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대법제자
[정견망]
아래에 주로 남성 각도에서 스스로 색욕심을 제거한 방면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려 한다.
어떠한 생명과 종족을 놓고 말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이 바로 생존, 연속, 발전이기 때문에 후대를 번식하는 것은 변함없는 당연지사다. “속인사회 중에는 부부생활이 있어서 비로소 인류사회로 하여금 후대가 번창하게 할 수 있다.”[1] 그렇다면 후대 번식을 위한 모든 행위 역시 아주 정상적인 행위고 이는 크게 비난할 것이 없다.
사람이 존재하는 층차는 우주 중 가장 낮으면서 가장 더러운 층차다. 예전에 이 층차에는 인류가 없고 주로 그러한 추악한 ‘외계인’들이었다. 그것들이 후대 번식을 위해 진행하는 각종 교배 행위와 그것들 신체의 생리 특징을 포함해 역시 우주에서 가장 낮은 층차의 특징을 체현했으며 역시 가장 저급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급생명이 후대를 ‘번식’하는 것, 더욱이 신이 생명을(혹은 세계) 창조할 때의 행위는 지극히 위대하고 또한 수승(殊勝)한 것이며 그것은 홍대한 법력과 위대한 지혜, 위덕의 체현이다. 그러나 가장 낮은 층차에 도달해 생명이 후대를 번식하려면 반드시 이 층차의 표준에 부합해야 했고 주로 생식기관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접촉하는 방식으로 부모 쌍방의 생명요소, 정화를 포함해 하나로 융합시켜 후대를 창조하는바, 그 구체적 행위를 표현할 때는 오히려 가장 저급적이어서 고급생명의 방식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다! 더욱이 사람은 신과 근접한 형상의 신체를 지니고 그러한 교합 행위를 진행하는데 이러한 행위만으로도 신의 눈에서는 확실히 지극히 추악하고 더러우며 심지어 ‘받아드릴 수 없는’ 행위다.
왜냐하면 사람은 신과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고 사람이 제 딴에 대단하다고 여기는 그러한 것을 멀리 초월했으며 또 고층 빌딩의 가장 높은 곳에서 거리의 인파를 내려다보는 그러한 감각도 아니다. 완전히 부동한 생명이고 안에서 밖에 이르기까지, 사상에서 언행 거동에 이르기까지, 능력과 지혜에서 생존 상태와 생활 방식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극히 크다. 그렇다면 아마도 천상의 신은 개체 창조이든지 아니면 여러 신(남, 여)들이 공동으로 협조해 생명을 창조하는 방식이든지 간에 반드시 무척 현묘하고 아름다우며 위대하고 수승할 것인데 그것은 마치 그들 그 세계 모든 중생들에게는 성대한 명절과 같다!
그럼 왜 이러한 인류의 후대번식 방식을 ‘설계’했는가? 왜냐하면 사람이 존재하는 층차가 바로 이러한 저급하고 모든 다른 생물과 거의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 어떠한 생물도 교배할 때 ‘고상함’ 혹은 ‘고귀함’을 표현하지 못했고 종족을 연속시키는 구체적 행위는 모두 저급하고 무척 저급하며 절대로 신과 같은 그러한 위대함과 수승함이 아니다. 이는 마치 일종의 처벌과 같은데 필경 이는 우주의 가장 낮은 층차이기 때문이다. 마침 이런 행위는 신의 눈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사람의 생식기는 모두 최대한 은폐했고, 다시 말해 인체의 가장 은밀한 곳에 ‘설계되어’ 인체의 가장 더러운 배설기관과 매우 근접해 있거나 혹은 공용으로 사용하며 그 외형 역시 모두 추악하다. 그리하여 옷을 입는 주요 기능이 바로 그것을 가리는 것이다. 그런 후 비로소 보온, 방어 등을 한다. 그러나 동물은 이런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만이 신과 같게 생겨서 신으로 수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러운 기관, 저급한 행위, 저급한 표정, 미혹되고 난잡한 염두, 사람의 성적 교합 시의 이른 바 쾌감을 느낄 때 짐승과 다름이 없다. 오히려 신과 같은 외형의 신체를 지니고 행하고 있으니 이는 고급생명에게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러한 교배행위는 후대번식을 위한 것으로 이는 아주 중요한 임무다. 그리하여 비록 그렇게 저급한 행위 자체가 일정한 업을 짓지만 기본적으로 ‘공과 죄가 서로 상쇄된다’. 그리하여 사람 이 층차에서는 당연지사로 됐다. “인류는 바로 이렇게 발전한 것으로서, 인류사회에는 곧 정(情)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속인으로 말하면 천경지의(天經地義)이다.”[2] 그리하여 성생활의 근본 목적은 아이를 낳기 위한 것이지 현대인의 변이관념이 생각하는 무절제한 욕구가 아니다. 성해방, 난잡한 성행위, 근친상간 거기에 동성 사이에 발생하는 성행위 등 각종 변이적이고 변태적인 행위는 각양각색이다. 