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신련(新蓮)
【정견망 2007년 6월 23일】
1. 꽃다운 나이에 병으로 고통
나의 본명은 진월하(陳月霞)로 현재 71세이다. 사람들은 내가 정말이지 얼마나 많은 병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릴 때 우리는 집이 가난했고 게다가 나는 또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해 많은 병이 따라다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자라서 이십대가 되었을 때 인연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대를 이어 공업에 종사하던 사람인데 나는 크고 작은 만성병으로 체질이 너무 형편없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또 집안일이나 요리도 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내 사람을 불러 일을 시켜야 했다. 나는 당시 자궁염, 난소염, 위염, 부인과 질환, 빈혈, 신경쇠약, 잦은 감기, 심한 편두통, 위장장애, 변비, 습관성 요추염좌, 좌골신경통, 치질, 혈뇨, 방광염 등이 있었다. 비록 이들 병이 어느 하나도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잘 지내지 못했다. 어떻게 말할까? 나는 산다는 것이 정말 매우 고생스러웠다! 화장을 아름답게 하면 남편이 보고 기뻐했지만, 자신의 진정한 상심, 한탄, 피로 등을 감히 표현할 수 없었다. 사실 진정한 나의 내심은 하루도 명랑한 적이 없었다.
2. 중년의 외로운 신세
하지만 원래 병이 없고 쾌활한 남편은 일찍이 반 농담으로 웃으면서 대만 사투리로 내게 말했다. “우리 마누라는 두 가지 특색이 있는데 하나는 온몸에 약냄새이고 또 하나는 엉덩이가 단단한 것이다!” 왜 그런가? 매달 수많은 주사를 맞았는데 진통제, 소염제, 감기약, 보혈제, 변비약 등 모든 종류의 주사를 맞았다. 약의 이름이 너무 많아 다 헤아릴 수 없었고 장기적으로 늘 주사를 맞자 두 엉덩이에 어혈이 생겨 고통스럽고 부스럼이 생겼는데 날이 지나면 단단한 상태로 변해버렸다!
물론 인연이 있어서였겠지만 우리 부부는 완전한 가족의 정을 원했기 때문에 젊을 때 딸 하나를 입양했다. 내 기억에 그 아이가 만 15세 쯤 되었을까, 늘 명랑하던 남편이 의외로 쓰러져 중풍 증상이 나타났다. 침상에서 누워 지낸 지 1년 만에 남편은 우리 모녀를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나는 남편이 남겨놓은 사업을 유지해야 했고 아직 채 성인이 되지 않은 딸도 양육해야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바쁘게 보냈으며, 밤에는 침상에 누워 천천히 모든 병고의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다.
사실 나는 젊을 때부터 시작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때맞춰 관음사에 가서 향을 올리고, 제를 올리며 향유 값을 내는 습관이 있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에게 2,30년간 절을 했으며 신체가 좀 건강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또 나는 매년 사람을 찾아가 운명을 바꾸고 운명을 보완하려고 했다. 이외에도 나는 생활에서 크고 작은 일을 만나면 집에 모시는 관세음보살상에 가르침을 청했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나는 반드시 직접 차를 따르고 향을 올리며 매우 성심껏 관세음보살에게 오체투지로 큰 절을 올렸다. 이렇게 수십년을 했음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남편이 떠난 후 친구가 계속 중매하러 왔을 때 관세음보살이 매우 영험하게 나의 청을 응답해주었는데 나더러 혼자 사는 것이 가장 낫다고 했다. 당시 40이 안된 나는 이렇게 하여 혼자 살기로 결정했다.
3. 평안을 구하다
생활은 계속되었고 병의 통증도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비록 매일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는 것을 알았지만 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다량의 약물에 의지하여 일체 생활의 질을 제고하려 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방법이 없어서 한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인생이 원래 이런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이렇다고 여기면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사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6, 7년이 지나자 딸은 성년이 되었고 얼마 후 결혼했다. 나도 이때는 남편이 남긴 가게를 더 이상 경영하지 않게 되었다.
사업을 일단락하자 2년 후 나는 건강을 목적으로 공원에 가서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거의 오십이 다 된 나는 우선 “외단공(外丹功)”을 선택했는데 끈기 있게 7,8년 했다. 나중에는 보통 수련생에서 외단공 사범이 되었다. 그러나 운동은 운동이고, 병은 병이라 나의 온 전신에는 크고 작은 병이 조금도 낫지 않았다. 감기가 걸리면 눈앞이 어찔했고, 두통이 오면 쓰러질 것 같았다. 아, 이런 고통은 정말이지 삶의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또 “태극기공”으로 바꾸어 그것을 2년을 배웠는데 역시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고 또 “향공(香功)”의 행렬로 들어서 사람들을 따라 2년을 소비했다. 나중에 친구가 나를 불러 “원극무(元極舞)”를 같이 추었다. 나는 이렇게 펄쩍 펄쩍 뛰는 것이 즐거웠고 그러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또 4년이 지났다.
