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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력이 있어야 커질 수 있다

포용력이 있어야 커질 수 있다

종고루(鍾鼓樓)

[정견망]

대법제자들은 조사정법(助師正法), 중생구도를 위해 현재 정법시기에 진상을 알리는 많은 항목을 조직해 다양한 형식으로 대법을 실증하면서 거대한 작용을 발휘하고 있다. 이는 자신에게 위대한 위덕(威德)을 세워주는 것이자 우주의 뭇신들이 모두 찬탄해마지않는 대단한 장거(壯舉)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 각종 항목에 참여한 제자들 사이에 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고집을 부리거나 심지어 의견이 일치하지 못해 모순과 간격이 생겨 상호협력에 영향을 주는 것을 보게 된다. 개인수련이건 아니면 항목 전체에 대해서건 이는 모두 누락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부 제자들이 질질 끌면서 보다 높은 층차로 돌파하지 못함으로써 일부 항목이 정법노정 중에서 보다 큰 작용을 발휘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인데 이는 몹시 애석한 일이다. 내 생각에 이런 부족이 나타나는 이유는 제자들이 안으로 찾는 것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많은 제자들, 특히 노수련생들은 대법을 다년간 수련해 이미 법리(法理)에 대해 아주 높은 인식이 있다. 또한 대법을 실증하는 과정 중에 거대한 위덕을 쌓아왔으며 다른 공간에 있는 신체는 이미 아주 위대하고 수승하게 변화했다. 비록 많은 제자들에게 아직 점오(漸悟)상태가 나타나진 않았지만 그러나 자신의 심성제고건 표면적인 신체의 변화건 아니면 법리에 대한 인식이건 많은 제자들은 모두 자신의 승화를 느낄 수 있으며 이로부터 자신에 대해서도 갈수록 자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한 가지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바로 일부 수련생들, 심지어 노수련생들이 자신이 대법 수련 중에서 인식한 법리와 또 이로 말미암아 구체적인 일에 대한 견해에서 지나치게 자신을 갖게 되었다. 이 때문에 또 다른 집착이 생겨났으니 바로 자신이 인식한 법리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대법은 무변하며 매 제자가 대법에서 깨달은 법리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사물을 보는 각도 역시 다르다. 동일한 일에 대해 종종 제자 사이에 인식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런 차이는 대법이 실로 너무나 방대하고 호한(浩澣)하며 무변(無邊)하기에 대법제자들이 모두 법에서 수련하고 있지만 매 사람은 법속에서 처한 위치가 달라서 조성된 것이다. 이는 마치 소동파가 시에서 쓴 것과 같다. “옆에서 보면 고갯마루요, 비켜보면 봉우리로다, 멀리서 가까이서 높은 데서 낮은 데서 처한 곳마다 형상이 다르구나. 여산의 진면목을 알기 어려우니, 이는 내 몸이 산중에 묻혀 있기 때문인가 하노라(橫看成嶺側成峰,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真面目,只緣身在此山中)”

대법은 무변(無邊)하며 매 제자는 법리에 대해 자신의 이해가 있다. 구체적인 사물 중에서 표현되는 것은 바로 각기 다른 견해를 지니는 것이며 이는 아주 정상적이다. 대법제자가 오늘 하는 구체적인 항목의 출발점은 모두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종종 구체적인 일에서 다른 의견이 나올 때면 일부 제자들은 단지 자신의 이치만 볼뿐 다른 사람의 이치를 보지 않으며 다만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볼뿐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한다. 때문에 상대방이 이치에 맞지 않으며 자신의 의견이 대법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상대방 역시 이렇게 인식한다. 이에 서로 양보하지 않거나 심지어 이 때문에 모순과 간격이 생겨나 개인수련의 제고에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대법을 실증하는 항목에도 어느 정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오늘에 이르러 대법제자들은 보편적으로 법리에 대해 아주 높은 인식이 있다. 그러나 법무정법(法無定法)이라 우리가 대법 속에서 아무리 높이 수련했다한들, 법리에 대해 아무리 깊은 인식이 있다한들, 그것은 단지 우리 자신 이 한 층의 인식에 불과할 뿐이다. 대법은 무변하며 법리의 박대정심(博大精深)함은 우리 모든 제자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더욱이 우리 아직 개오(開悟)하지 못한 사람 이 일면에서 법리에 대한 자그마한 인식은 호한하고 무변한 대법 중에서 실로 너무나도 미미하고 가련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무변한 법리 중에서 자신의 그 자그마한 인식을 끌어안고 집착하며 내려놓지 못하는가?

석가모니불이 인간세상에서 49년간 법을 전하면서 그는 매 한 층차 제고할 때마다 자신이 과거에 말한 법이 모두 옳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법 중에서 수련하는 우리 역시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는가? 속인 중의 철학에서도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을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법리가 보다 높은 인식 역시 자신이 원래 가졌던 인식에 대한 부정이며 한 층차 더 높아지면 부정의 부정이 되는데 이렇게 대법 속에서 끊임없이 승화하고 끊임없이 과거의 자신을 버리는 것이 바로 수련의 과정이다.