자고로 더욱이 중국인들은 욕구 절제를 강구했는데 성욕, 방사는 과도하거나 빈번하지 말아야 하고 공개적으로 담론하고 선전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생육과 후대번식을 주요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생활은 모두 업을 짓고 복덕을 소모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절제해야 한다. 욕구를 종용하면 자신도 해치고 몸도 상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한 점은 신은 사람의 색욕심에 대해 아주 중하게 보는데 더군다나 수련인을 겨냥해서다. “우리 우스갯소리 한마디 하자. 만약 어떤 사람이 속인 중의 칠정육욕(七情六慾)이 다 있는데 그에게 위로 올라가서 부처가 되게 한다면, 여러분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가 그 대보살(大菩薩)이 이처럼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는 사념(邪念)이 생길지도 모른다.”[3]
신은 줄곧 인류를 가르치고 있고 예법과 예절을 규범화하고 있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통제하고 속박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마성의 일면을 억제하고 사람 자신도 일정한 명백한 일면이 있어 짐승처럼 제멋대로 교배하지 않는다. 진정한 후대 번식을 위한 것이라면 연애와 혼인의 많은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신혼방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는 지금이나 고대나 별 차이가 없다. 욕망은 신체로 인해 자연스럽게 존재하지만 평소 예법으로 이치적으로, 이성적으로 속박되다가 정(情)이란 촉매 작용 하에 석방되고 확대된다. 그러나 사람은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외부에 의해 점차적으로 주입되고 더욱이 청춘기에 진입한 후 생리상 발육과 동시에 사상 중에서도 ‘정욕에 눈뜨기 시작한다’. 진정으로 남녀유별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이른 바 인체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시작하며 자신의 감수를 결합한 후천 관념, 더욱이 각종 예술형식을 통한 시각과 청각은 사상 중에 ‘인상’을 남긴다. 스스로 일어난 환상, 각종 스타와 우상에 대한 숭배와 미련, 혼잡은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 표준과 추구 목표를 형성했고 또한 ‘색(色)’심이 생겨나게 한다. 색심에 성욕을 가하면 색욕이다.
사람의 성욕은 아주 강한 것이고(필경 인류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욕망 중 한 가지) 일단 자극받으면 마시고 먹는 욕망보다 더욱 크다. 아울러 자극이 클수록 인이 형성되고 통제가 더욱 어렵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원인이 있다. 다른 공간의 불량하거나 사악한 요소도 작용을 일으키고 현대 인류사회의 혼란과 변이도 타락을 도와주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표면 육신이 있기만 하면 이런 욕망이 생기는데 마치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목마르면 마셔야 하는 것과 같다. 다만 자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강대한 정념이 있어야 그것을 억제할 수 있고 그것이 갈수록 옅어질 수 있으며 거의 사라지는 상태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련인이기에 사부님께서 이 일체를 연화해주시기 때문이다.
만약 오로지 욕망만 있다면 아마도 그렇게 통제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 색심이 있고 강대한 촉매가 있기 때문에 욕망이 배로 가중되는데 그 자체는 사상관념에 속해 있고 더 깊이 더 은폐적이면 더욱 통제가 어렵다. 나이가 들면서 생리에 변화가 생기고 사람의 성욕은 점차적으로 감소되지만 색심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누적되면 쉽게 감소되지 않고 심지어 더 은폐적이고 쉽게 표현되지 않아 느끼기 쉽지 않다. 속인들에게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모두 있다”란 말이 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색심이 있지만 오로지 아주 어린 아이가 상대적으로 비교적 순진하여 거의 색심이 없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아주 빨리 형성된다. 색심은 첫째 성욕을 자극 유발하고 커지게 만들며, 둘째는 색심 자체가 강대한 사상업을 형성해 사람의 대뇌를 점차적으로 점령한 후 반대로 사람을 통제한다. “만 가지 악에서 음란함이 가장 첫째다.” 인류의 아주 많은 죄업은 모두 색욕과 관련이 있다.
