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채홍(彩虹)
【정견망】
이곳에서 기록한 것은 한 대법제자로서 나의 실제 이야기다. 그중에는 중공이 나와 우리 집을 박해하여 조성한 처참한 상처도 있고 사부님의 신적(神跡)과 가지(加持)도 있으며, 현실 생활 중에서 정에 이끌림도 있고 윤회전세(輪回轉世)의 꿈속 점화도 있었다. 이 글을 쓸 때 늘 상심하여 눈물을 흘렸다. 나의 이 실제 경험이 무신론자들에게 깊이 생각해보기 바라며 또한 법륜대법(法輪大法) 파룬따파를 실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꿈속의 길조와 션윈에 들어간 딸
2017년 나는 딸을 데리고 중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페이톈무용학교(飛天舞蹈學校) 시험을 보았다. 시험에 응모한 것부터 선발까지 모두 의외의 일이었다.
나는 중국에서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7차례 감금되었고 딸 역시 적지 않은 고생을 겪었다. 딸은 조산아로 태어나 매우 쇠약했으며 좀 더 튼튼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 나는 딸을 소년궁(少年宮 역주: 중국 청소년들의 방과 후 활동을 위한 종합교육시설) 무용반에 가입시켰다. 아이는 천부적인 재질이 있어서인지 비록 키는 작았지만 무용시험에서 전체 일등으로 붙었다. 한번은 어느 매체에서 아이의 모습을 녹화한 시디가 전 세계에 발행되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역주: 중국은 초등학교가 5년 과정이다) 때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딸에게 춤을 그만 두게 했다. 이렇게 중단한 시간이 곧 3년이 되었다. 그러다 2016년 연말 어느 동수가 딸에게 페이텐 무용학교 시험에 응시해보라고 했다. 나는 아이의 기본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아주머니와 저녁 내내 논쟁을 했다. 마지막에 그녀는 “그냥 신청만 해봐요. 거절하려면 다른 사람을 시켜 거절하면 되잖아요.” 어쩔 수 없어 나는 한번 시험해보자는 마음으로 딸에게 신청서를 쓰게 했다. 당시 겨울방학기간이라 딸더러 집에서 기본기를 연습하라고 했는데 딸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고생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나는 마음을 졸였으며 곤혹스러웠다. ‘이렇게 하는 게 옳은가?’ 어느 날 어느 정보가 갑자기 머릿속에 들어왔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도 빨리 하면 늦지 않다.’ 내게 약간의 신심이 생긴 것 같았다. 한번은 내가 어쩔 줄 몰라 딸에게 물었다. “너 이렇게 마음을 쓰지 않고도 시험에 붙을 수 있겠니?” 아이는 등을 보인 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붙을 수 있어요!”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압력이 매우 컸다. 삼촌 한분이 미국에 계시는데 나더러 늘 혼자 먼저 오라고 했기 때문에 원래 나 혼자 미국에 가려고 생각했다. 나는 특별한 재주가 없는데 만약 아이가 학교에 붙지 못하면 미국에서 딸을 부양할 능력이 없었다. 그때 좋은 꿈을 몇 개 꾸었는데 깨어난 후 나는 모두 아이와 유관한 길조임을 깨달았다.
그중 하나의 꿈은 이랬다. 어떤 사람이 내게 불꽃놀이 폭죽을 보내왔는데 내가 집에서 불을 붙였다. 불꽃은 퍼져나가지 않고 하얀색 지붕에 검은 구멍을 내었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더니 이상하게 내가 미국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밤하늘이 찬란했다. 깨어난 후 나는 딸과 관련이 있는 길조라고 생각했다.
신청한지 한 달 후 학교에서 통지서가 와서 아이에게 면접을 보라고 했다.
딸을 데리고 가는 길에 내내 기도를 하며 사부님께 우리가 중국을 순조롭게 떠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간수소에서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호관찰 상태라 그들 규정대로 하자면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가야했고 미국에 가면 내가 생각하는 두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대법을 실증할 수 있었다.
순조롭게 미국에 도착한 후 면접시험에서 교사 몇 분이 엄숙한 표정으로 내게 아이의 키가 작고 점프력도 모자란다고 말했다. 나는 당시 좀 쑥스럽게 생각했다. ‘시험에 붙지 못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난 단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시험 삼아 해본 것인데.’ 잠시 후 떠나려 할 때 교사 몇 분이 다가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는 남기세요. 사부님께서 오셔서 남기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나의 심정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치 평정하기도 하고 매우 감격스럽기도 했다. 이전에 꿈의 장면이 점화가 길조였다. 하지만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어찌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이는 1년 후 예술단에 들어갔고 현재 공연단을 따라다니며 중생을 구도하고 있다. 그것도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외국 언론에 진상을 알리고 무지개가 신적을 알리다
나는 대륙에서 아주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 두 가지 사건은 지금까지도 뼈에 새겨져 있다. 2001년 나는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해외언론에 박해를 폭로하는 항목에 참여했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비밀리에 중국에 들어와 파룬궁 수련생들이 정신병원에서 박해받는 실제상황을 취재한 적이 있다. 나중에 인터뷰에 참여한 수련생들은 반드시 현지를 떠나라고 요구받았다.
