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난심(혜질 정리)
【정견망】
첫 혼인, 죄 많은 애증의 부침
서문
나는 보통 여자이며 금년 44세이다. 대법 중에서 수련한지 24년이 되었다. 수련의 길에 비틀거렸고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는 것은 정말 기적이다. 이 길이 때로는 험난하고 때로는 밝은 곳도 있었다. 고난을 동반했지만 신기함도 충만했다.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가 아니었더라면 이 세상에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대법 중에 단련하여 갈수록 성숙하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늘 자기의 과거에 대해 불가사의함을 느꼈다. 어떤 때 그런 일을 내가 해냈다는 것을 믿기지 않았다. 비록 수련의 길에 비틀거렸고 일부 대법제자에 표준에 맞지 않는 일을 했지만 사부님은 자비로워 나의 신상에 너무나 많은 신적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많은 동수들이 이를 써내어 법의 초상적인 위대함을 실증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경력중에 황당한 일이 독자들에게 가져올 부면 작용 효과를 걱정하여 지지부진하며 붓을 들지 못했다. 비록 현재 생각해보면 정말 구세력이 박해로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매 차례 기사회생하고 또 환골탈태 하니 정말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너무나 위대함을 느끼게 되었다. 만일 나의 경력이 대법을 인간세상에서 홍대한 자비를 실증할 수 있다면 나는 써내기 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부님의 거대한 감당이므로 제자로서 보답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마침내 나는 용기를 내어 붓을 들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법과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또한 대법에 대해 오해가 있는 속인들이 대법이 세간에서 진실하게 나타난 것을 보게끔 하려고 한다. 조금씩 기억을 더듬어 쓰다 보니 감히 자기도 잘 알아보지 못해 늘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른다. 이것이 바로 “나”인가? 이기적이고, 난폭하고, 일하는데 후과를 따지지 않고, 사유가 공산당 문화에 조종되어 눈만 크게 뜬 채 말을 못하며 어리석은 일을 많이 했는지. 사부님이 한 차례 한 차례 씩 나를 위해 감당하시고 사부님이 어려움을 평탄케 처리하시면 나는 또 한 차례 어려움을 만들어내었다.
아래에 나는 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학생 시절을 되돌아보면 온통 머리에 든 것은 사당문화였다– 무신론의 투쟁 철학-이기심, 과격함, 보복, 투쟁 …. 나는 이런 변이된 관념에 주도되었고 ‘이리’의 젖을 먹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반 담임은 20여 세의 여선생님이었는데 온순하고 예뻐 보였다. 내가 글을 잘 썼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좋아했고 나도 그녀를 따랐다. 그러나 그녀가 화를 내면 매우 무서웠고 마치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반에서 공부를 못하는 뒤떨어지는 아이 몇 명이 있었는데 그녀가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했는가? 발로 밟고 차고 부채로 뺨을 때리는데 사람을 때리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건드리지 않는다, 남이 나를 건드리면 나도 반드시 건드린다!” 어떨 때 학생들이 그녀에게 억울함을 당하면 그녀는 여전히 궤변을 늘어놓았다. “모 주석도 3할은 잘못했고 7할은 공로가 있지 않은가. 나도 성인이 아닌데 어디 잘못이 없겠는가!” 이런 황당한 언행은 나의 어린 심령에 깊이 새겨졌다. 나의 인생을 잘못 지도했고 나는 결국 이런 당문화의 왜곡된 이치와 사악한 설을 좌우명으로 삼아 나의 성격의 변이를 가져왔다. 이것이 나중의 생활에 어려움을 만들었다.
그 선생은 결혼 후 불임증에 걸렸다. 그녀 남편은 그녀를 늘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때렸는데 그 수법이 그녀가 옛날에 학생을 때리는 수법과 같았다. 이것이 업력윤보가 아닌가? 또 그녀는 당문화의 해를 받은 사람이 아닌가! 당문화는 바로 양날의 검이다.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친다.
21세가 되던 해, 나는 첫 남편 소도와 결혼을 했다. 뜻밖에 이때부터 깊은 심연에 뛰어 들었다.