비록 사람이 그런 일종 가장 저급한 방식으로 후대를 번식하려면 색심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고 청춘 남녀가 가정을 이루기 전에 상대를 찾아 연애하는 시초 동력의 대부분은 색심이다(사실 고대인들은 혼전에 연애하는 이 과정이 없었다). 결혼 후에 아이를 키우고 가정생활을 유지하려면 역시 일정한 색심, 정, 사랑이 필요하다(물론 본질은 인연이고 더 많이는 책임이다). 속인으로서 색심이 있는 것 역시 필연이고 정상적이다. 그러나 현대 인류의 색심은 보편적으로 너무나 크고 너무나 과하며 너무나 범람했다. 신이 사람에게 준 배치와 규범을 너무나 멀리 초월했다!
말법 난세에 마들이 무리를 지어 나와 세간을 타락시키는데 색마가 가장 강대하다. 후대 번식이 아니라 쾌락적인 성생활을 누리기 위해서이고 그 더러운 행위 자체가 바로 업을 짓는 것이다. 색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방종하도록 부추기고 거대한 업력을 짓게 해 결국에는 인류가 훼멸되는 큰 요소로 되게 했다. 수련인의 제고에서 색마 역시 강대한 장애다. 첫째는 업을 짓고 난에 난을 가하고, 둘째는 그러한 행위는 신이 가장 더러워하는 것으로서 교란을 형성하고 박해받는 구실이 된다.
예술형식에서 인류의 변이를 부추긴 것 외에 색마도 인류를 조종해 옷차림에서 변이되고 있다. 이는 사람마다 모두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고대인의 장식은 천상과 비슷한데 전신 혹은 대부분 신체를 가리는 넓은 포, 치마, 저고리, 자락, 셔츠, 바지 등이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운 옷이다. 현대인의 의상은 전부 나체가 되길 원하고 갈수록 더 노출되기를 원한다. 거의 전라에 가깝게 신체 곡선을 드러내고 몸을 더욱 조이는데 사실 타인을 유혹하기 위함이며 표현은 갈수록 선명해진다. 현대인도 갈수록 내심의 수양보다는 갈수록 외모를 보고(얼굴을 보는 습관) 갈수록 허풍을 떨고 조작해야 하며 또한 ‘미(美)’ 에 대한 원시적인 순박한 인지와 판단을 개변했다. 이 속에는 또 외계인이 배후에서 참여한 것도 있는데 공상과학 영화에서 이미 몸에 달라붙는 외계인의 의상을 충분히 보여준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종족 번식을 위한 수단과 지구에 온 목적에 아주 명확한 암시가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저도 모르게 패션의 유행이라는 명의로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주고 사람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점차적으로 자신의 ‘자연스러운’ 관념을 형성했다.
노출의상을 입는 그 사람들(여성)은 모두 업을 짓고 있는데 더욱이 스타들의 영향력은 광범위하게 더욱 큰 업을 짓고 있다. 여름이 되기만 하면, 집을 나서기만 하면 거리 곳곳마다 그러한 노출족이라 만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다. 당신의 눈을 유혹하고 당신의 색심을 가중시키며 당신의 욕망을 자극한다. 겨울이 되면 더욱이 최근 몇 년 동안 여성 의상에서 가장 유행했던 다리를 날씬하게 만드는 레깅스, 스키니진 혹은 가죽바지다. 심지어 남성의상도 다리를 날씬하게 하고 몸을 조이는 것이 유행한다. 여성들은 날씬한 다리를 추구하고 다리가 가늘어서 깡마른 건강하지 못한 ‘병태’여야만 비로소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인류가 더 우수한 후대를 번식 배양하기 위해 반려자를 고를 때 키가 크고 건장한 사람을 선택하며, 긴 다리는 자연히 각광을 받으며 또한 이성을 유혹하는 한 가지 ‘매력’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사람이고 오로지 사람의 다리만이 그렇게 둔하여 길을 걷고 달릴 때에 사용된다. 사람보다 높은 모든 생명은 날줄 알거나 자유롭게 떠다니는데 누가 무슨 ‘긴 다리’, ‘아름다운 다리’를 대수로워 하겠는가.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은 모두 이런 신체가 존재하지 않고, 그는 떠오를 수 있으며, 그는 또 크게 변하거나 작아질 수도 있다.”[4]
그리고 현재 유행하는 셀카에서는 송곳 같은 뾰족한 얼굴과 큰 눈을 돌출시킨다. 이런 유형에는 ‘그레이’형 외계인이 있었는데 가는 팔다리에 거대한 머리통, 눈, 뾰족한 턱, 아주 작은 입이다. 요즘 여성들이 유행하는 일종 전형적인 차림새가 바로 이렇다. 몸 전체를 검은 색 옷과 신발, 가방으로 감싸고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창백한 얼굴색, 시커먼 눈화장에 아주 긴 가짜 속눈썹, 일체를 멸시하는 듯한 냉혹한 표정, 시커먼 가죽바지 혹은 레깅스에 하이힐을 신고 허리를 좌우로 흔들며 고양이 걸음을 한다. 뿜어내는 것이 전부 음성적인 메시지인바 그것은 일종 마성의 표현이다. 선(善)이 조금도 없고 더욱이 신이 사람에게 가르쳐준 진정한 아름다움이 없는데 이를 형용한다면 바로 ‘요괴’다. 현재 ‘백골정(白骨精-서유기 속 요괴)’과 ‘요정’ 모두 긍정적인 단어가 됐는데 그런 차림새를 의미한다! 아울러 절대 다수 사람들은 이것이 아주 정상적이고 유행일 뿐이라고 여긴다.
