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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의 일선기자

작자/ 자연

【정견망】

우연한 기회에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처음 비엔나에서 열린 파룬궁 반박해 집회장에서였다. ‘전 세계에서 장쩌민 고소를 성원한다.’ 나의 카메라에 야밤중의 촛불에 평정하고 예쁜 얼굴이 포착되었다. 나는 그녀가 중국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것을 알았다. 나중의 교류 중에 그녀가 방금 국내에 ‘장쩌민 고소’ 서류를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직업적으로 민감한 나는 그녀에 대해 흥미가 일어났다. 말하는 중에 그녀는 늘 하하 웃으며 평정하고 자재로움이 노출되었다. 나는 좀 의심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그녀는 용기 있게 ‘장쩌민 고소’를 했을까. 배후에는 어떤 일이 있는 것일까? 때문에 나는 약속을 잡았다. 그녀는 러시아 번역가인 전수로(田秀露)였다. 이야기 중에 나는 놀랍게도 국제 매체 상에 널리 이용되는 파룬궁 진상의 장면이 원래 그녀가 찍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대법이 널리 전해질 때 초기의 증인

전수로는 그녀의 이름처럼 빼어나고 시원했다. 42세의 그녀는 보기에 실제적으로 많이 젊어보였다. 장춘 사람이었다.

1995년 대법과 인연을 맺었다. 그때 파룬따파가 전해지는 초기를 맞아 파룬궁의 병을 고치는 효과는 민간에서 ‘신화’로 알려져 있었다. 그때 22살이었는데 한창 젊었을 때이지만 몸은 허약하고 병이 많았다. 인연이 닿아 파룬궁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후 전설에서 나오는 파룬궁의 신화는 그녀의 몸에 기적을 나타내었다. 원래 병 많고 신경쇠약, 또 심장병 등 여러 병이 있던 그녀가 수련 후 짧은 시간에 각종 병이 다 날아가 버렸다. 그때부터 그녀는 약단지와 작별했으며 새 생명을 얻었다.

“나의 심신에 천번지복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신체상 정신상. 지금까지 대법 수련을 20년 하면서 약 한 알도 먹지 않았습니다.”

병이 없어지고 건강해지며 대법과 인연을 맺는 이것이 대다수 파룬궁 수련생의 입문방법인데 그녀도 예외가 아니었다. 장춘은 대법의 고향 발원지이다. 그곳 수련인과 인연이 있음은 위로가 되었다. 대법은 명성이 만집에 이르렀으며 상화한 수련 환경, 매체의 바른 선전보도, 파룬궁의 수련인의 참신한 생활 상태와 사람의 감동적인 일은 사회를 변화시켰다. ‘전선인’을 사람마다 노래 불렀으며 그녀는 다른 사람처럼 수련 중에 비할 데 없는 행복을 느꼈다. 그때 불완전한 통계로 전국에 일억 명의 파룬궁 수련자가 있었다.

하지만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 것은 결코 그리 평온할 수 없었다. 수련인 수가 날로 늘어감에 따라 무신론의 중공 정권은 점점 두려워졌고 파룬궁은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그때 파룬궁은 홍콩, 마카오, 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사대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전국 대소 도시는 가는 곳마다 연공장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국외의 서양인 제자들은 이미 장춘을 고향으로 여기기 시작하여 ‘고향’을 찾았다. 파룬궁 행렬속의 외국인 얼굴들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정부가 파룬궁을 잘 알도록 하기 위해 스웨덴에서 온 서양 수련생은 경찰과 대면했다. 그들은 직접 경험으로 파룬궁의 진상을 말했다.

그녀는 “그때 장춘에 많은 파룬궁 수련생이 왔는데 모두 ‘경’을 얻으러 온 사람이었다. 국내 국외에 다 있었습니다. 장춘 지역에 법을 배우는 사람이 많았고 경험도 풍부하여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류했습니다.”고 말했다.

1999년 새해가 지난 후 형식에 좀 변화가 있었다. 파룬궁 연공장에는 영문 모를 교란이 생겼고 각지에 돌발 사건이 빈발했다. 심지어 경찰이 폭력으로 수련생을 구타하는 일도 생겼다.

“그때 4월경이었는데 파룬궁을 공격하는 일이 날마다 심해지고 있었어요. 특히 텐진대학 교육원 잡지에 파룬궁을 헐뜯는 글을 발표한 후 그곳 파룬궁 수련생이 기관에 가서 사실을 반영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이 나와서 강제로 흩어버리고 구타했으며 40여명을 잡아갔습니다. 수련생들이 가서 교섭했으나 소용이 없고 북경에 가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4.25 상방이 된 것입니다.”라고 그녀가 말했다.

