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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계광이 남을 대신해 경을 읽다”를 읽고 법학습은 반드시 마음이 조용해야 함을 논함

“척계광이 남을 대신해 경을 읽다”를 읽고 법학습은 반드시 마음이 조용해야 함을 논함

작자:동진(同眞)

[정견망]
480기 “정견주간(正見周刊)”에 실린 “척계광이 남을 대신해 경을 읽다(戚繼光替人誦經)”라는 문장을 보고 많은 계발을 받았다. 이 문장에서는 명나라 때의 장군 척계광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척계광은 평소 독실하게 부처님을 믿고 늘 불경(佛經)을 지니고 다니면서 읽기를 즐겼다. 어느 날 밤 홀연히 이미 사망한 한 사병이 꿈에 나타나 자신을 위해 불경을 읽어 저승에서 복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해달라며 부탁했다. 이 사병은 과거 척계광의 호위무사로 있었다.

척계광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사병을 위해 불경을 한번 읽었다. 하지만 밤이 되자 척계광의 꿈에 사병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저를 위해 불경을 읽어주신 장군님의 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읽어주신 공덕(功德)의 절반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불경을 읽으시는 중에 “필요 없다(無用)”는 두 글자가 섞여 들어갔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척계광이 깨어난 후 반나절을 생각한 후에야 비로소 “필요 없다”는 말이 섞여 들어간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원래 그가 경전을 읽을 때 시녀가 차와 떡을 가져왔는데 이때 그는 손을 휘저으며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입으로는 비록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필요 없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이에 다음날 오전 척계광은 아예 문을 닫아걸고 다시 그 사병을 위해 마음을 조용히 하고 불경을 한번 읽었다. 나중에 꿈에 그 병사가 다시 나타나 그에게 감사하며 “장군님 저는 이미 초도(超度)되었음을 보고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장군님!”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중국 고대에는 일반인이 경전을 읽을 때에도 불순(不純)한 일념이 끼어들어갈 수 없었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우리 대법제자들이 법공부를 할 때 반드시 아주 엄숙한 태도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해야만 진정으로 대법의 법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단정한 법학습 태도와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하는 것은 또 경사경법(敬師敬法)의 체현이기도 하다. 우리가 법을 읽는 것은 마치 사부님의 설법을 직접 경청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어찌 태도가 단정하지 않거나 잡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단정한 법학습 태도가 없고 경사경법하는 마음이 없다면 법 배후의 요소가 또 어찌 나타날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는 반드시 법공부를 해야 한다”에서 마음을 조용히 하지 못하는 법공부의 엄중성에 대해 알려주셨다. “어떤 사람은 『전법륜』을 읽을 때, 사상이 전일하지 않고, 다른 것을 생각하며, 수련 중에 전념하지 못한다. 이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같으며,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본래는 제고해야 할 때이건만, 오히려 마음에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문제와 일부 일들을 생각하는데, 제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만약 법을 잘 배우지 못하면, 많은 일을 다 잘 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지금 대법제자들은 정법시기에 처해 중생을 구도할 역사적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대법제자의 일언일행(一言一行) 일거일동(一擧一動)에는 모두 정법의 내포가 부여되어 있으며 중생이 구도 받을 수 있는가 여부와 관련 된다. 대법제자가 법을 공부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바로 정법의 과정이자 중생을 구도하는 과정이다. 만약 우리의 사상이 순정하고 진정으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할 수 있다면 단지 자기 체계 내의 생명이 법에 동화되어 미래로 진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 부동한 공간의 생명과 영체마저도 우리의 바른 에너지의 작용 하에서 대법에 동화되길 선택할 것이다.

동시에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하는 과정은 일체 변이된 관념을 깨끗이 제거하고 사악을 해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주 중의 어떤 물질이든, 전체 우주 중에 꽉 차있는 모든 물질을 포함하여 모두 영체(靈體)고, 모두 사상이 있으며, 모두 우주의 법이 부동(不同)한 층차 중에서 존재하는 형태다.”(전법륜) 대법제자가 진정으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할 수 있는가 여부는 이런 생명, 영체, 물질이 구도될 수 있는가와도 관련된다.

때로 단체법공부를 할 때 어떤 수련생은 장기간 흐리멍덩한 상태에 처해 단체로 법을 읽을 때 늘 행을 찾지 못하고 또 어떤 이는 잡생각을 하거나 법을 읽을 때 매 페이지 심지어 매 단락마다 틀리게 읽는 경우가 있다. 교류할 때 이런 현상을 언급하면 어떤 수련생은 또 다만 사람의 표면적인 “안으로 찾음”으로 얼버무리면서 자신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거나 혹은 끝내지 못한 대법 일이 있다는 등의 원인으로 법공부 시 피곤하거나 혹은 사상이 조용해지지 못한다고 한다. 사실 이는 모두 사상적으로 법공부의 엄숙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조성된 것이다. 우리가 법공부를 하는 것은 바로 주불(主佛)의 가르침을 직접 경청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신성한 일인가? 설사 아무리 피곤하고 아무리 큰 일이 있을지라도 주불께서 직접 설법하시는 것을 경청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인간세상에서 영웅을 예찬하고 대통령 취임을 하거나 기공식에서 테이프를 자르는 것 역시 모두 이 한 층에서 상대적으로 장엄한 형식이다. 이런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거나 혹은 다른 원인으로 피곤해하거나 딴생각을 하진 않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법공부를 할 때 피곤한 문제는 그 어떤 외재적인 원인에 의해 조성된 것이 아니라 근본을 따져보면 법공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대법의 엄숙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 생명이 만약 내심 깊은 곳으로부터 법에 대해 무한히 경앙(敬仰)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법을 공부하고 주불의 가르침을 경청한다면 영원히 피곤하거나 혹은 잡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일반인이 어떤 일을 할 때도 정확한 태도를 요구한다. 고대에 학생들이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때에도 모두 옷섶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아야 했다. 불교 신자가 경문을 통독하기 전에는 늘 목욕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우리 대법제자들이 법을 공부할 때 오직 단정한 태도와 경사경법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비로소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공부할 수 있으며, 오직 진정으로 법공부의 엄숙성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자신이 주도가 되어 일체 교란을 배척하고 법에 동화할 수 있다.

정법 최후에 우리 대법제자들이 모두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공부할 수 있고 중생을 구도하는 일을 잘 하여 사부님의 자비하신 고도(苦度)를 저버리지 않기를 희망한다.

얕은 깨달음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발표시간:2011년 11월 11일
정견문장: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1/11/11/7856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