동서고금 모든 민족의 전통복장 복식을 관찰하면 이러한 것이 없다. 더욱이 중국 고대 그림 속의 불도신(佛道神)은 넓고 큰 도포를 입고 만물 중생을 포용하는 점잖고 온화한 기세가 깃들어 있다. 일부는 복식이 화려하고 일부는 간결하다. 구름을 가볍게 밟은 의젓한 자태의 그 미묘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션윈 무대 위 단원들의 의상과 표현은 바로 가장 근접한 일종 표현이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위에서 묘사한 현대인의 차림새는 마치 발끝으로 땅을 딛는 것처럼 신선을 배우려는 것 같지만 머리가 무겁고 발이 가벼워 흔들거리는 것이 바람에 날아갈 듯한 모습이다. 남보다 더 높게 일체를 멸시하듯이 하려다가 오히려 경추가 상하고 발가락이 비뚤어져 건강을 해친다. 더욱이 대범하고 사심 없는 그러한 자비가 없으며 자아를 드러내는 사심만 있다. 현재 심지어 ‘여신(女神)’, ‘남신(男神)’이란 단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대로 사용하는데 엄중하게 말하면 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양복 정장도 중국 고대 의상보다 보기 좋지 못하고 편안하지도 않다. 그것 역시 근 현대 인류사회의 변이에 따라 생긴 것으로써 인류에 적합하지 않으며 과학기술과 유사하다.
그리고 현재 인터넷 발달은 좋은 작용과 나쁜 작용 모두 있는데 대량의 색정적 메시지가 모두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고 있다. 사람 눈으로 보는 것 자체가 모두 가상이지만 인류는 또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고 가상에 또 가짜를 만든다. 예를 들어 인터넷의 그러한 이른바 미녀는 모두 층층의 날조를 통해 만들어졌다. 촬영 전의 화장, 조명, 시각, 착각의 운용에 촬영 이후 컴퓨터 처리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켰으며 사람들은 사기 당하기를 원한다. 물론 이는 색마와 기타 사령(邪靈)이 배후에 나쁜 짓을 하는 것이고 또한 사람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전혀 자신을 판단할 수 없어서 추락해 조성된 것이다.