인터뷰 이후 모든 동수들은 분산해서 행동했다. 나는 두 명의 북방 수련생과 한 팀이 되었다. 나는 그들을 언니, 오빠라고 부른다. 그 때 우리는 두 지방에 갔었다. 우리는 먼저 어느 산골 마을에 도착했다. 언니가 자기 고향에선 박해가 심해서 판결을 받으면 기본적으로 모두 악명높은 마삼가노교소(馬三家勞教所) 행이라고 했다. 그녀는 고향에 있을 때 매일 인쇄한 전단지 만 장을 각지로 보냈다. 그녀가 경험한 반(反)박해는 기적이며 언니는 금강 같은 의지가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돌아가서 그곳 중생을 구도하려 했다. 오빠와 나도 대화를 나눴는데 나는 그의 말을 잘 듣는 청중이었다.
오빠는 자신이 갑자기 이번 행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식구들에게 알리지 못했고 또 연락이 끊어졌다고 했다. 그의 아내와 아이가 연루되었는데 식구들이 그 사악한 환경 하에게 안전한지 모른다고 했다. 내 기억에 한번은 그가 내게 물었다.
“소홍(小虹), 너는 지금 마음속으로 원하는 게 뭐야?”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도 고향과 부모님을 생각해요. 갑자기 떠났기 때문에 부모님이 몹시 걱정하고 초조해 하실 거예요.” 나는 그에게 내가 어릴 때 농촌에서 자랐는데 매번 비온 후 무지개가 있으면 환호했다고 알려주었다. 여기는 작은 산촌인데 무지개를 볼 수 있으면 심정이 평안할 것 같았다.
얼마 후 산골 마을을 떠난 그날 오후 오빠가 갑자기 말했다. “소홍, 봐요!” 비가 온 후 날이 맑아지자 하늘에서 한 갈래 무지개가 나타났다. 우리는 자동차에 타고 대도시로 갔다. 마침 신기한 점화처럼 가는 내내 그 도시에 항상 한 노래의 두 구절이 끊임없이 내 귀에 반향되었다. “비바람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무지개를 볼 수 있겠는가?” 나중에 그곳을 떠나 기차역에서 그와 해어질 때 오빠는 또 큰 소리로 나더러 보라고 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늘 만 리에 쌍무지개가 하늘 끝까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매우 감동했다. 이 경험을 기념하기 위해 나는 별명을 ‘채홍(彩虹)’이라 지었다.
반년 후 나는 명혜망에서 그 오빠가 남쪽 도시에서 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사망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나는 몹시 분개했으며 정말 큰길로 달려가 모든 사람들에게 중공의 사악을 알리고 싶었다. 오빠는 전에 경찰이었고 사망 당시 나이는 겨우 서른여덟이었다. 그는 정직하고 충실하며 직장에서 해마다 모범 직원으로 뽑혔다.
그가 공안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혔을 때 직장 상사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가 어떤 혹형을 받았는지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나는 심지어 그 주변의 동수에게 감히 말하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대륙의 그런 환경에서 소식이 새나가면 엄중한 결과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몇 년이 지나갔고 나는 운 좋게 이렇게 멀리 해외까지 나올 수 있었다. 그는 내 마음속의 영원한 오빠인데 나는 그를 방력굉(房力宏 팡리훙)이라 부른다. 나는 늘 오빠의 처자식을 생각하는데 요 몇 년 그들은 분명 지내기가 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그저 마음속으로 묵묵히 그들이 평안하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 때 해외언론에 중공의 박해를 폭로하는 행동 중에서 나는 두 명의 동수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중에 형을 받아 장기간 감옥에 갇혔는데 동수 이름을 하나도 팔아먹지 않았다. 나는 그때 행동 중에 함께 협력했던 동수들에게 감격했는데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돌보았다.
