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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정 경험 : 사부님께서 진선인에 동화하도록 가르치시다(완결)

작자/ 서양인 대법제자 구술 번역 정리

【정견망】

‘사부님께서 진선인을 가르치신 원인’을 깨닫다

최근 나는 한가지 일에 봉착했다(사람이 아니라 일이다). 갑(甲) 동수가 동수 을(乙)에게 장기간 존재하는 문제가 있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지적했다. 갑은 경전을 인용하여 매우 옳게 말했으나 을은 여전히 예전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을에게 존재하는 문제는 시급히 돌파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방면으로 이해하면 을의 표현은 바로 현지의 정체(整體)를 도와 안을 향해 찾음을 통해 제고할 수 있다. 사람 중에서 보면 을은 정체의 걸림돌이지만 수련상에서 보면 그녀는 정체적으로 안으로 들여다보는 것을 촉진하는 보배다. 누구든 그녀의 상태를 이용해 자신의 홍대한 관용과 다른 사람을 돕는 지혜를 수련해 낸다면 바로 그가 얻는 것이다.

나는 갑과 교류하며 그녀의 자비가 부족하다고 선의적으로 지적했다. 갑은 각종 구실을 대어 덮었다. 나는 갑자기 확 깨달았다. 알고 보니 갑에게 ‘불선(不善)’이 존재했고 게다가 ‘부진(不眞), 불인(不忍)’도 속에 숨어 있었다. 어떻게 그것을 볼 수 있는가?

1. 갑이 여러 사람 앞에서 질책한 목적은 을의 잘못을 증명하고 을을 바로잡도록 압박한 것이다. 채용한 방식과 목적은 완전히 을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이것이 불선(不善)이다.

2. 갑은 을을 설득할 기회를 이용해 통쾌한 말로 자신의 쟁투심을 만족시켰다. 이것은 불인(不忍)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설사 지적을 하더라도 출발점이 선하고 목적이 선하며 오직 문제를 해결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고 정체를 위해서라면 선택한 법리가 정확했다면 결과는 마땅히 좋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span>정진요지- 청성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늘 말했다. 만약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해, 티끌만큼도 자신의 목적과 인식이 없다면, 한 말은 상대방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고. 나는 단지 당신들에게 대법(大法)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나의 작풍(作風) 역시 당신들에게 남겨놓은 것이다. 일처리 중의 어투, 선한 마음, 도리(道理)를 더하면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킬 수 있으나 명령은 영원히 할 수 없다!”

그 밖에 갑은 마음을 움직였고 체면상 넘어가지 못하고 “명리정”을 다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각종 핑계를 만들어 숨겼으니 이것은 불인(不忍)이다.

3. 이것은 본래 절호의 기회였다. 갑은 ‘체면상 넘어가지 못할’ 때의 내심 미세한 파동을 잡을 수 있었고 ‘안을 향해 찾음’을 통해 ‘명리정’을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숨기는 것은 남도 자기도 속이는 것이니 이는 부진(不真)이다.

4. 안을 향해 찾지 않고, 후천적으로 형성된 일체 패물을 버리고 재빨리 자기를 승화하지 않으면 어떻게 자신과 중생에게 떳떳할 수 있는가? 그러니 안을 향해 찾지 않고, 용맹정진하지 않으면 불선이다. (사실 갑 동수는 좋은 점이 많다. 예를 들어 사람들을 이끌고 매일 전법륜을 읽는 등등.) 어쩌면 내가 잘못보고 오해했을 수도 있다. 여기서는 그저 예를 들뿐이며 동수를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이해는 ‘진선인’ 세 글자는 모두 법이며 선은 그 속에 있다. “부진(不真), 불선(不善), 불인(不忍)”은 모두 변이 생명이다. “不真、不忍”은 양 끝에 숨어 있다. “真善忍”을 함께 수련하며 하나가 빠져도 안된다. 하나가 빠지면 세 개가 다 관련된다.

‘안을 향해 찾는’ 필요는 또 내게도 있다. 무엇 때문에 나는 오직 갑이 선하지 않다고만 느끼는가? ‘不真、不善、不忍’ 이라고 느끼지 않는가? 알고보니 나는 ‘진선인’ 대법에 흐리멍덩했던 것이다. 나도 잠시 ‘진선인’ 하지 못했다. 내 생각에 아마 이것이 바로 사부님이 내가 정에 든 중에 ‘진선인’을 가르쳐 주신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또 다른 한 가지 원인이 있다. 2014년 샌프란시스코 법회설법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우주 ‘진선인’ 대법 금자탑의 꼭대기를 위로 높이 뽑아올리신 것을 보았다. 금자탑 내의 중생들에 대해 이것의 의의는 얼마나 거대하고 얼마나 의의가 큰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다들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질 공간을 사부님이 뽑아 올렸으며 정신 방면에서 사부님은 우리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진선인’을 잡고 대법(大法)대도(大道)를 잡고 위로 수련하며 일마다 법으로 가늠하며 시시때때 법으로 가늠하고, 수시로 법으로 지도를 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법리로 자기의 구 관념을 대체한다. 사부님의 지도와 베푸심은 생명이 겹겹의 우주를 통과하는 통행증이다.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은 생명이 반본귀진하는 유일하고 가장 빠르며 가장 좋은 첩경이다.

