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인은 사람의 이치로 자식을 교육하지 말아야 한다
작자:대륙대법제자
[정견망]
어느 날 동수와 교류할 때 그가 아주 침중한 어투로 말했다. “우리 아들이 20대지만 아직도 나가서 직장을 찾으려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집에 들어앉아 인터넷 게임만 해요. 걱정돼 죽겠어요.”
그의 이 말은 내게 아들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 아들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지 않았고 조금 커서는 밤낮 없이 인터넷에 푹 빠져 살았다. 좀 더 커서는 또 일찍 연애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늘 부모의 지갑에서 돈을 훔쳤고 동창들과 어울려 식당에 가서 먹고 마시곤 했는데 때로는 일주일 내내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이 문제로 나는 일찍이 아들을 때리거나 욕하고 또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너 같은 아들은 만 리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때로는 한밤중이 되어도 귀가하지 않으면 문밖으로 쫓아내고는 며칠간 말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면 아내는 “그래도 당신 아들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라면서 나를 탓했다. 이 문제로 나는 수년간 골머리를 앓았고 끊임없이 법에서 답안을 찾았으며 또 다른 수련생들과도 교류했다. 내가 진정으로 법리에서 이 문제에 명백해지고 사람마음을 내려놓았을 때 아들의 변화가 아주 큰 것을 발견했는데 바로 아주 선량하고 좋은 아들이 되었다.
대법제자가 자식을 교육함에 사람의 이치와 사람의 정으로 교육해서는 안 된다. 이 과정은 또한 수련인이 경지를 제고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특히 자신의 관념으로 아이를 교육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어릴 때 집이 몹시 가난해서 아버님이 밭에 나가 일을 하시면 나 역시 따라서 일을 했다. 조금 성장해서는 아버님이 일을 조금하고 쉬실 수 있도록 가급적 내가 많은 일을 했다. 이런 효심(孝心)에서 내게는 한가지 관념이 형성되었다. 가급적 내가 일을 하고 부모님은 쉬게 해드리며 부모님께서 일 하시면 나는 절대 놀 수 없다는 것인데 그것이 불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의 행동은 나와는 정반대였다. 내가 일을 할 때도 아들은 나가서 놀았고 내가 피곤하건 하지 않건 아예 상관조차 하지 않았다. 때로는 내가 오전 내내 피곤하게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도 아들은 여전히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아들의 이런 표현을 아무리 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때문에 늘 아들을 훈계하고 야단치거나 심지어 때릴 생각도 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간혹 아들에게 도리를 말해주었다. “네가 일을 많이 하고 부모님을 적게 일하게 하는 것이 효심이 아니냐? 하늘의 이치는 어길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면 아들도 내 말을 들었고 또 대답도 잘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여전했고 전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나는 깨달았다. 그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이치를 말해주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당시 내게 사람마음과 사람의 정이 아주 중해 상대방을 개변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수련에도 전혀 제고가 없었다는 것을.
이런 관념은 마치 담벼락처럼 나와 아들 사이에 가로 놓여 있었다. 내가 집착하고 그를 개변시키려 할수록 아들은 더욱 복종하지 않고 말을 듣지 않았으며 구세력은 갈수록 이를 구실로 일을 꾸몄다. 때로 기분이 좋을 때면 또 이지적으로 생각해보았다. “우리 아들은 왜 이 모양일까? 설마 조금도 개변할 수 없단 말인가? 이는 자신의 관념과 사람마음에 문제가 있어서 아들의 이런 상태를 촉성한 것이 아닐까?”
냉정하게 안으로 찾아본 후 나는 마땅히 어떻게 아들을 개변시킬 것인가가 아니라 수련의 길에서 자신이 마땅히 어떻게 제고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들이 표현하는 마성은 내게도 모두 있었다. 얼마나 똑똑히 보아낼 수 있다면 그만큼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매번 아들과 있었던 모순충돌은 모두 나로 하여금 일부 사람마음과 집착을 보게 했으며 또 일부 질적인 제고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줄곧 아들이 대학에 진학하거나 혹은 해외에 나갈 수 있기를 소망했다. 늘 아들의 인생의 길을 배치하려는 생각을 품었지만 이런 생각은 내 마음속에서 수년간 배회했다(이 역시 명을 구하는 마음이고 과시심이다). 나는 아들에게 아주 여러 번 나의 이런 계획을 말했고 또 나의 노력을 통해 아들을 개변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아들은 아예 내 말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상심이 아주 컸고 또 아들이 내 말을 듣지 않을수록 속으로 더욱 미워졌다. “네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데도 가지려 하지 않고 대체 무엇을 원한단 말이냐?” 이는 구세력의 생각과 마찬가지다. 내가 가장 괴로워하고 있을 때 사부님께서는 한 가지 꿈으로 나를 점화해주셨다.