그때의 나는 물에서 나온 부용꽃 같이 매우 예뻤고 170의 키에 날씬한 몸, 갸름한 얼굴, 큰 눈을 가졌다. 그는 나에게 강렬한 추구를 펼쳤으며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나의 허영심을 만족시켰다. 또 자해를 하면서까지 나에 대한 충심을 표현했다. 나는 또 연애소설의 영향으로 자기를 예쁜 여주인공으로 여겼으며 그를 왕자로 생각했고 생사를 의지할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여 낭만적으로 그의 구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혼 후 전혀 내가 상상했던 그런 행복한 생활이 아니었다. 나는 큰 며느리였으므로 시어머니는 갑자기 집에 들어온 다른 여인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늘 시어머니의 괴롭힘을 받았고 괴롭힘을 당하는 며느리가 되었다. 하루 종일 화를 참고 소리를 삼켰으며 눈물로 지새웠다. 시간이 길어지자 우울증이 쌓여 병이 되어 갑상선 병을 얻었다.
1995년 말 남편이 나를 데리고 성급 병원에 가서 검사했다. 의사가 보더니 우리를 야단쳤다. “어떻게 이렇게 심하게 되어서야 오는 거요? 약을 한 병 처방할 테니 다 먹은 다음에 나중에 반드시 수술을 해야 합니다.”
나와 남편은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왔고 비싼 약값에 근심에 쌓였다. 그가 일하는 강철 공장은 마침 긴 휴업 중이었고 일 개월 월급이 150위안 밖에 되지 않았다. 또 그가 수의사 일을 하여 번 돈은 시어머니 말에 아직 결혼하지 않은 두 남동생이 있으니 이 돈은 동생 결혼에 써야 한다고 했다. 갑상선 치료약은 작은 병 하나에 50위안이었다. 집안의 경제 상황을 생각하며 나는 이 약을 뜯지도 않고 몰래 버렸다. 생각하기를 병을 가볍게 보고 버텨보자. 내 몸은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으며 심장 박동이 빨라졌고 호흡이 곤란했다. 목이 부어서 닭의 모이주머니처럼 보였다. 비록 이랬지만 시어머니는 여전히 내게 좋은 낯빛을 하지 않았다. 나는 심신이 피로하고 손상되어 하루를 일 년처럼 지냈다.
1996년 2월 어느 날 내가 친정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내게 “파룬궁”이라는 일종 공법이 있는데 병을 고치는데 기이한 효과가 있으며 돈 한 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시험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어머니 집 부근의 연공장을 찾아갔으며 이때부터 수련과 인연을 맺었다. 연공한지 얼마 안 되어 나의 갑상선은 날개 달린 듯 날아가 버렸고 신체상 모든 건강하지 않은 증상이 다 사라졌다. 이때 나는 딸을 임신했다. 반년이 안 되어 시어머니는 외지에서 돌아와 역시 대법을 얻었다. 그러나 나와 그녀의 관계는 대법을 얻었다고 해서 그리 융화되지 못했다. 그때 우리는 법 공부를 적게 했기 때문에 착실한 수련을 이해하지 못했다.
연말에 딸이 태어났다. 시집에서는 딸인 것을 보고 기분나빠하며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다. 산후조리 하는 한 달 동안 아무도 나를 잘 돌보지 않았다. 내가 아이 가졌을 때 시어머니는 십여 마리 닭을 키웠는데 이웃에 말하기를 나의 산후조리에 쓸 것이라고 했었는데 그동안 그녀는 우리 집 친정집에서 가져온 계란과 좁쌀죽을 주었을 뿐이며 나는 닭 국물은 한모금도 맛보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또한 이유를 대어 말하기를 내가 기름이 너무 많은 닭고기를 먹으면 설사할까 염려된다고 했다. 화가 올라오고 위 속에 기름기가 없어 나는 치질이 재발하여 아파 죽다 살아났다. 아마 기름기가 없어서인지 젖이 부어 매우 괴롭고 내려가지 않았다. 보름이나 되어 내가 어머니를 만나서 내가 학대받은 일을 말했다.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집으로 달려가서 닭 한 마리를 잡아서 삶은 후 내게 먹으라고 주었다. 배 속에 기름기가 들어가니 나의 치질과 건조함이 점점 나았다. 일 개월 간 고생을 했으니 아이 난지 한 달이 된 셈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시어머니와 단독으로 늘 밥을 먹었다. 열 몇 마리 있던 닭을 그들이 다 먹어치웠다.
당시 나는 오성이 너무 뒤떨어져 있었다. 안으로 찾지 못하고 이것을 사람 중의 시비로 여겨 업력을 전화하고 심성을 제고할 기회를 놓쳤다.