이런 것은 이미 무척 변이된 ‘아름다움’이고 색욕심으로 인해 더 많은 사악한 부정적인 작용을 체현했다. 전통적인 윤리 규범은 기본상 포기했고 성욕을 마치 배고프고 목마른 기본 생리 요구같이 대하고, 사람은 만족 혹은 발설을 위해 제멋대로 아는 사람이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막론하고 잠자리를 가진다. 각종 하룻밤 사랑, 혼외 사랑, 궤도를 이탈한 현상의 비례가 갈수록 높아져(이는 또 매음, 매춘을 포함하지 않음) 전통가정과 관계되는 안정에 거대한 충격을 주었다. 외계인은 인류 같은 가정 조직이 없고 그것들은 아주 많이는 마치 개미 혹은 벌처럼 그렇게 집단으로 번식하는 사회 구조다. 그것들은 사람을 조종해 결국에는 사람을 대체하기 위해 유전자 기술로 복제하는데 인류 가정을 훼멸하는 것도 그 중 일보다. 물론 이는 이미 불가능해졌지만 영향 주는 요소는 여전히 존재한다. 수련인에 대해 사부님 법에서 일찍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만약 당신들이 부부가 아닌데, 성행위가 있다면, 이는 당신이 곧 한 가지 가장 더러운 일을 하는 것으로 이는 신이 절대로 인정할 수 없으며 어떤 신도 인정할 수 없다.”[5]
속세가 험하여 이 방면에서만 각종 요소가 갈래갈래 족쇄처럼 수련인을 묶고 있다. 그것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전혀 제고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려면 어렵다. 일부 사람들의 일부 요소는 매우 깊게 파급되어 반복적으로 관을 넘어야 하고 줄곧 제거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것을 진정으로 해결해주시는 이는 모두 사부님이시다. 개인적인 경험을 놓고 말하면 색욕심을 겨냥해 수련인은 가장 표면, 주로 자신 주위 환경을 청리하는 것이다. 삭제할 것은 삭제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불량한 일체 메시지와 근원을 되도록 피해야 한다. 평소에 사교와 접촉 중에서도 평화롭고 이상적으로 담담한 심태를 유지하고 남녀는 절대로 구별이 있으니 반드시 거리를 유지하고 왕래에서는 절제가 있고 언어는 수구(修口)해야 한다. 선하게 대하되 정을 움직이지 말고 냉정하고 또렷하게 정념으로 수시로 청리하고 억제해야 한다. 거리를 걸을 때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모두 ‘이동하는 사람 벽’으로 여기고 눈으로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녀(그)들이 어떠한 차림새를 하든지 모두 ‘보고도 보지 못한 듯’하고 곁눈질도 안 되며 일사일념을 바로 잡아야 한다. 욕망이 올라올 때 강제로 참고 분간해보면 사실 자신이 아니다. 그 때는 발정념으로 억제하거나 아예 연공하고 법공부를 한다.
여성수련생도 옷차림에 주의해야 하고 사회에서 유행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 속인이 여기는 아름다움과 추악함은 반드시 맞는 것이 아니다. 무량한 뭇 신들이 모두 우리를 보고 있는바 무대의 중심, 전 우주의 초점에는 엄격한 요구가 있어야 한다.
젊은 수련인, 더욱이 배우자를 찾아야 하는 압력이 있는 젊은 미혼남녀들은 이 방면에서 더욱 주의해야 한다. 절대로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혼인에 대해 자연스러움에 따르고 극단으로 가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비록 결혼해 성관계가 발생하더라도 후대 번식을 위한 것이고 미래 인류에 엘리트를 남겨두는 것으로 물론 잘못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가는 모두 자신의 깨달음과 방법이 있다. 사실 일체 모두 사부님께서 배치하시고 있고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표면 형식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설법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제자: 왜 정은 이렇게 버리기 어렵습니까?
사부: 내가 당신에게 알려주는데, 사람이란, 당신의 이 껍데기는 이 정 속에서 생기고 태어나서부터 이 정 속에 있다. 당신의 껍데기를 구성하는 이 신체 세포는 바로 이 정의 환경 속에서 생긴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이탈했다면 당신은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사람이 정에 집착하는데 사실은 피동적이지만, 사람은 주동적이라고 여긴다.”[6]
“이 관념을 제외하고 사람은 이 공간 중에서 또 하나 특정한 환경이 있는데, 바로 정(情)이다. 삼계 내는 모두 정에 잠겨 있다. 당신이 이 정을 떼지 못하면 당신은 바로 이 속에 있게 된다. 실제 당신들이 해야 할 것은 바로 어떻게 이 정을 이탈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아주 명확하게 말했지만, 수련시간이 짧은 사람은 해내지 못하며 노수련생이라도 원만을 이루기 전에는 완전히 해내기가 몹시 어렵다. 수련 중에서 자신에 대해 엄격히 요구하며 좋지 못한 그런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대법수련 중에서는 일체를 개변할 수 있다. 당신이 끊임없이 책을 보고 평소에 또 자신에 대해, 되도록 한 연공인으로서 자신에게 요구한다면, 당신으로 하여금 모든 것이 변화가 일어나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법이 당신을 용련(熔煉)하고 있기 때문이다.”[7]
개인의 깨달음이고 층차의 제한으로 부족함이 있다. 여러분 감사하다. 허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미국 동부법회 설법’
[6] 리훙쯔 사부님 저작: ‘미국 서부법회 설법’
[7] 리훙쯔 사부님 저작: ‘미국 서부법회 설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