그때 우리를 데리고 원극무를 가르치던 선생이 다른 공원에 가서 수업을 개설하는 바람에 뜻이 있으면 나더러 접수하라고 했다. 당시 내 나이는 이미 65세였는데 남을 가르치려면 내가 다시 훈련을 받고 그들 원극무 위원회에 참가해 1천5백원 입회비를 낸 후에 비로소 강의를 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것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니 집에 가서 관세음보살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4. 바른 신의 보호 하에 귀로에 올라
뜻밖에 일체의 변화는 이때부터 시작했는데 이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우선 나는 차를 올리고, 향을 피우고, 절한 후 공경하게 괘를 던졌다. 결과적으로 관세음보살은 내가 원극무를 가르치는 사범이 되는 것을 부정했고 심지어 내가 계속 원극무를 하는 것조차도 부정했다. 나는 속으로 매우 궁금해서 이왕 관세음이 내가 원극무하는 것조차도 못하게 하니 설마 내가 다시 외단공, 향공 아니면 태극기공으로 돌아가란 말인가? 뜻밖에도 이러한 것을 계속해서 물어보아도 답은 모두 부정적이었다. 이는 정말 당황스러운 것이었는데 나는 정말 알 수 없었다. 더욱이 내 몸이 이렇게 약한데 관세음보살은 내가 운동 좀 하는 것을 부정하니 도저히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걸까?
별 방법이 없어 나는 여전히 원극무를 계속했다. 물론 이 기간에 나는 공원에서 묵묵히 연공하는 또 다른 무리의 사람을 주의 깊게 보았다. 그들은 통상 모두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파룬궁(法輪功)을 연공하고 있었다. 매번 우리가 원극무를 추고 나면 몇 명의 친구들은 궁금해서 속삭였다. “이게 어디에 좋은 거야? 이렇게 앉아서 움직이지 않으면 신체의 기혈이 순환하지 않을 것이고 운동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런 것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몇 번을 보았지만 전혀 배울 마음이 없었다.
아마 연분이 되었으리라. 뜻밖에 반년 후 파룬궁을 널리 알리는 활동이 열렸다. 나는 호기심으로 때마침 공원에 뛰어가 보았는데 당시 내가 본 것은 큰 플랭카드에 『논어(論語)』라고 쓴 문장이었다. 나는 보자마자 불가(佛家)의 공법임을 알았고 간략한 소개를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 마음속으로 평온하지 못한 상태로 또 관음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파룬궁이 불가의 것입니까?” (그렇다!)
“그들의 이것이 원극무보다 낫습니까?” (그렇다!)
“그럼 당신의 뜻은 내가 파룬궁을 연마하라는 것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데 이것이 좋은 것입니까?” (그렇다!)
“저는 이것을 좋아하지 않고 여전히 원극무를 추고 싶습니다!”(안 된다!)
“그러나 나더러 가라고 하는데 나는 다리를 틀 방법이 있습니까?”(있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이것을 연마해야 합니까?” (그렇다!)
“이것은 내가 이전에 연마했던 어떤 것보다 좋은 것입니까?” (그렇다!)
“그럼 나중에 다시 가겠습니다!” (안 된다!)
5. 할머니가 새로운 삶을 맞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루를 지낸 후 파룬궁 연공장에 나갔다. 나는 속으로 관세음 보살이 가라고 해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기왕 왔으면 편안히 여겨야지, 하며 정말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람들을 따라 함께 가부좌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첫날 가부좌 하는 재미가 괜찮아 한 시간이나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를 격려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가부좌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앉아서 있을 수 있으니 정말 관세음보살이 말한 대로였다.
이렇게 4,5일을 연공하자 이상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파룬이 내 머리 위에서 내내 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큰 의혹이 일어 연공장 동수에게 물었다. 그들은 웃으면서 그것은 나의 신체를 정화하는 것을 돕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설명은 나를 약간 망연하게 했으며 내가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며칠이 지나 동네에서 열린 9일학습반에 참가해 진정하게 법리로부터 일부 함의를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은 이렇게 천천히 발생하였다. 내가 파룬궁으로 바꾼 지 얼마 안되어 원래 매달 걸렸던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며 십년이나 괴롭히던 좌골신경통도 없어졌다. 그전에 나는 오래 앉아 있지 못하여 침대에 누워야 했으며 쉽게 피로를 느끼고 대퇴부가 저리고 마비가 왔으며 매주 두 번씩 병원에 가서 매번 두 시간 동안 신경을 견인하는 재활운동을 했는데 지금은 모두 필요 없게 되었다.