딸은 날마다 점점 자랐고 남편은 나에 대해 일체 아는 척을 안했으며 나중에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1999년 곤궁한 생활환경을 바꾸어 보고자 나는 언니 집으로부터 3,600 위안의 돈을 빌려 불구가 된 젖소 한 마리를 샀다. 이 소는 한쪽 젖은 우유가 나지 않았는데 나는 스스로 젖 짜는 법을 배워 이 일을 다 하고 다시 괭이로 소똥을 파내야 했는데 언 소똥이 얼굴에 튀어서 아팠다. 나는 그만 자리에 앉아서 울었다. 울다 힘들어 지치면 일어나서 계속 괭이질을 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았고 나는 어머니가 괴로워할까 봐 어머니에게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나는 자전거 앞에 딸을 태우고 뒤에는 우유 통을 싣고 빙설천지 속에서 친정으로 가서 우유를 팔았다. 어머니는 그곳에 아는 사람이 많아 이웃에서 다 우유를 사러왔다. 나는 친정에 가자마자 피곤해서 쓰러져 쿨쿨 잤다. 어머니는 우유를 팔며 내 딸을 돌보았다. 우유를 다 팔고 나서 어머니는 우유 통을 깨끗이 씻어 주었고 나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날은 해가 매우 일찍 진다. 빙설 천지에서 나는 딸을 데리고 손을 뻗어도 다섯 손가락이 안 보이는 길에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겨울 내가 판 우유는 나와 딸의 생활비로는 충분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 집이 없는 듯이 하루 종일 밖으로 놀러 다녔다.
다음날 봄이 되어 나는 불구였던 젖소의 유두를 내가 억지로 잡아당겼더니 이 소는 정상적인 소가 되었다. 때마침 북경에서 소를 사는 차가 왔을 때 나는 이 소를 좋은 가격인 6천 6백 위안에 팔았다. 언니의 돈을 제하고도 3천 위안을 번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판 우유값으로 내 손에는 합해서 4-5천 위안의 돈이 생겼다.
그러나 이 겨울에 피땀 흘린 돈은 오히려 남편의 감언이설에 속아 빼앗겼다.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나를 강박하여 남편에게 오토바이를 사주어 일하는데 편하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진작 나의 성격을 꿰뚫어 보고 어떻게 나를 달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비록 오토바이를 좋아하고 그걸 타고 일하면 많이 편하지만 당신 돈을 쓸 수 없잖아! 내가 좀 피곤한 것 아무것도 아니야. 중요한 건 당신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오토바이를 살수 없잖아. 그게 어디 남자야?” 나는 그 말을 듣자 감동하여 말했다. “당신 정말 바보야, 우리 둘 사이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어요. 가져가요. 오토바이를 하나 사서 일을 좀 편하게 해요.” 이렇게 나는 4,500위안으로 그에게 아주 멋진 오토바이를 사주었다. 뜻밖에 나중의 이혼은 바로 이 오토바이 때문에 생기게 되었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자랑스럽게 시내를 돌아다녔으며 허영이 많은 여인은 그가 돈 많은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그는 하루 종일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밖에서 어느 여인과 동거했다. 이 일을 남편의 집에서 다 알았는데 나에게만 숨겼다.
이는 정말 청천벽력이었다. 나의 정신은 단번에 무너졌다. 절망 중에 고통스러워 눈감고 깨어나지 말기를 바랐다. 매일 자면 깨었고 깨면 또 잠을 자며 시달렸다. 이때 자기가 수련인임을 잊었고 마에 붙들렸다. 수면제 두병과 콜라를 사서 길에서 무작정 걸었다.
내가 어느 음식점 입구에 걸어갔을 때 그곳에 오토바이 한 대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바로 내가 남편에게 사준 그 오토바이였다. 나는 마음이 칼에 찔린 듯 아팠다. 이것은 내가 겨울 내내 소똥을 치우고 우유 팔아 조금씩 모아 고생 끝에 사준 것이 아닌가!
이때 음식점에서 종업원이 나와서 나의 정신이 올바르지 않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물었다 . “당신 뭐하는 거요?” 나는 폭발했다. “우리 집 오토바이도 내가 쳐다보면 안 되나요?” 직원은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나는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어 수면제 200 알을 전부 입에 쓸어 넣었다. 직원이 얼른 달려와 제지했으나 이미 늦었고 나는 이미 콜라와 함께 약을 다 삼켜버린 후였다.