오직 사부님의 배치만이 가장 순서 있고 지혜로운 것이다. 내가 수련상에 만난 문제를 보면 비록 작지만 나는 또 제삼자다. 하지만 나의 수확을 보면 내가 이런 일을 만난 것이 우연일까? 여기에서 나는 동수 갑과 을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동수의 충돌이 우리의 사고를 격발시켰고 사부님이 보시게 되어 황금 금강석 다리를 연결했고 우리의 사상경지를 더욱 깊은 원만의 피안으로 인도하셨다.

신체적인 참음과 심성의 참음은 다르다

내 기억에 당시 내가 다른 공간에 있을 때 사부님의 설법을 공경히 경청할 때 일념이 움직였다. 사부님께서는 일찍 화봉황의 선이 부족함을 지적하셨다. 그러면 왜 그녀는 참음을 해낼 수 있었는가? 인이 선의 뒤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염두가 나오자마자 사부님의 대답이 공중에 울려 퍼졌다.

알고 보니 화봉황은 단지 표면적으로 참음을 할 수 있었고 내심 깊은 곳에는 없었다. 그녀는 신체적인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욕화용련(浴火熔煉 불로 씻어 단련), 열반중생(涅槃重生 열반으로 다시 태어남)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설사 죽음에서 부활하는 능력이 있더라도 죽었다 살아나는 고통을 참기 힘들다. 그래서 중공의 박해를 대면하여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번 가부좌하면 하루 종일 했으며 매우 강하게 견뎠다. 이런 것은 그녀의 신체 방면에서 고통을 겪을 수 있는 능력만 설명할 뿐 심성상에서 참음에 동화되었음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육신을 고달프게 하는 것으로 제고해 올라올 수 있다고 한다면, 중국 농민은 매우 고생스러운데 마땅히 모두 대기공사여야 하지 않겠는가?” 《/span>전법륜

수련인으로서 그녀가 인에 동화하려고 한다면 선을 잘 닦아야 할뿐 아니라 또 진도 계속 닦아야 한다. ‘眞’속에는 진선인(眞善忍)이 들어있고, ‘善’속에도 진선인(眞善忍)이 들어있으며 ‘忍’속에도 여전히 진선인(眞善忍)이 들어있다. 《/span>오스트레일리아 법회설법

백조의 왕인 봉황왕은 권력, 지위, 등급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 감당, 버림을 의미한다. 자기의 천국을 위해 끓는 물에 뛰어들 수 있고 자기 중생을 위해 죄업을 불사를 수 있어야 한다. 내 생각에 선의 최고 경지는 중생을 위해 죄를 받는 능력보다 더한 것은 없고 중생을 위해 대신 죄를 감당하는 어린양이 기꺼이 되어야 한다.

대법제자는 반드시 선을 수련해야 한다. 선(善)의 네 점은 한 점이 빠져도 유감이고 한 점이 적어지면 그 곳은 비어 있지 않을 것이며 아마 더 많은 마난이 있을 것이다.

창세주의 안배

용(龍)이란 이 생명은 진선(真善)이 본성이며 대인(大忍)이 부족하다. 모양은 본래 화를 내지 않고 위엄이 있다. 사악을 보면 모양이 더욱 놀라운 모습으로 변한다. 사람 이쪽 면에서의 표현은 전형적인 서양인의 특징으로 희로애락이 얼굴에 잘 드러나 가식이 없고 참을 줄 모른다.

“서방국가 사람의 성격은 비교적 외향적이어서, 기뻐해도 보아낼 수 있고 화가 나도 역시 보아낼 수 있다. 그는 그의 좋은 점이 있지만 역시 그의 좋지 못한 점도 있는데, 인내(忍耐)하지 못하는 것이다. 두 가지 성격이 관념상 다르기에 일을 함에 생기는 효과가 같지 않다.” 《/span>전법륜

