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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서의 세월 호탕한 사부님 은혜(4), 유럽 법회를 회억

작자/대법제자 소엽

【정견망】

(1)

1998년 5월 중순 유럽법회가 처음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사부님께서 줄곧 서양민족의 중생들이 가급적 빨리 법을 얻게 하려고 조급하게 염려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서양 수련생이 매우 적었다. 그래서 나는 유럽법회에 참가해 지지를 나타내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다른 동수들과 교류하며 나의 유럽법회의 중요한 의미에 대한 인식을 설명하고 싶었다. 5월 말 우리 일행 10여 명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행 비행기에 올랐다.

5월 3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럽 제1회 파룬따파 심득교류회가 열렸다.

독일의 5월은 하늘이 높고 시원하며 날씨가 쾌청했다. 법회장은 화원 내의 한 클럽에 마련되었는데 환경이 우아하고 깨끗했다. 심지어 나무마저도 전지를 해서 잘 다듬어놓았고 조형이 규범적이라 몸이 정결해지는 느낌을 주었다. 이곳은 정말 철학의 고향이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고 모든 것이 다 질서정연했다.

이날 모두들 일찍 회의장에 들어갔다. 대륙에서 온 우리 동수들은 앞자리를 그곳 동수들에게 남기고 비교적 뒷자리에 앉았다. 뒤에서 앞을 보니 모두 금색, 흰색, 갈색 머리 일색이었다. 모인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서양 수련생인 것을 본 우리는 내심으로 정말 기뻤다.

당시 회의장에 온 총인원은 800여 명이었다.

(2)

오전 9시 정각 사부님께서 정확한 시각에 회의장에 들어오셨다. 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로 사부님을 맞이했다.

진행자가 사부님께 먼저 설법을 부탁드리자 사부님은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더러 먼저 말하라고요?”

내 추측에 이는 사부님의 본의가 아니었지만 수련생들의 열렬한 박수소리에 할 수 없이 강단에 오르신 것 같았다.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 유럽 파룬따파 수련심득교류회에서 설법하실 때 거대한 부처가 공중에 드러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1998530).


 리훙쯔 사부님께서 유럽 파룬따파 수련심득 교류회에서 설법하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1998530)

잠시 설법을 하신 후 사부님께서 진행자에게 물었다. “괜찮은가요?”

그러자 진행자가 “아직 40분 남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사부님은 계속 설법을 하셨다. 진행자가 제시한 정확한 시간에 끝내셨다.

그 다음은 수련생들의 교류였다. 발언하는 사람은 모두 서양 수련생이었다. 그들은 대법에 대한 인식이 매우 착실하고 성실하며 단순했다. 많은 사람이 막 연공을 하자마자 천목이 열렸다. 그들의 내심은 모두 사부님에 대한 감사와 은혜로 충만했다. 이 시간 사부님께서는 줄곧 자리 뒤편에 앉아 진지하게 들으셨다. 사부님께서는 이 얻기 어려운 모임을 매우 소중히 하셨으며 서양수련생의 교류에 시간을 많이 남겨 놓으려고 하셨다. 특히 신수련생이 발언을 많이 하게 하려고 하셨다.

점심 휴식 시간에도 사부님은 자리를 뜨지 않으셨다. 동서양 수련생이 모여들어 사부님을 둘러싸고 이것저것 질문했다. 사부님은 모두 미소로 답해주셨는데 매우 상세하게 해답해주셨다. 문제가 없는 사람도 떠나기 아쉬워했다. 사람들은 사부님과 함께 있었던 시각을 매우 소중히 하였다.

법회 둘째 날 오후 사부님께서 사람들에게 문제 해답을 해주셨다. 대륙에서 온 우리는 이 소중한 시간을 서양수련생에게 남겨주어야 함을 알고 있었기에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모두 손을 들지 않았다.

법회가 끝날 때가 임박해지자 사부님께서 탁자 위에서 가부좌를 하고 한 세트의 대수인(大手印)을 쳐주셨다(이는 사부님께서 처음으로 대수인의 방식으로 인간세상과 천상을 향해 법음을 전달하신 것이다). 수련생들은 모두 숨을 멈추고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으며 보고 또 보았다. 비록 우리가 대수인의 오묘한 내포를 알 순 없었지만 대법이 중생에게 가져다 준 자비와 아름다움을 우리는 몸으로 느꼈다.

나중에 대법연구회 관계자에 따르면 이 대수인 비디오가 광주 설법 DVD 앞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3)

이어서 진행자가 선포했다. “각국에서 온 수련생들은 사부님과 단체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륙에서 온 수련생들은 제외합니다.” 이번에 회의장이 즉시 들끓었다. 줄곧 자중하고 있던 서양 수련생들도 참지 못하고 이 의외의 일에 몹시 기뻐했다.

대륙에서 온 수련생을 보니 비록 입으로는 뭐라 하지 못하고 얼굴은 그래도 웃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실망과 갈망이 드러났다.

유럽 수련생들이 사부님과 단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나라별로 지역별로 또는 가족이나 팀 또는 연공장 단위로 한 무리씩 사진을 찍었다.