직원이 얼른 음식점으로 달려 들어가 마침 밥을 먹고 있던 그를 불러내었다. 남편이 나를 보고 입에 기괴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모모야, 네가 날 사랑하니? 네가 만일 나를 사랑하면 집에 돌아가 집에 조용히 누워서 나를 기다려.” 그리고 그는 택시를 불러 기사에게 주소를 가르쳐 주며 나를 차 속에 밀어 넣었다.
차에 타자 나는 동수에게 전화를 걸어 작별인사를 했다. 기사는 즉시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는 원래 내가 제 3자에게 버림받아 약을 삼킨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울며 그에게 말했다. “그는 남편 이예요!” 기사는 그 말에 매우 분노했다. “그는 즉시 당신을 병원에 보내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다니, 이것은 당신이 죽기를 기다리는 것 아니요? 내가 당신을 데리고 가서 그를 찾아가겠소!” 차는 머리를 돌려 음식점으로 돌아갔다.
기사는 남편과 따졌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당신은 뭐 되게 할 일 없는 사람이군요?” 하며 기사를 쫓아냈다. 그는 또 한 대를 불러 그에게 반드시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며 다시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집에 돌아가자 마침 시어머니가 나오는 것을 봤다. 아마 나의 눈빛이 좀 이상한 것을 알았는지 약을 먹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거들떠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작은 방에 들어가 그가 오기를 기다릴 거예요.”
언제인지 모르지만 언니와 형부가 왔다. 언니는 나를 잡아당기며 오자마자 내 뺨을 두 대 때렸다. 나는 반응이 없었고 속으로 생각했다. 때려, 아무튼 잠시 후면 나를 때릴 수 없을 테니. 또 언니와 시어머니 식구와 따지는 것을 들었다. 시어머니는 책임을 모두 나에게 밀었다. 나는 누워서 그들의 언쟁을 무시했고 그저 조용히 죽기만을 기다렸다. 마음속에 한 가닥 기쁨이 몰래 일어났다. 나는 가는구나, 영원히 몸을 벗는다. 설령 자살은 지옥에 떨어지는 큰 죄임을 알아도 사람 세상에서 고생을 겪고 싶지 않았다.
바로 이때 나는 돌연 창자를 어떤 큰 손이 아래로 당겨 훑는 것을 느꼈고 나는 즉시 놀라 깨었다. 본성이 일깨워진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사부님의 손이다. 나는 대법제자 아닌가. 내가 어떻게 사람의 정을 위해 사부님이 나를 위해 해주신 일체를 포기할 수 있는가?
나는 절박하게 외쳤다. 사부님 잘못했습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올 때의 서약을 실천해야 합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달렸다. 손으로 억지로 구토를 하여 약을 토해내려고 했다. 그러나 한 방울의 물도 토해내지 못했고 목에 무엇이 눌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집 방안으로 돌아가 가부좌를 틀었다.
이때 눈앞에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화면이 나타났다: 사부님이 몹시 급하게 내 맞은편에 앉아서 대연화수인을 하셨다. 그리고 매우 화가 난 듯 일어서서 나의 오른쪽 눈을 가리켰다. 나의 오른쪽 눈은 견디지 못하고 펄쩍 펄쩍 뛰었다. 문득 사부님이 백금으로 된 여의봉 들고 한 사람을 밀어 넘어뜨렸고 화를 내며 그를 때렸다. 또 사부님이 두루마리 하나를 가져와서 붓으로 줄을 그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보아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나와 구세력의 서약이 아닐까?) 사부님은 두루마리를 말아서 손은 뒷짐을 지고 고개를 흔들며 왔다 갔다 하셨다. 비록 한마디 말도 안하셨지만 나는 심령의 감응을 받았다. “이 제자를 어떻게 하나. 내가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울면서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했다. ‘사부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사부님은 두 손으로 그 여의봉을 잡고 또 한 번씩 그 사람을 무겁게 때렸다. (현재 생각하면 아마 때린 것은 나를 박해하는데 참여한 그 낡은 신을 때린 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난 후 사부님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나는 한때 수련하던 큰 언니가 나타났다. (나중에 언니는 수련하지 않았는데 직장 일에 연루될까봐 겁이 나서 반면으로 걸었다) 나의 심령에 반응되어 나온 것은 이랬다. ‘바로 그녀가 이런 이후에도 다 원만 하는구나.’