내가 어느 큰 계곡 옆에 서 있는데 계곡 반대쪽에 양떼(아들의 아명이 양이다)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나는 계곡에서 돌을 던져 양들이 돌아오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돌은 늘 양을 맞추지 못했고 양 역시 내 말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아울러 양이 풀을 뜯을 때 또 음악이 들려왔는데 음악소리가 들리자 양은 앞으로 갔고 소리가 멈추자 또 멈춰서 풀을 뜯었다.
당시 내가 깨달은 것은 다만 아들의 매 한걸음 표현이 모두 구세력의 배치란 것이었다. 하지만 왜 이런 아들이 우리 집에 태어났는가에 대해서는 엄숙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들은 왜 나를 교란할 수 있는가? 비록 발정념으로 이런 안배를 부정하긴 했지만 인식이 낮고 정념이 강하지 못해 발정념을 할 때도 효과가 뚜렷하지 않았다. 비록 안으로 찾아보니 자신에게 다른 사람을 좌우하려는 마음이 있고 체면을 고려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실망 등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늘 아들이 좋은 인재가 되고 기적이 출현하기를 원했다. 사실 나는 진정으로 포기한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가운데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되돌아보면 나는 당시 아주 표면만을 수련했다. 많은 곳에서 사람의 법을 벗어나지 못했고 사람의 정과 사람의 이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한 가지 방법의 효과가 내게 큰 감촉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아들이 말대답하거나 말다툼을 할 때면 마음속으로 아주 원망하면서 아주 고통스럽다고 느낄 때였다. 나는 고밀도로 장시간 발정념을 하면서 내 사상과 공간장(空間場) 안에서 그런 좋지 못한 물질들을 깨끗이 제거했다. 가령 원망하고 화를 내며 강렬한 자아 등등. 나는 이런 물질들이 마치 먹구름처럼 내 공간장에 가득한 것을 느꼈다. 당시 내가 발정념으로 보다 많은 것을 청리(淸理)할수록 나는 선량한 마음이 갈수록 더 많이 나오는 것을 느꼈고 행동에서도 자비로운 표현이 나왔다.
뒤이어 끊임없이 법공부함에 따라 이성적인 인식도 갈수록 명백해졌다. 나는 아들의 몸에서 한 가지 관을 넘지 못한 것을 보았는데 주로는 여전히 정(情)이었다. 아들이 나쁜 것을 배울까 두렵고 아들의 일생을 위해 근심하며 이렇게 해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저렇게 해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이렇게 관할하려는 배후에는 여전히 자아가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중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당신들은 안심하라. 오로지 당신이 수련 원만에 이를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모두 제일 좋은 것이다.(박수) 이것은 수련인에 대해, 대법제자에 대해 열어 놓은 것이다. 만일 당신이 원만에 이르지 못한다면 일체가 모두 영(零)이다.”
“당신은 대법제자의 원만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알고 있는가? 당신 앞뒤의 모든 일을 모두 사부가 당신에게 책임져 주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는가? 당신이 걱정한다고 될 일인가? 당신이 배치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말해서 될 일인가? 나는 여러분에게 이 이치를 말하지 않았는가? 그에게 복이 없다면 당신이 무엇을 배치하든지 모두 소용이 없다. 그러나 사부는 오히려 당신에게 배치해 줄 수 있으며 내가 있든지 없든지 나는 모두 배치할 수 있다. 당신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가? 오로지 당신이 수련하기만 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모두 당신에게 책임져 줄 것인데, 이를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당신들이 수련을 잘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다.”