대륙에서 온 수련생은 이 장면을 보면서 진실로 부러워했다! 그들이 어떤 심정인지 생각해보았는가! 그때 사부님께서는 이미 국내에서 법을 전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사부님을 뵙고 싶어도 얼마나 힘들었는가! 더욱이 단체사진을 기념으로 남기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나는 사부님과 사진을 찍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고 밖에 가서 다른 일을 도우러 갔다.

얼마 안 되어 동수나 달려와 빨리 들어오라고 하며 사부님께서 대륙 수련생과 사진찍기로 동의했다고 하셨다.

대륙 수련생들은 너무나 기뻤다!

마침내 대륙 수련생들이 강단에 올라왔다. 사람들은 선후를 다투어 가능한 좋은 위치를 잡으려 사부님과 좀 가까이 앉으려고 했다. 나는 강단의 계단 쪽에 서서 한사람씩 지나가게 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사부님을 뵐 기회가 당신들보다 많고, 단체 사진을 찍을 기회도 당신들보다 많으니 먼저 가서 사부님과 더 가까이 서세요.’ 나는 마지막으로 강단에 올랐다. 이때 앞에 계시던 사부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셨다. 나는 단번에 내가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사부님은 다 알고 계심을 느꼈다.

단체사진을 찍은 후 사부님은 차례대로 수련생들과 악수를 하셨다. 한번 또 한번 또다시 한번 … 같이 온 조(趙)씨 아주머니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사부님, 세 번이나 악수를 하셨는데 어째서 또 하십니까?” 당시 나는 아주머니에게 바싹 붙어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또 나와도 몇 차례나 악수를 하셨고 나에게 많은 법을 말씀해주셨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너무 기쁘고 격동하여 사부님의 심정이나 표정 눈빛이나 의미심장한 말씀에 유의하지 않았다.

이틀의 법회가 끝이 났고 우리는 충만한 상태로 귀로에 올랐다.

귀국 후 들어보니 사부님께서 최초 유럽 법회의 개최에 대해 매우 만족해 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많은 서양 수련생이 중생이 법을 얻어 사부님은 매우 기뻐하셨다.

후기

(1)

나는 개인적인 행위로 일부 수련생들을 동원해 유럽 법회에 참가했다. 당시 들리는 말로는 북경연구회 관계자가 우리가 대법을 파괴했다고 비판했다고 했다. 함께 갔던 우리 매 사람의 심정은 모두 마음에 침중한 매듭이 있었고 압력이 아주 컸다.

법회가 시작하기 전 동수 소진(小陳)은 회의장 밖에서 우연히 사부님을 뵈었고 사부님께서는 그와 악수를 하셨다. 그는 사부님께 정황을 보고하며 자신의 고뇌와 곤혹을 설명드렸다. 사부님께서는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우리의 방법을 분명히 긍정하셨으며 아울러 공덕이 무량하다고 하셨다.

(2)

사부님께서 유럽 수련생과 즐겁게 사진을 찍고 있을 때 한 쌍의 부부가 그 속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들은 결혼 전에 성관계가 있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신체가 더러우니 사부님과 단체 촬영에 같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서 서서 부끄럽게 보았으며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사부님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그들을 향해 걸어오시더니 한손에 하나씩 끌고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셨다.

몇 년 전 뉴욕 법회 기간에 나는 우연히 그들을 만났다. 여자동수가 나에게 그 일을 말해주었으며 여전히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으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금까지 두 부부는 자신들의 나라에서 의연히 중요한 홍법 일을 하고 있다.

(3)

2003년 내가 제네바 유엔광장에 가서 홍법과 진상활동을 할 때 인도에서 온 동수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더러 자신이 바로 사부님께서 유럽법회에서 대수인을 친 비디오를 보고 법을 얻었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사부님을 보자마자 그가 선지자이며 큰 부처님이 세상에 내려온 것임을 알았고 그분이 친 대수인이 천상의 언어임을 알았다고 한다.

(4)

99년 7월 이후 대륙 공안이 나를 찾으러 다녔다. 그들의 손에는 유럽법회에서 사부님과 대륙 수련생이 찍은 단체 사진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내게 그 중 아는 사람이 있느냐,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들은 “당신이 말해주지 않으면 우리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물어봤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때 나는 무엇 때문에 사부님께서 처음에 대륙 수련생들과 단체 사진을 찍는데 동의하지 않으셨는지 알게 되었고, 또 무엇 때문에 사부님께서 한 번 또 한 번 우리와 악수하며 간곡히 부탁하셨는지 알게 되었고, 또 무엇 때문에 사부님께서 회의장을 떠나실 때 우리를 떠나보내길 아쉬워 하셨는지 알게 되었다.

피비린내가 곧 닥쳐오기 때문이었다! 생사의 고험이 닥쳐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주:

1999년 4.25가 발생한 이후 대법 연구회에서 통지를 보내 수련생들은 즉각 사부님과 찍은 단체 사진을 소각하라고 했다. 나는 즉시 그렇게 했고 심지어 조각마저도 소각해버렸다. 공안이 사진을 꺼내들고 내게 물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쿵쾅’거렸다. 어느 동수가 법의 요구에 따라 하지 않고 몰래 사진을 보존하다 틈을 타게 되었을까! 당시 사진에는 수십 명의 대륙 동수들이 있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1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