이때 화면은 우리 언니와 시어머니가 다투는 소리 때문에 끊어졌고 나는 눈을 떴는데 시어머니가 언니에게 묻고 있었다. “병원에 가야하지 않을까요?” 언니가 내게 물었다. “네가 말해봐?” 나는 “난 병원에 안가도 되요. 나는 정의 관을 넘기지 못해 자살하려 한 것인데 사악은 이 일을 내가 연공하여 주화입마 한 것이라고 할 것 이예요. 나는 대법을 파괴한 셈이니 더욱 죄가 크지요.” 언니는 시어머니에게 말했다. “안가겠대요, 그럼 가지 말지요.”
한밤이 되어 언니와 형부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와 시어머니, 딸만 남았는데 우리는 한방에 누워 잠을 자려고 했다. 막 눕자마자 눈앞에 하나의 벽이 나타났다. 나는 이상했다. 이 방에 언제 무슨 벽이 생겼나? 나는 앉아 일어나서 만져보았다. 그러자 모골이 송연해졌는데 그것은 벽이 아니라 한 갈래 회색 꽃무늬가 있는 큰 뱀이었다. 그것이 나의 목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는데 매우 차디찼다. (정의 마는 정말 큰 뱀인가 보다)
나는 얼른 일어나 입장하여 발정념을 하며 뱀 대가리를 향해 구결을 외웠다. “법정건곤 사악전멸.” 그러나 그것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하지? 머릿속에 어떤 정보가 알려주었다. “수인을 하라!”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할 줄 모르는데! 그 정보가 말했다. “제 오장 공법의 그 수인이다.” 나는 즉시 수인을 쳤고 순간 그 뱀은 후두둑 하면서 떨어져 죽었다. 사부님이 또 나오셨는데 손으로 철추를 잡고 큰 구렁이를 내리쳐서 조각조각으로 만들어 밖으로 던졌다.
이때 나는 탄식 소리를 들었는데 그 음성을 따라가 보니 벽난로 속에 한 사람이 묶여 있었다. 그의 두 손은 매달려 있었으며 머리는 매우 헝클어졌고 머리를 아래로 숙이고 있었다. 나는 이상하여 물었다. “당신 누구요. 어떻게 여기 묶여있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 탄식하며 얼굴을 돌렸다. 이때 나의 왼쪽 상방에 한 분의 큰 신이 서 있었는데 형상은 마치 서유기에 나오는 남천문을 지키는 큰 신 같았다. 그는 갑옷을 걸쳐 입고 병기를 들었는데 매우 아름다운 작은 새가 왔다갔다 날고 있었으며 날이 매우 맑고 투명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나는 연이어 삼일 간 발정념 했는데 매 차례 발정념할 때 사부님이 도와 방을 청소해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 집안에는 온통 거미줄이 걸려 있었으며 먼지가 매우 두터웠다. 사부님은 하얀 연공복을 입고 연공복 겉에 또 한 건의 옷을 입었는데 몸에는 백색 수건이 걸쳐져 있었다. 사부님은 빗자루를 들고 집안 구석의 거미 망을 쓸었는데 먼지는 숨 막힐 듯했다. 사부님은 붉은색 꽃이 찍힌 긴 나무 상자를 메고 매우 힘들게 오셨는데 등의 끈은 군녹색이었다. 당시 나는 그 상자 속에 들어있는 것은 나의 사람 중의 명리정이었고 다른 공간에서는 오히려 확실한 쓰레기임을 알았다. 나는 울며 사부님께 말했다. “사부님 저는 너무 변변찮습니다. 이후에 잘 수련할 것이며 아무리 큰 마난을 만나도 자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부님은 내게 새 생명을 얻게 해주셨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나와 5살 된 딸은 생활할 길이 없었고 딸을 유아원에 보낼 비용도 없었다. 그저 집에서 아이를 돌볼 뿐이었다. 겨울이 되자 연탄을 살 수 없어 실내도 얼음같이 차가웠다. 동수가 연탄사라고 300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이 돈으로 밥을 사 먹었다. 연탄을 사면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집의 가족도 기댈 수 없었다. 그들은 대개 다 대법을 수련하여 박해 당했다. 두 언니와 형부 한명은 불법적으로 간수소와 노교소에 갇혀있고 연로하신 부모는 충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므로 나는 감히 친정으로 돌아가 나의 불행한 생활을 드러낼 수 없었다.