“4.25” 파룬궁 상방은 세계적 진동을 일으켰습니다. 바깥세계에 중국의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가장 평화롭고 이성적인 상방으로 국제사회의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오히려 주석 장쩌민에 의해 전부 부정되었습니다. 같은 해 7.20 장쩌민 혼자의 고집으로 명을 내려 전국 파룬궁 수련생들을 다 체포하게 된 것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하늘이 무너져 내렸으며 갑자기 방송 TV 신문 등에서 하늘땅을 덮듯이 파룬궁에 먹칠을 했어요. 마치 공기 중에 압력이 가득 찬 것 같았고 사람마다 다 긴장했으며 보통 백성들은 다 또 한 차례 정치 운동이 시작한 것을 느꼈습니다.”

숨은 아픔이 있는 중국은 그때 ‘6.4 천안문’의 그림자가 아직 백성들의 마음속에 무거울 때였으며 피비린내가 아직 흩어지지 않았고 공포가 여전히 있었습니다. 파룬궁이 장차 무엇을 만날 것인가? 장쩌민은 호언장담 했습니다. “3개월 내에 파룬궁을 소멸한다!” 국가의 전 기구를 다 동원하고 민중 운동은 전면적으로 전개하며 사람마다 관을 넘어야 하고 파룬궁을 비판하여 중앙과 뜻을 일치해야 했습니다.

“우리 장춘제자는 모두 길림성 위원회에 가서 상방했는데 많은 사람이 갔습니다. 정부는 대규모 경찰을 출동시켜 사람의 벽을 만들었으며 무력으로 쫓아내고 폭력으로 구타하고 수련생을 경찰차에 실었습니다. 이전에 이런 장면을 본적이 없었는데 매우 떨렸습니다.”

지난날의 기세가 광대하던 파룬궁 단체 연공 장면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모든 연공장은 강제로 없어졌으며 각지 소장과 주요 책임자는 체포되어 장춘은 ‘중점재난구역’이 되었습니다.

“나도 거대한 압력을 느꼈습니다. 나는 길림성 위원회 상방에서 돌아와 보니 집에 몇 년간 걸려 있던 사부님의 법상을 아버지가 떼어내 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겁을 먹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사부님의 법상을 안고 울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대법이 수난을 당하고 악독하게 비방 모함을 당하다니, 내가 대법에서 이익을 얻었으니 이 시기에 나와 대법에 바른 말을 할 책임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북경으로 가서 상방하려 했고 속으로 이미 결정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그 후 나는 직장을 사직했습니다.”
1. 북경 도착하여 천안문의 일선 기자가 되다

북경은 중국 백성들이 늘 동경하고 관심이 있는 곳이다. 천안문은 신성하고 위엄과 권력을 대표하며 사람들은 경외하며 그것의 메아리를 기대한다. 파룬궁 수련생은 또 한 차례 상방을 시작했다.

“나는 당시 북경에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습니다. 어쩌면 ‘6.4’같은 피비린내 나는 진압이 있을 수도 있었는데 이 당이 인민들에 대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저의 머릿속에는 시종 설사 생명을 잃더라도 대법을 보호하자는 일념뿐이었습니다.”

북경은 중국 정권의 중심지이며 환경이 민감하다. 개인은 조직에 복종하고, 조직은 중앙에 복종한다. 백성들은 체포되고 파룬궁 수련생과 대립이 생겼다. 북경의 크고 작은 여관들은 파룬궁 수련생의 숙박이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여관의 창문에는 ‘파룬궁 수련생은 숙박불가!’라는 스티커가 붙었다.

“우리는 여관을 잡을 수 없어 도처에 다녔으나 어디든지 가는대로 머물렀으며 어디를 가든 다 대법제자를 만났습니다. 사람들은 앉아서 함께 교류 했습니다. 당시 국내 형세는 매우 혼란했습니다. 어떤 정부의 특무는 내부에 들어와 가짜 소식이나 가짜 경문을 전하고 어떤 또 많은 수련생은 북경 상방에 대한 부동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북경에서 느낌이 완전히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대법을 보호하는 신성함으로 내심 부단히 승화했으며 일체를 내려놓은 희열감은 이전에 없었습니다.”