내 고향의 한 언니는 매우 가까이 살았는데 늘 함께 진상활동을 했다. 그녀는 똑똑하고 일을 잘했으며 담이 크면서도 세심했다. 한때 불치병을 앓았었는데 병원에서는 암 말기라고 했다. 하지만 대법을 수련한 후 신체가 완쾌하고 얼굴빛이 불그레하다. 사람들이 다 예쁘다고 공인한다. 나는 우리는 늘 주민 사무소나 공안, 610 등의 교란과 위협 하에 상호 격려하고 공동으로 대면했다. 한번은 그녀가 세뇌반에 잡혀 갔으나 아무도 주의하지 않을 때 3층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주했다. 그녀는 자기도 불가사의 하다고 했다. 반드시 신의 보호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신체는 벽면을 따라 미끄러진 것같이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고 했다.
2009년 겨울 그곳 공안의 대대적인 체포가 있었다. 우리의 자료점이 파괴 되었고 많은 수련생들이 잡혀갔는데 그 언니도 잡혔다. 나는 당시 신체에 엄중한 병업 현상이 있어서 생사의 기로에 있어서 잡혀가지 않고 단지 수색만 당했다. 많은 동수들이 형을 언도 받았고 언니는 한동안 잡혀 있다가 석방되었는데 너무 심하게 박해를 받아서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언니는 나보다 겨우 8살이 많았다. 장례식장에서 그녀를 보니 아름답고 조용히 잠든 것 같았다. 그때 부친이 그녀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 지 겨우 한 달이 되었을 때여서 나는 이미 많이 괴로웠다.
나의 가족도 이번 박해에 세상을 떠났다. 언니는 또 갑자기 떠나 나는 마음이 끊어지는 것처럼 견딜 수 없었다. 집안에 틀어박혀 “아….”하고 소리질렀다. 나는 누워서 생각하기를 이렇게 잠이 들어 깨어나지 말았으면 했다. 그런 심정이 반달이나 지속되었는데 나중에 갑자기 끝없는 무서움이 몰려 와서 비로소 깜짝 놀랐다. “나는 대법제자다. 정을 내려놓아야 하고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
부모의 만년의 고생은 운명의 안배?
그 몇 년간 내가 박해를 받으면서 가족들에게 가져온 거대한 고통을 지금까지도 털어놓을 방법이 없다. 1999년 말 내가 처음 북경에 상방하러 갔다가 북경주재 판사처에 잡혀 들어갔고 나중에 경찰에 이끌려 이곳으로 왔다. 파출소의 여자 소장은 살기등등하게 마치 범죄자를 대하듯이 했다. 건물 안에 사람이 가득 차 있었는데 경찰, 직장 동료 게다가 모친도 있었다. 잠시 후 부친이 불려왔다. 부친은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람이 부친에게 말했다. “보시오, 당신 딸이 말을 하지 않고 여전히 연공하겠다고 하니 즉시 구류소로 보내겠소.”
부친은 다가와서 내 머리를 주먹으로 세게 쥐어박았다. 나의 머리카락이 다 흐트러졌다. 직장 여상사가 놀라서 나를 끌어안았다. 감옥소로 보내는 길에 모친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벌벌 떨며 두 손으로 나를 꼭 잡으며 부탁했다. “연마하지 않는다고 써, 안되겠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부에서 네 아버지 직장을 자를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그를 비웃을 거야. 그도 기가 죽을 거야. 네가 나와도 그를 보지 못할거야.”
다음날 저녁 나는 처음 구류소로 보내졌으며 눈앞의 환경에 눈이 멍해졌다. 십여 명이 차갑고 어두운 작은 방에 가득 밀려있고 변기통이 한 구석에 있으며 침상은 시커먼 나무판이었다. 식구들의 고통이 연상되어 나는 울었으며 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그랬더니 수건에 모두 핏자국이었다. 그때 왜 그 여자 상사가 놀라서 나를 안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주먹으로 때릴 때 코피가 흘렀던 것이다. 나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식이며 아버지 손바닥의 귀한 딸인데 어려서부터 이렇게 맞은 적이 있던가?