밤에 잠을 잘 때 전기담요를 깔아서 비록 몸 아래는 따뜻했지만 실내 공기가 차가웠으므로 딸은 코가 얼어서 빨갛게 되어 엉엉 울었다. 나는 집에 있는 모든 이불을 딸의 머리까지 덮고 함께 울었다.
딸이 울며 말했다. “엄마. 엄마가 집에 없을 때 아빠가 나를 데리고 어느 아주머니 사는 집에 갔어요. 내일 내가 엄마를 아빠한테 데리고 갈 테니 연탄 살 돈을 좀 달라하면 안 되요? 나는 아빠가 사는 곳을 알아요!” 내가 “네가 그 건물을 기억하겠니? 건물이 얼마나 많은데” 딸이 말했다. “아빠는 내가 길을 기억할까봐 일부러 밤에 차를 타고 나를 굽은 골목길로 갔어요. 절대 아주머니 이야기를 엄마한테 하지 말라고 부탁했어요. 하지만 내가 갔을 때 속으로 길을 기억했고 돌아올 때 또 한번 기억했으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다음날 아침 나와 딸은 찬밥을 먹고 출발했다. 딸은 과연 나를 데리고 그가 사는 곳을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니 열렸고 눈앞의 한 장면에 나는 휘둥그레졌다. 문을 연 것은 시어머니였다! 시어머니는 나를 보고 얼른 도망가려고 했다. 또 나의 큰 고모를 보았는데 손에는 6, 7 개월 된 영아를 안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얘가 그의 아이예요?” 큰 고모는 당당하게 “그래! 이것이 내 동생의 아들인데 어쩔래?” 아! 과연 이 아이가 남편과 다른 사람이 낳은 아이구나! 나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아이 이리 줘요, 내가 던져 죽일게요!” 하며 아이를 빼앗으려 했다. 큰 고모는 고의로 내 화를 돋구었다. “너는 창턱에 올라가 있어. 아이를 줄 테니 너희들 함께 뛰어내려!” 나는 멍청하게 창틀에 기어 올라가서 7층 창문을 열고 고모에게 말했다. “내가 올라왔으니 아이 줘요!”
고모는 이걸 보자 안 되겠는지 아이를 안고 도망갔다. 나는 집안으로 뛰어 돌아와 그녀의 옷을 붙잡고 아이를 빼앗으려 다투기 시작했다. 우리는 힘으로 대치했는데 당시 나의 머릿속은 정말 통제가 되지 못해 오직 아이를 빼앗아 던져 죽이겠다는 하나의 염두뿐이었다. 바로 이때 이 아이가 나를 향해 “카칵” 하고 웃기 시작했다. 아이 웃음소리는 나의 마성을 단번에 녹여 버렸고 나는 갑자기 깨어나 들었던 손을 공중에 멈추었고 맥이 풀리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사부님이 생각났다. ‘사부님 저는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 나는 뜻밖에 무고한 아이에 손을 대려 했습니다!’
고모는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데 두렵기도 하고 꺼림칙하기도 하고 불쌍히 여기는 듯 하더니 아이를 안고 가버렸다.
이때 나는 이미 냉정해졌다. 마음속에 아이에 대한 꺼림칙함이 가득찼다. (이 꺼림칙함이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어느 날 아이가 7살 되었을 때 내 딸이 이 아이를 데리고 나를 찾아와서 그녀 집에 아이 보는 사람이 없어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나는 화를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딸에게 돈을 주어 아이를 데리고 공원에 가서 놀며 먹을 걸 사주라고 했다. 이때 나는 비로소 마음이 좀 나아졌다.)
나는 남편과 그 여인의 결혼사진, 딸의 출생증명서 등을 중혼죄의 증거로 삼아 변호사를 불러 고소할 준비를 했다. 나중에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내 딸의 감정을 고려하고 또 이왕 온 것을 복잡한 지경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니 하필 두 사람 다 상할 것 있느냐고 하는 생각이 들어 여기서 이 혼인을 끝내기로 했다.
남편은 마침내 목적을 이루었다. 내가 법적으로 그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고 현재 아내와 함께 떠나갔다. 그러나 그가 상상하던 행복한 생활을 지내지 못했다.