10월의 북경은 밤이 되면 춥고 바람이 찬데 수련생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은 배운 것이 학식이 매우 높고 또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 일체를 다 내려놓았습니다. 방을 잡지 못해도 상관없고 따뜻한 밥을 먹지 못해도 괜찮았습니다. 풍찬노숙하며 역 광장, 큰 길가, 다리 밑, 옥수수 밭, 교외의 황량한 들판, 머리만 들면 수많은 별이 보였습니다. 몸에 두른 것은 비닐 한 장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시절의 경험을 회억하여 우리로 하여금 고대 수행자의 ‘떠돌아다니는 탁발’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는 고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처참한 것은 체포되거나 시시각각 경찰을 피하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방법을 대어 방을 빌렸고 외지에서 온 많은 제자들이 머물 수 있었습니다.”

경축일 전 또 중국인의 정치 민감기가 되었다. 파룬궁 수련생에게는 ‘국난일’인 셈이다. 전국 각지의 파룬궁 수련생은 재난에 직면했다. 북경에서 대규모 체포가 시작되었고 전수로는 체포되었다.

10월 중국 국가 주석 장쩌민이 프랑스 기자의 인터뷰에서 제멋대로 말을 했는데 어떤 법률 근거도 없이 단정적으로 파룬궁을 ‘사교’라고 말했다. 10월 28일 파룬궁 수련생은 ‘중국대륙 파룬따파뉴스 발표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외국 기자의 인터뷰를 받아들였다. 이번 발표는 국제사회에서 즉시 진동을 일으켰으며 국제매체는 그것을 ‘중국국가 주석 장쩌민에게 뺨을 한차례 때렸다’ 라고 표현했으며 파룬궁 진상은 신속히 폭로되었다.

“발표 이후 북경에 상방하러 온 사람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체포라는 것을. 하지만 대법제자들은 정의를 위해 나아가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본래는 사람들이 함께 일어날 수 있으니 이 일은 매우 빨리 끝이 날 것이다. 파룬궁 문제는 곧 해결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정은 이것과는 매우 멀었습니다.”

전수로는 잡혀 장춘으로 보내져 구류 15일을 받았다. 나온 후 그곳 수련생과 예전처럼 압력을 무릅쓰고 바깥에서 연공하고 단체 법 공부를 했다. 어느 날 그녀는 법에서 상생상극의 법리를 보고는 감동을 받았다.

“바로 상생상극(相生相極)의 이치가 존재하기에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곤란이 있기 마련이다. 간고한 노력을 통하여 곤란을 극복함으로 하여 하려는 일을 성사하게 됨으로써 당신은 비로소 얻음이 쉽지 않음을 느끼며 당신은 비로소 얻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게 될 것이고 사람은 비로소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상생상극(相生相極)의 이치가 없이 무슨 일이든 하기만 하여 곧 성사된다고 한다면 당신은 사는 것이 무료(無聊)함을 느낄 것이고 행복감이 없으며 승리후의 희열도 없게 된다.” <불성과 마성>

“나의 머리에 갑자기 들어온 것은, 대법을 실증하는 이 일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다. 기나긴 과정이다! 나는 당시 결가부좌 하여 앉은 그 자리에서 단번에 일어섰습니다.”

그녀는 놀랐다. 대법을 실증하는 이 일은 매우 긴 시간, 혹은 십몇 년 요할 것임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먼 계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저축은 다 써버렸고 이후는 어떻게 하는가? 일거리를 찾아야하지 않을까? 바로 이때 그녀의 대학 선배가 북경에서 전화를 하여 북경에서 일을 하라고 했다. 인연이 닿았기에 재차 북경으로 와서 순조롭게 월급이 높은 번역 직장을 얻었다.

“그때 2000년 초인데 북경에 도착하여 상방하는 대법제자가 매우 많았으며 국내, 국외의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대법제자가 하는 가장 직접적인 일은 천안문 광장에 가서 플래카드를 걸어 사람들에게 ‘대법이 좋다’를 알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북경에 거주하는 제자는 바로 자료를 인쇄하고 집집마다 전단지를 나눠주며 벽에 ‘파룬따파하오,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 달라, 대법은 결백하다’ 등 표어를 붙이는 일이었습니다. 주의를 끌 수 있는 것이면 곧 했습니다. 기억에 당시 어떤 사람이 큰 나무에 진상 플래카드를 걸 생각을 내었고 사람들은 즉시 좋다고 하며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쓰고 거는 사람은 걸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상 스피커를 설치하는 것을 생각해냈고 즉시 행동에 옮겼습니다. 전체적으로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내었습니다. 사람들은 매우 즐겁게 일했습니다.”