더욱이 내게는 아직 많은 의사들이 속수무책인 질병이 있었다. 약 20년 동안 진통주사로 고통을 완화해야 하는 괴상한 병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매우 심한 신경통으로 평균 한달 정도마다 온 몸이 바스러지는 고통이 며칠씩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일주일이나 끌어도 좋아지지 않았다. 그것은 대퇴내측이나 윗팔 안쪽과 같이 신체피부의 비교적 유연한 곳에 잘 나타났다. 일단 아프기 시작하면 바늘로 찌르고 칼을 연속적으로 후비는 듯했는데 극심한 고통으로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했다. 게다가 환부는 손을 댈 수 없어(피부가 벗겨진 것이 부딪히는 것 같은 통증) 대낮부터 밤까지 나는 고통스럽게 냉기를 들이켰고 이빨을 꽉 물고 눈물을 머금으며 행동거지가 뻣뻣해 졌다.
현대의학은 결코 원인을 검사해 내지 못했고 단지 대량의 진통제에 의지하여 이런 고통을 없앨 수 있었다. 또 그것이 잠시 끝났다고 여기면 죽은 이의 영혼이 사라지지 않듯 괴병은 또 1개월 후에 다시 나타났다. 그것은 이렇게 반복적으로 내 몸에 돌아와 나를 괴롭히고 학대하여 지속적으로 “살며 고통을 받는” 맛을 보게 하였다. 이 병은 기어이 일, 이십년 지속되었는데 사라졌다, 나타났다 했으며 사실 너무나 고통스럽게 나의 의지를 고험하여, 정말 “살아도 미련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하였다.
6. 신기한 경(經)
어쩌면 이것이 바로 파룬궁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유심연공, 무심득공”처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연속적으로 3개월 동안 매일 연공을 빠지지 않았는데 내내 나의 목숨을 괴롭혔던 “신경통”이 뜻밖에도 이 몇달동안 발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기묘적인 것은 치질도 좋아졌다. 본래 전에 수술 후 일정한 간격으로 한바탕 부정기적으로 발작하고 혈변이 나오던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약물에 의지하여 배변이 좋아졌지만 화장실을 가는 일이 편안하지 않았는데 혈뇨조차 보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이전에 소변을 볼 때 쓰리고 배변의 고통 때문에 매번 “화장실 가는” 것은 매번 피를 흘리는 같은 공포였는데 전부 멀리 달아나 버렸다.
나는 매우 놀랐다. 온갖 병이란 병은 일생 동안 나를 괴롭혔고 그간 한의, 양의의 각종 약을 다 먹었고 안 써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정말 어떻게 파룬궁을 연마하여 이렇게 될 수 있을까 감히 믿지 못했다. 나는 마치 신체가 바뀌고 심정, 머리가 모두 바뀐 것 같았다. 나는 이 공법이 너무 좋고 너무나 신령하게 느꼈다. 나를 수련인으로 여기기만 하면 내 일생의 병이 조금씩 떨어져 소실되었고 내재적인 심령은 한걸음씩 제고되었다.
파룬궁 말고 또 무엇이 있어 나의 이런 “재생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가? 나는 황혼의 나이에 수련의 길을 걸어 진정하게 나의 여생을 구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7. 칠순에 뼈가 부러지는 관을 만나다.
이렇게 하여 어떻게도 생각지도 못했던 건강을 향유한 나는 법을 얻은 희열에 빠졌을 뿐 아니라 시간을 다그쳐 매일 대법 서적을 읽어야 함을 알았다. 나는 정말 살아생전에 수련의 내포와 인생의 진리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기를 진정으로 희망했다. 어쩌면 젊었을 때 명리에 대해 매우 담담히 보았기 때문에 대법수련이 수련생에게 명리정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법리는 나로 말하면 능히 상응할 수 있었고 별로 곤란하지 않았다. 말은 비록 이같이 하지만 수련은 필경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수련한지 일 년이 되는 어느 날 딸이 바닥을 청소하는데 나는 막 집 밖에서 옷을 걷어 집안으로 들어오다가 잘못하여 세게 넘어져 곤두박질쳤다. 당시에 엉치뼈가 땅에 부딪혔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했다. 나는 이미 나이가 66세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넘어졌는데도 진료를 받지 않으면 안전하지 않다고 느껴 극심한 통증 하에 마음을 움직였고 딸이 사온 진통제를 먹고 병원의 치료도 하였는데 전후로 일개월을 끌었다.