그들은 먼저 노래방을 열었는데 얼마 안 되어 주민에게 시끄럽다고 고발당하여 영업정지 당하고 8만 위안을 물어냈다. 또 가축 약방을 열었는데 난방이 파열되어 온 집에 물이 차서 몇 만 위안을 물고 영업 정지당했다. 또 중고 택시를 샀는데 여러 차례 위험한 교통사고를 냈다. 가장 심한 것은 언덕을 내려갈 때 바퀴가 빠졌다. 그때 나의 딸이 차에 타고 있었는데 차는 위험이 나타났을 때 아연했다. 딸은 법을 얻은 어린이 제자여서 사부님의 보호가 있었다. 그는 당시 나의 딸 때문에 그가 사고를 피한 것을 알았다. 사고 후 그는 딸을 안고 줄곧 말했다. “보배야 고마워.” 마지막에 그는 무엇을 해도 안 되자 고향을 떠나 외지에 일하러 떠나 근근히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아내와 그는 십여 년간 두 곳에 나뉘어 살고 있다. 그녀는 종전에는 노래방을 열어 의식주에 걱정이 없었는데 결혼 후에는 거의 한 푼도 없는 빈 털털이가 되었다.
이후 남편의 몇 명 가족에게 불행이 나타났다. 당초 남편과 그 여인이 아이 낳고 큰 손자를 안아보기를 기대했던 시아버지는 한번은 직장에 출근하는데 철추 하나가 갑자기 제어를 잃고 날아와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20여 일간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했지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임종 전에 내가 보러 갔는데 이미 의식이 없었다. 의사가 그의 온몸에 관을 꽂을 때 그는 아파서 전신에 경련이 일어났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나의 시어머니는 당초 남편이 중혼으로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 줄곧 나를 속여 시아버지의 공장에 간다고 하며 내가 딸을 돌보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일할 수 없게 되었고 나의 생활 내원이 끊겼다. 또한 나를 이혼하라고 핍박하며 아들의 중혼을 감싸주었다. 그녀는 비록 줄곧 대법 수련을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아들에 대한 이기적인 정을 내려놓지 못했다. 늘 몇 푼 안 되는 양로금으로 아들의 생활에 보태주고 있다. 최근 몇 년 전 그녀의 눈은 희미해지기 시작하더니 현재 두 눈이 완전히 실명했다.
큰 고모 집 역시 불행을 면치 못했다. 그의 남편은 도둑질 때문에 반복하여 감옥에 갇혔으며 50여 세가 되어 겨우 출옥했다.
나는 그들이 무지 중에 사악에 이용당해 대법제자를 박해했고 사악은 또 그들이 대법제자를 박해한다는 구실로 악보를 받게 했음을 알고 있다. 세인들아, 내가 어떻게 해야 당신들을 험악한 미로 중에서 구해낼 수 있단 말인가. 내 마음이 벌벌 떨린다.
몇 년 후면 중국의 설이다. 나는 딸을 시어머니 집에 보내다가 그(딸의 아버지)를 만났다. 이혼 후 매번 그를 볼 때마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번에 나는 본래 고개를 떨구고 지나가려 했는데 생각을 돌려 생각하니 대법제자는 원수가 없다, 내가 그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안녕하세요! 삼퇴하여 평안 보우하는 일을 알아요? 그러면 소도라는 이 이름으로 소년 선봉대 공산청년단을 퇴단하세요! 당신의 평안과 행복을 희망해요!” 그는 전혀 생각지도 않게 내가 주동적으로 말을 걸어 그의 평안을 바란다고 하자 그는 몸을 돌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늘로 향하더니 또 몸을 돌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좋소!” 했다.
이것도 내가 그에 대한 약속을 실천한 것이다. 우리가 이혼하는 날 민정국 입구에서 내가 말했다, “이때부터 우리 제각기 길을 갑니다. 나는 이쪽, 당신은 저쪽으로. 비록 당신이 나를 이렇게 해쳤지만 만일 어느 날 사부님이 당신을 남길지 보낼지를 선택하라고 하시면 ….” 그는 기대의 눈빛으로 나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남기는 쪽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혼하는 그때 삼퇴 조류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의 모친이 줄곧 그에게 삼퇴를 권했는데 시종 긍정하지 않았다. 뜻밖에 그는 명백한 일면이 나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정말 신기하다. 여기서 사부님의 경문을 다시 중복한다.
큰 액운을 풀다
인간세상 어지러움 그 얼마던가겹겹이 쌓인 은혜와 원한을 지나 왔구나마음 악하고 업이 커 희망 없는데대법은 연원(淵源)을 모조리 풀어가노라 《/span>홍음2>
(계속)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9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