힘을 합해 협력하여 대법을 보호하면서 그녀는 북경에서 정체의 힘을 느꼈다. 이 기간 그녀는 가장 가슴 아픈 일을 당했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수련 길은 다른 사람과 같지 않게 되었다.

“그 때 외지에서 북경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각종의 검문을 돌파하고 층층으로 가로막혔습니다. 경찰은 가는 곳 마다 파룬궁을 수색하고 잡아서 간수소에 보냈습니다. 간수소에서 어떤 제자는 맞아서 부상당하고 어떤 제자는 단식으로 피골이 상접했으며 어떤 사람은 맞아서 생명이 위험에 빠졌습니다. 간수소에서는 책임이 두려워 중병이 든 수련생을 밖에 버리기도 했습니다. … 또 천안문 광장에 대법제자가 플래카드를 펼치면 경찰은 벼락같이 달려가서 구타했습니다. 나도 직접 보았는데 그때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일체를 기록하여 사악을 폭로해야 한다!”

역시 이 기간에 사부님은 <이성>에서 제자에게 알려주셨다. “그것들이 수련생과 대법(大法)을 박해하는 데 채용한 행위는 모두 극히 사악하고 떳떳치 못하며 폭로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지(理智)로 법을 실증하고, 지혜로 진상(眞相)을 똑바로 알리며, 자비로 홍법(洪法)하고 세인을 구도하는, 이것이 바로 각자(覺者)의 위덕을 세우는 것이다.”

그 후 그들은 주도면밀한 준비와 안배를 거쳐 소형비디오와 바늘구멍 카메라를 구입하여 몰래카메라를 장치하여 천안문 광장의 실제상황을 촬영했다. 그 이후 전수로는 매일 비디오를 들고 천안문 광장으로 달려 나갔다. 바늘 카메라 촬영은 바로 소형카메라를 포장 속에 넣고 숨겨 포장에 작은 구멍을 뚫어 몰래 촬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돌아와 그 영상을 틀었다. 자세히 보면 그 중에 많은 사복 경찰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다수는 흰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광장에 매 공기 입자마다 마치 긴장이 맺혀있으며 살기가 숨어있었다. 경찰, 사복경찰의 눈은 흉악하고 매섭게 경계하고 광장의 모든 관광객들도 마치 다 적인 듯 했다. “파룬따파하오”의 소리와 플래카드가 나타나는 그 순간 평정한 광장은 즉시 전쟁터가 되어 버렸으며 정사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찍는 일은 매우 쉽지 않았습니다. 모두 돌발 사건이므로 어디서 플래카드를 펼칠지 알 수 없습니다. 광장이 그렇게 큰데 거리가 멀 것이고 늘 그런데 당신이 보는 그 순간 한 무리의 사복 경찰이 이미 새까맣게 달려갑니다. 광장 도처에 사복 경찰이어서 관광객보다 더 많았습니다. 대법 플래카드가 나타나는 것을 보기만 하면 그들은 마치 늑대처럼 ‘휙’하며 달려가서 수련생을 향해 마구 때리며 경찰차가 즉시 윙윙하며 날아옵니다. 광장에는 한번은 이쪽에 플래카드가 나타나고 한번은 저쪽에 나타나는데 사복경찰은 한 무리씩 이쪽저쪽에 달려가서 때립니다….. ”

이 밖에 전수로는 천안문광장을 찍는 외에도 수련생이 박해받고 두들겨 맞고 맞아죽는 장면을 찍어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는 증거 재료로 삼았다.

“경찰은 천안문광장에서 백주에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이렇게 마구 체포하고 구타했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의 박해는 더욱 참혹했습니다.”

“나는 주로 북경에서 찍었습니다. 기억에 20여세 되는 남자 수련생은 잡혀있을 때 경찰에게 고문당하여 두 발이 다 얼어 못쓰게 되었고 열 발가락이 모두 새까맣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정황은 즉시 발가락을 잘라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생명 위험이 있었습니다. 간수소의 책임이 두려워 그를 길가에 버렸습니다. 나는 가서 그를 찍었는데 그는 그렇게 큰 고문을 당하고도 그는 매우 낙관적이었으며 언어 중에 조금도 사악을 두려워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대법에 대해 바른 믿음이 충만했으며 나에게 남겨준 인상이 매우 깊었습니다.”