당시 나는 내가 어째서 이 일생이 늘 허리가 손상되거나 다치는가 하며 매우 답답하여 딸에게 말했다. “내가 전생에 공산당 노교소에서 전문적으로 사람을 때린 공안이 아니었을까?(전생에 내가 무슨 악랄한 일을 하진 않았을까?……. 더욱 지금 아직도 중국대륙에 있는 많은 강제수용소처럼 전문적으로 파룬궁 수련생의 장기를 파는데 정말로 공산당 그것들이 하는 행동은 매우 공포스럽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나는 이번 생에 이렇게 많은 보응을 받을까?”
오히려 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는 고대에 지방 관료로 지낼 때 늘 범인에게 큰 벌을 주었고 더욱이 사람을 많은 크고 작은 판대기로 때리길 좋아해서 지금 이 일생에 늘 엉덩이가 늘 딴딴하고 허리가 나쁘고 전신이 혹형을 받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나의 업력을 소멸할 차례가 되었는데 수련인이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절대 운 좋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몇 년을 지나 내가 70세가 되었을 때 마찬가지로 이 관이 돌아왔다. 새벽에 연공장에서 내가 파룬궁 현수막을 걸고 뒤로 후퇴했을 때 주의하지 않아 다리 아래 돌을 밟았고 신체 균형을 잃고 넘어져 또 허리뼈가 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번에 비해 오히려 더욱 엄중함을 느꼈다. 나는 동수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간 후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극심한 고통을 참고 침대 위에서 법공부, 발정념을 6,7일을 지속했다. 그러나 참기 어려운 고통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고 심지어 뼈가 부서져 근육에 마찰하는 감각을 느꼈다. 그래서 한번은 가서 도대체 뼈가 부러졌는지 아닌지 검사해보자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이렇게 온갖 괴로움에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버티는 바로 그때, 딸이 사부님께서 막 발표하신 신경문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를 가지고 왔다. 나는 경건하게 경문을 몇 번 읽었고 수련인이 소업하며 관을 넘는 내포를 느끼게 되었다. 일반 속인의 병이 나거나 다쳐서 치료하는 과정과 다르다. 나는 수련인이지 속인이 아니다 하며 병원에 가서 검사하려는 생각을 없애버렸다.
8. 생사를 넘자 신의 위엄이 나타나다
막 내가 이 마음을 내려놓고 이 하나의 관을 넘겠다고 결정한 그날 오후 나는 막 잠이 들려고 하는 그 때 왼쪽 귓가에서 어느 남자가 표준어로 위엄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법공부를 많이 하라! 연공을 많이 하라!” 이에 놀라 깨어난 나는 매우 갑갑했다. 침상에서 법공부는 할 수 있으나 어떻게 연공한단 말인가? 딸이 권하며 말했다. “한편으로 느끼면서 한번 해봐요!” 그래서 연공음악을 틀어놓고 매일 아침에서 저녁까지 침대에서 5장 공법을 하기 시작했는데 정오 때는 다시 5장 공법 외에 또 발정념을 하고 시간이 남으면 법공부하는 식으로 이렇게 신체가 고통 받는 중에 일체를 완성했다.
천천히 나는 연공에 힘을 쓰기 시작하여, 침상에서 하면 할수록 좋아졌으며 열흘이 지나자 내려서 걸을 수 있었으며 적어도 벽에 손을 집고 천천히 화장실도 갈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앉을 수 있기 때문인지 이 때문에 어느 날 화장실을 다녀온 후 침상에 돌아와 잠을 자려고 하는데 지난번과 똑같은 음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경서를 침상의 너무 낮은 곳에 놓았다!” 뭐 ? 나는 멍해져서 얼른 딸을 오라고 불렀으며 딸은 나에게 경서를 다른 탁자위에 놓으라고 건의하여 나는 곧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다. 그래서 딸에게 바로 않도록 부축해달라고 하여 나는 법을 공부하려고 했다!