만약 석가모니가 나한(羅漢) 그 경지의 인식을 끌어안고 내려놓지 않았다면 그는 보다 높은 인식과 보다 넓은 경지를 갖지 못했을 것이며 여래로 수련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오늘날 대법제자는 또 왜 무변한 대법 속에서 제한된 고만한 법리에 대한 인식을 끌어안고 내려놓지 못하며 자신의 인식이 절대적으로 정확하다고 여기는가? 이는 자신이 보다 높은 층차로 돌파하는 것을 가로막는 중대한 장애가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 부분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제고하게 하여 정법 중에서 요구하는 그런 높은 과위에 도달하며 원만의 표준에 도달하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현실 속의 모순을 통해서 심성에 충격을 주거나 심지어 제자 상호간의 마찰을 통해 그 마음을 건드림으로써 이들 제자들이 제고해 올라가도록 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러나 적지 않은 제자들은 모순에 부딪힐 때 깨닫지 못하고 안으로 찾을 생각을 하지 않거나 또는 자신이 인식한 그 층차의 이치를 끌어안고 내려놓지 않음으로써 모순을 격화시킨다. 또 이를 통해 대법제자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대법을 실증하는 것에 영향을 끼친다. 어쨌든 이 모든 번거로움은 전부 우리 자신의 마음이 조성한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왜 우리더러 거듭 안으로 찾음이 수련인의 법보(法寶)라고 알려주셨는가? 나는 안으로 찾음은 단지 우리 개인수련의 법보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대법을 실증하는 항목을 하는데 있어서도 법보임을 깨달았다. 대법제자가 진정으로 그 어떤 일에 부딪힐지라도 모두 우선 안으로 찾을 수 있다면 그럼 우리가 수련하는 이 길에서, 우리가 조사정법하는 이 길에서, 그 어떤 요소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왜 우리 일부 대법을 실증하는 항목에서는 줄곧 곤란이 거듭되는가? 내가 보기에 문제는 주로 우리 자신에게 있으며 바로 안으로 찾음을 중시하지 않은 것이다.

선인들은 과거에 “포용력이 있어야 커질 수 있다(有容乃大)”고 말했다. 이 역시 신(神)이 전해준 문화이며 내포가 아주 크다. 법리로부터 나는 사람은 마치 하나의 그릇과 같으며 무엇을 담으면 바로 그것이 된다는 것을 안다. 담은 것이 모두 법이라면 그럼 대법도(大法徒)이다. 나는 우리 생명 중에 담은 법이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우리가 그만큼 큰 그릇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근기(大根器)의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바로 근기(根基)가 크고 아주 큰 법을 담을 수 있어서 큰 그릇(大器)을 이룬 사람을 말한다. 대법은 무변하며 완전히 자기 개인의 깨달음에만 의지한다면 여전히 아주 한계가 있는 것이다. 대법제자 매 개인의 생명의 내원이 다르고 근기가 다르며 깨달은 법리가 다르며 생명 중에 담은 법 역시 다르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 대법제자들이 서로 간에 다른 의견이 있을 때 성급하게 다른 사람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냉정하고 이지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치를 살펴보고 다른 사람의 이치를 받아들인다면 이는 자신의 심성용량을 더욱 키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대방 역시 대법제자이며 상대방이 인식한 것 역시 대법 중에서 깨달은 어느 한 층의 법리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이치를 포용한다면 동시에 상대방이 깨달은 법리에 대해서도 포용한 것이 아닌가? 물론 구체적인 일에서 반드시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며 이를 통해 상대방의 이치를 보고 상대방이 깨달은 법리를 포용한다는 뜻이다.

과거 속인의 무협소설 중에 “북명신공(北溟神功)”이란 것이 있었다. 이 소설에는 사람이 싸우는 가운데 다른 사람의 공력(功力)을 자기 체내에 흡수해 자신의 공으로 만든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우리 대법제자들은 모두 이것이 불가능함을 아는데 공은 모두 자신이 수련해서 나온 것이지 다른 사람의 공이 아무리 좋아도 더할 수 없고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깨달은 법리는 우리가 포용할 수 있다. 무엇이 북명(北溟)인가? 고대 전설 중에서 거대한 곤붕(鯤鵬)이 사는 광활한 바다를 말한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포용할 수만 있다면, 제자 사이에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때 자신의 부족을 볼 수 있고, 상대방의 이치를 볼 수 있으며, 자신의 원래 인식과 다른 이치를 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상대방이 대법 속에서 깨달은 것과 우리가 원래 인식하지 못했던 법리를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공(功)이 바로 법(法)이며 법이 바로 공인데 정신 자체가 바로 물질이다”(휴스턴법회설법)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대법제자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법을 담았다면 우리는 곧 그만큼 큰 공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대법제자 서로 간에 다른 의견이 있을 때가 바로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다른 사람이 깨달은 법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심성용량을 확충할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그럼 왜 상대방이 깨달은 법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줄곧 밖으로 밀어내는가? 물론 이것은 아주 어려운데 특히 모순 중에서는 더욱 하기 어렵다. 어렵지 않다면 그럼 도(道)를 닦는 것 역시 너무나 쉬워 사람마다 모두 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법제자라면 “참기 어려운 것도 참아낼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려움은 대법제자의 위대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며 어려움은 대법제자의 위덕을 더욱 세울 수 있게 한다.

불법은 무변하며 포용력이 있어야 커질 수 있다. 우리 모든 대법제자들이 모두 대법의 박대정심함을 깨닫고, 모두 일에 부딪혀 안으로 찾을 수 있으며, 모두 마음을 비우고 다른 제자가 대법 중에서 깨달은 법리를 포용할 수 있다면, 대법수련 중에서, 대법을 실증하는 과정 중에서, 자신의 보다 큰 과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개인의 얕은 인식으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발표시간:2011년 10월 14일
정견문장: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1/10/14/779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