 나오게 했다. 그러나 진정하게 사람을 구도하는 것은 법이며 만약 한 수련인이 외부의 영향으로 일시적으로 정진한다면 진정하게 그를 제고하게 할 수 없다. 단지 자신이 끊임없이 법공부하고 마음을 닦으며 시시각각 자기를 수련인으로 여겨야만 비로소 본질적으로 승화되며 그것이 바로 금강부동한 것이다.
나는 내가 권고한 동수가 조금씩 아래로 떨어지고 상태가 반복되는 것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많은 공을 들여 당신들을 도왔고 정말 노파심에서 거듭 충고 했는데 아직도 이런 기연을 아끼지 않으니 나는 헛수고를 한 것이다. 됐다, 나는 성의를 다했으니 모두 당신의 선택이다.” 다른 동수가 그 사람을 도왔음에도 결과가 역시 나와 같은 것을 보고 나는 또 말했다. “됐습니다. 헛일한 걸로 치세요.”
아마 나도 제고해야 했으리라. 그날 내가 동수에게 이 말을 했을 때 돌연 이것은 일의 결과를 구하고 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감당했으니 당신은 응당 잘해야 하고 잘못하면 나는 기쁘지 않은데 상심한다는 이런 뜻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사람을 제도함에 조건을 논하지 않고, 대가를 논하지 않으며, 보수를 따지지 않고, 이름 또한 따지지 않는 것으로, 속인 중의 모범적인 인물보다 훨씬 더 높은데, 이는 완전히 자비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전법륜』)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하는가? 내가 그렇게 많은 정력을 지불했음을 생각했을 때 나의 기점은 사적(私的)인 것으로 자아를 내려놓지 않은 것이다. 사실 우리는 동수가 법에서 갈수록 벌어지는 것을 볼 때 마땅히 동수를 위해 애석해 하고 한 생명이 기연을 잃는 것에 대해 탄식해야 하지만 나는 아직도 우선 자신을 생각했다. 자아에 대한 이런 집착은 정말 너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생활 중에 우리가 접촉하는 사람 중에서 매 하나의 일은 모두 우리가 제고하는 요소가 그 안에 있다. 우리가 끊임없이 안으로 찾기만 하면 자신의 부족을 볼 수 있으며 정법제자가 해야 할 일을 더욱 잘할 수 있다.
4. 정체를 원용하며 정진하여 사람을 구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장할 때까지 사람을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으로 혼자 조용히 지내며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해왔다. 수련 후 많은 동수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이 진솔하고 열정적인 것을 보고는 자연히 나도 닮아갔고 점차 명랑하게 변해갔다. 그 이전처럼 무표정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접촉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예전의 나에 비한 것이지 다른 동수들의 넓은 마음과는 비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법을 실증하는 중에 그것의 부면 작용이 교란하는 작용을 일으켰다.
내가 사람을 접촉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내가 아는 모든 동수들과 진지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대법의 일에서 서로 협조해야 할 때 좋아하지 않는 동수와 함께 일하는 것을 싫어했다. 비록 그(그녀) 본인에게 많은 장점이 있을지라도 그건 안 된다고 하면서 심리가 삐뚤어졌다. 설사 협력할지라도 일이 끝나면 임무를 완성한 것처럼 즉시 떠났다. 만약 내가 도와야 할 곳이 있으면 역시 내가 가능한 상황에서는 가서 했는데 약간만 어려움이 있어도 도중에 그만두었고 다른 사람의 일을 나의 일로 여기지 않았다. 이때 나는 대법의 수요, 중생의 수요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만약 나와 잘 맞는 동수를 만나면 설사 일이 좀 어려움이 있더라도 나를 찾기만 하면 나도 역시 가서 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때는 아직 내가 매우 사(私)가 없다고 느꼈다.
나중에 어떤 일 때문에 나는 이 사심을 보게 되었다. 한번은 약간의 곤란을 만났는데 나로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일이 갑자기 생겼고 나는 일시에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마음이 조급해 발정념 하며 사부님께 구해도 곤란은 해결되지 않았고 사람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이전에 내가 곤란을 당하면 즉시 어떤 사람이 있어 도왔는데 그 때는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찾을 수도 없었다. 이 때 나는 할 수 없이 안으로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어디가 잘못되었는가 하였다. 발정념 중에 사부님의 점화로 나는 며칠 전에 내가 한 일을 상기했다.
한 동수가 법 실증을 하는데 설비가 고장이 나서 나보고 도와달라고 했다. 이 일은 좀 어려움이 있어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제 때에 도와줄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동수는 곤란에 처해 매우 초조했으나 나는 조급하지 않았다. 이때 이미 나의 사심이 작용했으나 나는 인식하지 못했다. 이 때 사부님의 점화를 통해 나는 문득 그 동수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역시 마찬가지 어려움이 있어도 내심으로 초조하긴 하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매우 후회하며 동수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나는 즉시 반드시 이 동수의 곤란을 해결하려고 생각했으며 사심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심성이 제고되었고 곧 어느 동수를 찾아갔는데 그는 제때에 나를 도와 곤란을 해결해주었다. 나도 방법을 생각해내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동수의 기계를 잘 고쳐주었다.
이 일은 나로 하여금 인식하게 했다. 이전에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성격은 사실 마음의 용량이 너무 작아 많은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바로 사심이었다. 그렇다면 법을 실증하는 중에 대법의 수요를 제일위로 둘 수 없으며 더욱이 정체적으로 더 잘 원용할 수 없다. 일을 하는 중에 여전히 사람을 보아야 했는데 이 사람이 나와 맞는가 맞지 않는가, 맞는다면 나는 잘 협조할 수 있지만 맞지 않으면 그와 함께 일하기 싫다. 설사 일을 할지라도 법을 실증하는 효과 역시 좋지 않았는데 이는 모두 자신의 마음이 조성한 것이다.
지금 비록 나는 이 집착을 돌파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완전히 버리지 못했으며 때로는 이 집착을 내려놓기 위해 부단히 발정념하고 사람을 마음을 제거하는데 정말 어려움을 느낀다. 매번 내가 돌파할 때마다 그렇게 편안하고 초연하여 동수와 화해롭게 지낼 수 있었고, 마음속에 어떻게든 동수와 잘 협조하고 중생을 구도할 것인가 하는 단 한 가지 일념만 있으면 나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었는데 그 느낌은 정말 미묘했다.
현재 나는 자신의 진상 효과가 좋지 않아 조급하며 늘 꿈속에서 사람에게 진상을 하며 말을 한다. 자기를 반성하고 이 방면에서 잘한 동수와 대조하면 자신의 마음이 세상 사람들과 잘 소통하지 못하고 있고 간격이 있음을 느낀다. 그러니 한 말이 사람의 본성을 깨우칠 수 없었다. 잘하는 동수가 한 말은 한번 들으면 사람에게 내심으로 진정한 정성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점이 부족하며 게다가 후천 관념의 장애로 더욱 많고 넓은 범위로 세인을 구도하지 못했다.
때로는 내가 돌파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대법제자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이상은 내가 법을 실증하는 최근 몇 년간 느낀 심득 체험이며 수련을 잘한 동수들과는 차이가 매우 크고 사부님의 요구와는 아직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을 깊이 안다. 그러나 나는 노력할 것이며 반드시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사부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제 4회 대륙대법제자 수련 심득 서면교류대회 원고)
(명혜망에서 전재)
발표시간:2007년 11월 25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7/11/25/495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