용은 완벽하고 신성한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그가 “미성룡(美聖龍)”이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무엇 때문에 그가 진, 선은 있지만 대인(大忍)은 없는가?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는 늘 내가 염두를 움직이기만 하면 대답해주셨다. 원래 사부님이 용과 봉황을 만드실 때 특별히 이렇게 안배하셨다. 용, 봉은 서로 대조되어 피차 참고하고 서로 보충하여 공동 제고한다. 만일 그들을 창조할 때 ‘진선인’ 우주 최고특성을 갖추도록 하여 정법이 시작할 때 반드시 내려와 수련하도록 정했다. 그러나 대법을 다 안배하고 나서 자기가 수련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하늘로 올라간다면 그건 너무나 쉬우며 수련하지 않는 것과 같다. 구세력은 사부님의 창조를 원망할 것이며 창조를 질투하며 그것들은 대법제자에게 불복하며 탄복하지 않으며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분명히 하시기를, 만일 수련인이 단단히 ‘진선인’에 따라 수련하면 ‘진선인’의 대법 표준에 따라 자기를 엄격히 요구하면 일을 만날 때 즉시 안을 향해 찾는다면 심성제고는 수직상승하며 원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도가(道家)는 眞(쩐)・善(싼)・忍(런)을 수련함에 진(眞)을 중점적으로 수련한다. 그러므로 도가에서는 수진양성(修眞養性)을 말하는데, 참말을 하고, 참된 일을 하고, 참된 사람이 됨으로써 반본귀진하여 최후에 진인(眞人)으로 수련 성취한다. 그러나 인(忍)도 있고 선(善)도 있는데, 중점을 진(眞)에 두고 수련한다. 불가(佛家)는 眞(쩐)・善(싼)・忍(런)에서 선(善)에 중점을 두고 수련한다. 선을 수련하기 때문에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수련해 낼 수 있는데, 자비심이 나오기만 하면 중생이 모두 고생스러움을 보게 되므로 곧 소원을 품어 중생을 널리 제도하려 한다. 그러나 진(眞)도 있고 인(忍)도 있는데, 선(善)에 중점을 두고 수련한다. 우리 파룬따파(法輪大法), 이 한 법문은 우주의 최고 표준-眞(쩐)・善(싼)・忍(런)을 동시에 수련하므로, 우리가 연마(煉)하는 공(功)은 대단히 크다.

보충설명 : 시민체포권(公民逮捕權)

시민체포권은 영어로 Citizen’s Arrest라고 하며 홍콩에서는 ‘101 Power’라 한다.

형사소송법 조례 제101조 (2)항의 규정에 따르면 ‘누구든 영장 없이 합리적인 의심이 가는 범인은 체포할 수 있다. 일단 체포하면 혐의자는 반드시 빨리 경찰에 보내야 한다.’

이 권리는 미국 역사상 시민자치의 중요한 권리다. 시행하는 국가는 미국, 영국, 캐나다와 홍콩이다.

시민이 만약 시민체포권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면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할 필요가 있다 :나쁜 사람(대법제자에게 손을 쓴 사람, 욕한 사람, 플래카드를 빼앗은 사람, 위협을 한사람)에게 ‘나는 시민체포권’을 실시하고 있으며 그를 구류하고 경찰청에 바로 가서 경찰국에게 전보로 알린다. 무력 사용은 가급적 피한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무력을 최대한 적게 사용한다; 나쁜 사람을 체포한 후 그에게 수색과 질문을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당신의 직책은 단지 그를 체포하여 경찰에게 가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경찰에 가서 당신은 ‘시민체포권’을 실시했다고 말하며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

이것은 정의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시민은 법에 따라 경찰에 협조하고 사회 치안을 유지할 수 있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 안전을 보호 할 수 있다.

맺는 말

최근 나는 ‘무’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무’는 마땅히 아무것도 없는데 그럼 ‘무’는 대체 누가 만든 것인가? ‘무’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무’의 존재 형식은 무엇인가? 누가 ‘무’의 존재를 위해 환경을 만들었는가? 사부님은 법에서 ‘무종유’를 언급하셨다. 나의 개인적인 이해는 무는 유를 따라 오며 무는 유에 속하며 유가 무를 파생해낸다. ‘무’가 있는 것은 곧 ‘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법리는 단지 《/span>전법륜이란 우주대법의 넓은 바다중의 좁쌀 한 알갱이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법리를 장악하고 얼마나 많은 천기를 깨달았더라도 모두 대법이란 창궁(蒼穹) 중 한점 별빛 같은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높은 곳에 서고 스스로 최고라고 여길지라도 우리 자신과 우리가 말하는 최고점이 또 어떻게 온 것인가? 누가 창조했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누가 ‘우리와 우리의 최고점’이 존재하는 환경을 보증하는가?

사람밖에 사람이 있고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 대법은 무한하며 불법무변이다. 끝없이 무한한 밖에 사부님의 은혜로운 미소가 있다!

부동한 층차에 이르도록 우리의 수련을 진정으로 지도하는 것은 오직 대법밖에 없다. 대법은 모든 사람을 제도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 개인적인 생각은 백분의 백 다 이익을 본다는 데서 물러설 수 없다. 대법제자는 ‘진선인’ 대법을 잡고 수련하고 엄격하게 대법을 스승으로 삼고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따르면 “머리가 떨어져도 몸은 여전히 앉아 있고 누가 잘라도 누군가 다시 붙여준다” 가 될 것이다. 어떠한 사람 어떠한 층차의 체험이나 교란에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평범한 대법제자이며 대법의 박대정심한 내포에 대해 이해가 매우 얕다. 개공개오는 아직 멀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은혜에 천번 만번 감사드린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허스

《/span>끝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2014/11/23/1381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