“또 한 명 남자 수련생은 역시 상처가 매우 심해 간수소에서 버렸습니다. 다른 수련생들이 발견하여 그들 들고 돌아왔습니다. 내가 그를 찍었는데 그는 누워서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몸이 다 부었는데 보기에 60여세 같았습니다. 며칠 안 되어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중에 수련생이 내게 알려주기를 그는 겨우 30여세라고 했습니다.”

이런 기록물 영상이 해외에 전해짐에 따라 국제사회는 파룬궁이 중공에 박해받는데 더욱 관심을 가졌다. 마침내 2002년 10월 장쩌민은 ‘군체멸절죄, 혹형죄와 반인류죄’로 파룬궁 수련생에 의해 고소당했다. 전수로의 증거기록 역시 중공 박해의 증거로 되었고 국제매체에서 널리 채용했다.

그것은 뼈에 새겨지는 경험이었다. 그녀는 천안문 광장에 서 있었는데 일선 기자로서 자기가 이 위치에 서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본적이 없었고 특정한 환경 하의 선택이었다. “그 환경과 과정 중에 수련에 대해 하나의 큰 비약이 있었습니다. 비록 사악을 대면하여도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고 정말 두려움의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일총 초탈한 안정이며 생명이 법에 용해된 후의 평정과 상화로움 임을 정말 느꼈습니다.”

2. 옥고를 치르고 금강을 단련하다

파룬궁 진상녹화물이 끊임없이 국제사회에 폭로되자 국가 공안국에서는 비밀탐정을 진행했다. 드디어 2001년 4월 전수로는 체포되었다.

그녀는 먼저 조양구 간수소에 잡혀 들어갔다. 그곳에는 많은 대법제자들이 잡혀 있었다.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 강제로 음식을 주입당하고 모욕등의 혹형으로 시달렸다. 그녀는 직접 대법제자의 반박해를 경험했고 대법제자의 굳건한 믿음에 의지하여 뛰쳐나왔다.

그 후 그녀는 북경 단하 남자 노교소에 보내졌다. 그곳에는 대법 수련생에 대한 ‘전향’ 계획이 더욱 완전하게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향하지 않았고 내심에서 우러나는 진념으로 상대를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 후 그녀는 또 비밀리에 ‘북경법제훈련센터’로 보내졌다. 이곳도 중공의 폭정중에 생긴 산물인데 그것은 파룬궁제자를 박해하는 사악한 진영으로 완전히 막힌 방식으로 파룬궁 수련생을 계통적으로 전향시키는 곳이 되었다.

“그들이 하는 것은 전향된 사람이 와서 우리에게 전향공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마다 네 사람의 교관을 배치하여 8명이 설교하고 12명이 우리 한 사람에 대해 날마다 돌아가며 설교합니다. 처음에는 선한척하며 녹화물을 틀어주며 독서를 하게 하는데 왜곡된 사설을 읽게 합니다. 나중에 이 수법이 안 되면 방법을 바꾸어… ” 그녀의 회고이다.

법제훈련 중심 건물 내에 늘 경찰의 호통소리와 가슴이 찢어지는 참혹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동시에 대법제자가 반박해를 외치는 정의의 소리가 들립니다. 24시간 파룬궁 수련생들을 돌아가며 세뇌, 학대, 전향, 고문, 체벌, 구타, 음식 주입 등 대법제자는 각종 혹형으로 시달리는데 외부에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날마다 심문하고 날마다 전향에 대면하며 구타 욕설 체벌은 일상생활입니다. 그곳에서는 정신이 무너지기 매우 쉽고 만일 대법에 대한 굳은 믿음이 없다면 지나가기 매우 어렵습니다…. 류지매(柳志梅)라는 어느 여학생은 북경 칭화대 재학생인데 나와 작은 호실 건너편이었고 매우 단순하고 선량했습니다. 경찰이 그녀를 학교로 돌려보내고 학업을 회복하게 한다는 등의 말로 그녀를 유혹했습니다. 그녀는 진짜인 줄 믿고 전향서에 글을 써서 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12년 이라는 중형을 판결 받았습니다. 나중에 내가 인터넷 상에서 알았는데 그녀는 감옥에서 독주사를 맞고 나중에 감옥에서 나온 후 정신이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

2001년 연말, 그녀는 또 북경의 제1 간수소에 잡혀 들어갔다. 북경7처라는 곳이다. 칠처의 명성이 외부에 유명한데 전국의 중대한 정치범 경제범 심지어 살인범을 다루는 곳이다. 중공이 파룬궁을 으뜸가는 적으로 서열하여 “칠처”에서 맨 먼저 공격당했다. 610에서 확정한 파룬궁 수련생은 모두 칠처에 잡혀 들어갔다. 전수로는 국제사회에 파룬궁 박해 영상을 제공했으므로 중요안건으로 다루어졌다.