아들을 사부님께 맡기면 사부님께서는 그에게 모든 일체와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반복적으로 사부님의 이 단락 법을 보면서 나의 사람마음을 또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또 정견주간에 나오는 윤회이야기를 자주 본 것이 내게 큰 계발을 주었다. 이런 윤회이야기들을 읽는 가운데 나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닫게 했다. 육도윤회란 얼마나 잔혹하며 생명의 삶과 죽음, 오고 감에 필경 누가 당신의 부모형제란 말인가? “사람은 일생이 아니며, 금생에는 당신과 한 가족이지만, 내생에는 그가 다른 사람과 한 가족일 것이며, 그 다음 생에는 어디로 전생할지도 모른다. 단지 일생의 연분에 불과할 뿐인데, 당신이 어찌 그의 생명의 영원한 선택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맨해튼 설법)
내가 법리에 좀 명백해지자 자연히 마음속의 매듭을 약간 풀 수 있었다. 아들을 볼 때도 더는 마음이 심란하지 않았고 그는 바로 중생이며 다만 역사적으로 내게 상처를 받았거나(살생을 포함) 악연을 맺은 생명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는 마땅히 선량한 마음으로 그를 대해야 하며 악연을 선해해야만 한다. 내가 진 빚을 솔직히 인정하고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실 가족에서 매 하나의 친인(親人)은 여관에 잠시 묵어가는 손님과 마찬가지다. 여관에 묵는 다른 사람이 어떠하든 아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자신의 관념으로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단지 생활하는 가운데 서로 관심을 가져주고 누가 아프거나 누가 무엇을 먹고 싶어 하거나 누가 곤란하면 가급적 손님의 선한 인연으로 도와줄 뿐이다. 날이 밝으면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내가 아들의 일체 표현에 대해 더 이상 화를 내고 비난하거나 강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자신의 마음이 너그럽고 상화해졌을 뿐만 아니라 아들 역시 질적인 변화가 생겨 더 이상 내게 말대답을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집안 일을 돕거나 때로는 많은 고생을 겪을 수 있게 된 것을 발견했다. 내 생일날 선물을 주기도 했고 자기 동창과 친구들에게 진상을 알려 삼퇴를 권하기도 했다. 아내는 기뻐하면서 “당신들 두 부자는 마치 형제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야 제대로 된 집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나를 도와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하게 되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서 내게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인식이 들었다.
첫째, 수련인은 본래 자식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대궁 깊은 곳에서 올 때 아무것도 없었으며 다만 조사정법(助師正法)과 중생을 구도하려는 홍대한 소원만 있었을 뿐이다. 자식은 단지 세간에서 윤회하는 표현에 불과하며 전세(前世)에 남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면 금세(今世)에 와서 그가 당신에게 보답하고 전세에 악연을 맺었다면 금생에 와서 빚을 받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의 이치에 부합해 그들을 선하게 대하는 동시에 또 심성을 제고해 법의 표준에 도달해야 한다.
둘째, 사람의 이치로 아이를 단속하고 그를 좌우지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이의 원신(元神)은 상계(上界)에서 온 것으로 당신의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의 일생은 배치가 있는 것으로 당신이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고심을 할지라도 그에 대한 신(神)의 배치를 개변시킬 수는 없다. 그는 독립적으로 인생의 길에서 걸어가야 한다. 다시 말해 당신이 살아 있을 때 아들이 이런 표현이라면 당신이 세상에 없어도 이런 표현일 것이다. 그의 길은 당신이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 조금도 개변되지 않는다.
셋째, 관심과 교육 중에서 아이의 부정적인 일면을 건드리지 말아야 하며 부면(負面)적인 표현을 확대해서 보지 말고 가급적 좋은 표현을 본다. 격려하는 가운데 아이에게 신심을 주고 선의(善意)적으로 비평하는 가운데 그의 행동을 단속하게 한다. 이 척도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는 자신의 수련상태의 체현이다. 그 외에 자신이 일에 봉착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며 밖을 향해 보지 말아야 하고 마난 중에 있을 때가 바로 자신을 제고할 관건이다.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면 아이는 틀림없이 그것에 집착할 것이다. 당신이 내려놓으면 아이 역시 좋게 변한다. 이 과정 중의 각종 제고와 체험은 모두 사부님의 자비하신 점화와 대법이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하며 착실히 수련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내려놓을 수 있다.
개인의 얕은 견해이므로 여러분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발표시간:2012년 1월 31일
정견문장: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2/1/31/802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