이렇게 나날이 진보하여 한달 후에는 모든 병이 사라졌고 새벽 연공장에 나갈 수 있었다. 나는 기브스도 하지 않았고 수술도 하지 않았고 지팡이나 휠체어나 허리 보호대도 없이 원래의 오장 공법을 단번에 완전히 하였는데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당초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공원에서 운동하던 많은 사람들이 내가 다치는 것을 목격하였었기에 나중에 궁금해서 연공장에 와서 다른 동수들에게 나의 정황을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나 같은 70여세의 노인이 뼈를 이렇게 크게 다쳤으니 어쩌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지금 내가 반듯하게 대법 연공의 대오에 돌아와 있다. 한 노인이 허리를 다쳤는데 이렇게 빨리 회복된 것을 생각해보라, 이것이 대법의 신기한 위력이 아니란 말인가?
9. 정념정행이 근본이다.
신체 건강의 문제를 이야기하게 되면 나는 과거에 정말로 큰 고생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파룬궁을 연마할 때까지 그렇게 밤낮을 힘들게 생명을 부지하는 것은 정말 못 견딜 정도였다. 나이가 6, 70이 되어 비로소 “병없이 신체가 가볍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또 이렇기 때문에 나는 내 전체 운명을 바꾼 대법을 경건히 수련하며 일심으로 수련만 잘하면 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매일 끈기 있게 법공부와 연공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삼년을 매일같이 가부좌하는 연마를 통하여 나는 한 시간 동안 가부좌 할 수 있었고 다시 1,2년 매일 가부좌하는 고통으로 업력을 소멸하는 동안 나는 현재 별로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1993년 출간된 『파룬궁(수정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파룬궁의 수련 층차는 매우 높아 공이 나오는 것이 매우 빨랐으며 공의 표현형식도 매우 강해, 한 편 한 편씩 공이 나오는데 사부님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많은 에너지가 내 신체 중에서 계속 나왔다. 이는 내가 친히 보고 느낀 것이다. 더욱이 내가 발정념에 집중할 때 에너지는 흔히 매우 강하여 사람 앞에서는 무슨 이상한 상태가 나타나지 않도록 내심 자신을 제어한다. 단 사람이 없을 때, 나 혼자서 집에서 연공하거나 발정념을 할 때 이런 것은 모두 수련의 자연현상이며 모두 좋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무슨 상태가 나타나던지 상관하지 않으며 그저 일심으로 발정념한다.
이런 정황 하에서 때로는 나는 『전법륜』중에 묘사된 일부 수련 상태처럼 반응이 강대한 에너지를 내보낸다. 그러나 나는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정법대도 수련 중에 공능이 나타나는 일은 자연스런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 결과 어느 날 내가 발정념을 반 정도 했을 때 돌연 방에 들어온 딸이 긴히 내 두 손을 잡고 놓지 않는 것을 느꼈는데 발정념이 일단락 되어 눈을 떠보니 딸이 걱정하며 나를 보고 말했다. “엄마, 나는 정말 엄마가 날아갈까 봐 두려웠어요!”
10. 고생 끝에 낙이 오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데 이 몇 년 한걸음씩 수련한 과정을 통해 세인들이 이 대법을 얻으면 정말 너무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이 대법이 아니라면 공원에서 원극무를 추던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에 내 몸이 나빠 약을 먹은 한평생을 생각해보라. 나중에 70여세 되어 넘어졌는데 옛날의 신체 같으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설사 당시 지탱했더라도 후유증이 내 생명을 앗아갔을 것이며 어디 내가 건강히 지금까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노인들이 대법수련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최대의 복이라고 여러분에게 알려주려고 한다. 나처럼 65,6세에 비로소 파룬궁을 알게 되어 금년에 71세에 이미 완전 환골탈태했으니 정말로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도 모든 인연 있는 사람이 수련하여 나와 같은 수확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의 일부를 개방해 독서회 장소로 제공해 사람들이 공동으로 제고할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었다. 현재 매주 금요일 오전에 사람들이 함께 모여 연공, 법공부하며 서로 간에 제고하며 배움과 수련을 비긴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정말 고생인데 수련은 그런 고통의 인생이 길을 바꿀 수 있다. 수련은 사람에게 아무 걱정 없이 정말 자재하고 확 트이고 존엄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한다! 나는 때로는 과거의 일부 옛 친구들이 하루하루 늙고 병들고 심지어 먼저 갔다고 듣는데 그들을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어쩌면 하루도 편하지 않는 속인생활을 지내며 한 무더기 액운을 원할지언정 이렇게 좋은 대법을 왜 얻으려 하지 않는가?
만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인연이 있다면 내 인생을 참고하여 절대 업력이 나타기를 기다린 후에야 수련하겠다고 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때는 아마 너무 늦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기원에서 전재)
발표시간 : 2007년 6월 23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7/6/23/445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