“당시 북경 칠처는 오래되고 어두우며 더러운 곳으로 겨울에는 더운 물도 주지 않았어요. 매일 밤 교도관이 순찰하는데 발걸음이 머리 위에서 들리며 마치 인간 지옥에 들어간 것 같았어요.”

전수로는 4년 형을 언도 받고 장춘 흑주자 여자 감옥에 보내져 복역했다. 장춘 흑주자 여자 노교소는 또 하나의 인간지옥이다. 명혜망 보도에 따르면 1999년 이래 몇 년 중에 그곳에 시종 천여 명의 대법제자가 잡혀있었다. 국외 매체의 폭로에 따르면 아직도 대법제자가 그곳에 잡혀 있으며 그 박해 수단은 잔인하기가 극에 달해 전기 곤봉, 수갑채워 매달기, 세워놓기, 잠 안 재우기, 강제 음식물 주입, 쇠침대에 묶기로 많은 수련생을 상하게 했으며 심지어 죽게 만들었다.

“정말 사악이 지독했어요. 우리는 그곳에서 힘든 체력 노동 뿐 아니라 더욱 괴로운 것은 전향이었습니다. 그들이 채용한 방식은 일대일 방식으로 범죄인으로 대법제자를 공격하고 전향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전향하지 않으며 떼거지로 구타하고 인신모욕을 하며 무슨 혹형이든 다 있는데 작은 방에 가두기, 침상 위에 묶어놓기 등등… ”

4년의 옥고를 치른 후에 그녀는 출옥했다. 신체를 회복한 후 또 북경에 들어가 계속 번역 일을 했다. 바로 이때 어느 동수가 찾아와 선전에 어느 회사에서 러시아어 번역이 급히 필요한데 도와 줄 수 있느냐고 했다. 그녀는 별로 주저하지 않고 즉시 가겠다고 했다. 바로 이번 선전행에서 인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그는 파룬궁 수련생으로 텔레비전 프로 제작자였다.

3 해외로 이주하여 장쩌민을 고소

‘이전의 약속이 있어 금생에 또 만났고 생명의 영광은 정법과 이어졌구나. 일 년 또 일 년 오늘까지 걸어왔네….’ 이것은 대법제자가 지은 한 수의 노래 가사이다. 걸어오고 만나고 알게 되는 것은 말할 것 없이 하늘의 안배로 그들은 가정을 이루었다.

그녀의 남편을 말하면 그는 원래 전문 영화제작자의 직원이었는데 북경에서 일했다. 일찍이 대법 서적 디자인과 배판에 참여했다. 나중에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아 노교소에 잡혀 들어갔다. 노교소에서 나온 후 그는 여전히 610의 교란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남쪽 광주로 내려왔다가 선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그는 전수로를 만났다. 공동의 경험, 공동의 믿음으로 뜻이 통하는 그들은 함께 걸었다. 그들은 선전에서 회사를 차렸으며 2013년 해외로 이주했다.

2015 전세계 장쩌민 고소 열풍이 재차 일어나서 장쩌민을 법으로 처단하자는 소리가 높았다. 이 추세를 보고 전수로는 마음이 용솟음쳤다. 이 날을 그녀는 장장 16년을 기다렸다.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한 것은 큰 죄를 범한 것으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대법 ‘진선인’은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전 세계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존중하는데 그는 오히려 폭정과 독재로 대법을 박해했습니다. 만일 어느 민족이 바른 것이 탄압을 받는다면 이 민족이 희망이 있겠습니까? 도덕을 잃고 사람이 되는 표준을 잃으면 미래를 잃는 것입니다. 장쯔민은 파룬궁을 박해한 우두머리이며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금년 7월 17일 전수로는 정식으로 장쩌민에 대해 법률 소송을 제출했으며 이 소송 문건을 중국최고고등검찰에 부쳤다.

‘고소장’을 부치는 이 일을 완성하고 그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느끼며 정의상 피할 수 없는 책임임을 느낀다. “대법제자는 모두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강을 고소하는 일이건 장쩌민 사악집단 처벌을 호소하는 일이건 모두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기회입니다. 이 과정 중에 승화할 수 있습니다. 박해가 멈추지 않으면 반박해도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길입니다.” 그녀의 말이었다.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2015/12/23/150102.天安门的一线记者.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