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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수의 부족을 “폭로”하는 것에서 생각한 것

동수의 부족을 “폭로”하는 것에서 생각한 것

【정견망 2009년 3월 31일】

우연히 인근 지역의 동수들과 접촉하는 과정 중에 나는 그 지역 일부 동수들 중에 일종 상태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다. 즉, 행위가 과격한 동수의 일부 표현에 대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부부가 모두 수련하지만 장기간 첨예한 모순 속에 처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으며, 심지어 사이트에 올려 폭로하려는 생각까지 있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자신의 생각을 말해보고자 한다. 사실 동수의 표현은 또한 자신의 일면 거울로서 많건 적건 모두 자신의 일부 부족한 면들을 비추어 보아낼 수 있다. 오직 세심하게 안을 향해 찾기만 하고, 대법으로 가늠한다면 모두 사상 깊은 곳의 일부 누락들을 찾아낼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동수의 부족한 면을 보았을 때 우리가 어떤 기점에 서서 이 일을 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나의 인식에 서서 나의 표준, 나의 관념으로 가늠한다면 많은 원망과 미움, 질책과 불평을 초래할 것이다. 만약 동수를 위해 생각하고, 대법에 책임진다는 기점에서 생각한다면 선의적으로 가서 동수와 소통할 수 있다. 동수 역시 정체적인 하나의 선의 마당 중에서 자신의 부족을 개변할 수 있으며 절대 자신의 좋지 않은 행위와 오래 끌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몇 년 전 있었던 일을 떠오르게 했다. (역시 교훈이었다.) 우리 지역에는 행위가 좀 극단적인 동수들이 몇 명 있었다. 당시 발정념과 법을 깨닫는 문제에서 대법에 부합하지 않는 표현을 좀 제기했는데 나는 듣고 난 후 매우 화가 났다. 비록 그들과 몇 번 교류하긴 했으나 내 말 속에는 일종 강대한 자아를 품고 있었다. “당신들은 왜 이렇게 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가?” 말 중에 강대한 자아와 원망을 갖고 있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구세력이 틈을 타고 들어와 간극을 더 크게 하였다.

이 일을 놓고 말할 때, 당시 나는 자신이 법에 서있다고 생각했고 동수와 대법에 대해 책임진다고 생각했다. 교류한 효과가 없자 나는 이 일을 사이트에 올려 “폭로”했다! 그 당시 나는 폭로하여 드러내면 동수들이 반드시 고칠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할 아무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완전히 반대였다. 먼저 동수들 중에서 한 차례 파동을 이끌어내고 이어서 동수들 사이에 또 더욱 큰 시비와 간극을 형성했다. 마지막에는 대립하는 두 동수들이 서로 만나기만 하면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리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말을 잘못하면 또 “폭로될”까 두려워했다. 이처럼 “사람”의 방법을 사용하면 영원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법리상에서 우리에게 수련이란 곧 자신을 닦아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씬씽이 얼마 높으면 공이 얼마나 높다.” 동수 사이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든지 막론하고 모두 자신을 수련하고 자신을 제고하는 가장 좋은 기회인 것이다. 얼마만한 흉금이 있으면 곧 그만한 큰일을 용납할 수 있고 얼마나 큰 자비가 있으면 그만큼 큰 원한을 풀 수 있다. 자신을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신의 것을 얻을 수 있다.

동수와 논쟁을 해도 좋고 사이트에 올려 동수의 부족을 폭로하는 것도 좋은데 그때의 눈길은 모두 밖을 향해 본 것이다. 논쟁과 불평 중에서 얻는 것은 사람의 것일뿐 (내가 옳고 당신은 틀렸다.) 신의 것은 눈꼽만큼도 얻지 못한다. 사실 이런 표현 자체가 곧 동수의 부족을 “폭로”하는 것을 통해 상대에게 진동을 주게 하여 진일보로 강대한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상대방이 개변될 것을 강요한다. 이런 표현 자체가 곧 당문화의 전형적인 “투쟁” 요소인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신은 자비한 것으로 최대의 관용이 있으며 정말로 생명을 위하여 책임지며 사람의 일심일행이라고 했는데 중요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이 본질상에서 한 생명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본질상에서 한 생명의 불성을 깨우쳐주기 때문이다.”(『2004년 시카고 법회 설법』)

몇 년 후 나에 의해 폭로 당했던 동수들과 함께 교류할 때 (당시 우리는 모두 큰 제고가 있었고 내심에 간극이 없었다.) 나는 갑자기 내가 폭로했던 동수에게 아주 많은 장점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법에 대한 그의 이해는 매우 깊어 나로 하여금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러나 당시 그가 잘못했을 때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도와주지 못했고 사람 마음에 이끌려 뒤로 밀어 넘어뜨렸던 것이다. 나는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동수를 돕는 데는 많은 방법이 있지만 경솔하게 폭로하는 이 “살인 병기”(채찍 비슷한 옛날 병기)를 사용해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 것만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역시 우리의 가까운 동수가 아닌가? 함께 손을 잡고 소원을 품고 각기 다른 천국의 주로서 함께 내려온 것이 아닌가? 단순한 한 사람이 아니며 적은 더욱 아니다.

어떻게 동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동수의 부족한 점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한 설법을 많이 하셨다. 사부님의 법을 읽고 경지가 제고됨에 따라 나는 아주 뚜렷한 문제를 보게 되었다. 매번 동수의 부족한 면을 발견했을 때가 바로 자신이 마땅히 닦아야 할 곳이다. 절대 상대를 어떻게 수련시키는 것이 아니다. 수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어떠하다고 의론할 때는 바로 당신의 마음을 없애지 못한 표현이다. 법 중에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금목수화토는 우주의 만사만물을 구성하는데 그 중 “수(水)”와 “화(火)”는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데 당신이 피차간의 대립으로 인해 어느 일방을 없애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조화롭게 동일한 경지 중에서 존재할 수 있다.

사존님의 『호주 법회 설법』을 반복적으로 보다보니 한마디 말씀이 내 마음에서 늘 진감을 산생한다. 바로 “안으로 찾아라 안으로 찾아라!”이다. 나는 이것이 경지를 제고하고 일체를 풀어내는 뿌리라고 생각한다.

발표시간 : 2009년 3월 31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9/3/31/5863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