가족들이 이렇게 시달리게 한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은 칼로 에이는 듯 아팠다. 그러나 나는 양심을 팔수는 없었다. 그때 마음속으로 진지하게 내가 연마하는 파룬궁이 무엇인지 사고하고 있었다. 나에게 건강한 신체를 주고 사람이 되는 도리를 가르쳤으며 남들에게 선하게 대하게 했다… 당시 만일 나가서 부친을 보지 못하고 직장을 잃는다 해도 하늘의 이치가 있어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부친은 청장급 고위간부였다. 내가 파룬궁을 연마하여 그는 그곳에서 중점관리대상이 되었으며 성에서도 끊임없이 그에 대해 조사하고 당부했으며 겁을 주었다. 한번은 내가 그와 단독으로 있을 때 그는 또 화를 내며 연공을 못하게 했다. 나도 화를 내며 다투었다. 더 이상 욕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부친은 내가 말대답을 하는 것을 보고는 의자를 들어 나를 치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즉시 생각했다. ‘나는 수련인인데 어떻게 부친이 화를 내게 할 수 있느냐? 부모는 선량한 사람인데 그들이 겁을 먹어 대법의 진상을 알려고 하지 않는데 그들이 어떻게 정부가 새빨간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얼른 부친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하지만 곧 이은 장면에 나는 깜짝 놀랐다, 부친은 철퍽하며 바닥에 꿇어앉더니 머리를 대리석 판에 부딪혔다. “쿵쿵, 펑펑….” 연달아 이십 번 가량 절을 하더니 나더러 집에서 나가고 더 이상 집에 있지 말라고 했다. 당시 부친은 60세였는데 백발이 다 된 머리를 보고 나는 부축하여 자리에 눕혔다. 나는 곧 떠나가겠으니 몸조심하라고 말했다. 부친도 울면서 가지 말라고 떠나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직장에서 나를 해직하게 하지 않도록 모친이 내 상사를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부모님은 이미 놀라 핍박당해 정상인의 행위를 잃었다. 그들은 그런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연속해서 중병에 걸렸다. 한번은 내가 부친에게 병이 들어 얼마나 아프냐고 물었다. 그는 “생불여사(生不如死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하다는 뜻)”라고 했다. 부모님은 병의 고통속에서 10년을 버텼다. 그들 생명의 마지막 몇 년은 내가 옆에서 지켰다. 중공의 고압으로 그들은 감히 연공도 못하고 구도될 기회를 잃었다. 부친은 생전에 눈이 빨갛게 부어 내게 말하기를 자신의 병은 나 때문에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감당한 그런 고통과 또 나처럼 이렇게 고통스런 인생이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부모님의 묘지에 그들이 태어나서 사망한 기간이 7.20 – 4.25으로 새겨진 것을 보고 놀랐다. 이 두 날짜는 대법제자에게 매우 특수한 의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칼로 내 심장을 도려 긋는 것처럼 운명의 안배는 그리 진실함을 느꼈다. 나는 돌파할 수 없었다.
박해가 엄중할 때 나는 몇 차례 자살을 생각했다. 속으로 사부님께 나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고 인간 세상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때 사부님은 나에게 다른 공간의 장엄하고 화려한 화면을 나타내 주셨다. 어느 날 꿈속에 나는 어느 공간에 갔는데 구름층 중에 장려한 궁전이 있었다. 그 세계 왕의 음성이 전해져 왔는데 나더러 의리가 있으며 자신의 가장 어린 9째 딸이라고 했다. 나는 그 경지 중에 동시에 두 개의 비할 데 없이 큰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붉은 옷을 입은 여신의 형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봉황과 같은 신조(神鳥)였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부모를 생각하며 그들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천상에서 날아다녔는데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곧 지구의 이쪽으로 날았으며 다시 아래로 움직이자 곧 지구의 저쪽으로 날아갔으며 전혀 지구로 내려갈 수 없었다. 이때 음성이 전해져 왔는데 네가 내려가고 싶으면 반드시 세간의 이치에 부합해야 한다. 한 마리 새로 변해야만 내려갈 수 있다. 그 순간 나는 부모와 매우 가까운 언니, 자매 동수 집의 상공으로 날아가 그들 둘이 있는지 어떤지 여전히 수련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아니다, 나도 수련해야 한다. 이 일념을 따라 꿈에서 깨어났다. 전반 과정은 영화를 상영하는 것 같았고 귀 옆에 매우 큰 비바람 소리가 따라다녔는데 마치 이번세의 인생 같았다.
꿈속에서 신은 나에게는 9차례 윤회전생한 인생이 있는데 신통으로 한 번에 뛰어넘어 갈 수는 있지만 신이 허락하지 않으며 사람의 몸으로 매 차례 인생의 구석구석을 다 걸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해외에 도착한 지 오래지 않아 나는 내가 보고 싶어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숙부님을 보았다. 그는 남에게 나를 소개시킬 때 그녀가 파룬궁을 연마해서 부모님이 대륙에서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매우 쓰라렸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중공의 거짓을 폭로하고 중공의 무신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단락 윤회를 공개하여 하늘에 계신 부모님의 영을 위로하고 싶다.
정의 인연을 따라 금생에 윤회
농학을 전공하신 부모님은 대학을 졸업한 후 농촌에 배치되어 ‘시창교(屍淌橋-시체가 흘러온 다리라는 뜻)’라 불리는 천년 전설이 있는 농촌의 작은 마을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나는 늘 친구들과 마을의 작은 바위 다리에서 놀았는데 작은 다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기어갔다. 어느 날 그곳의 동급생이 물었다. “넌 이 다리가 무슨 다리인지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가 말했다. “이것을 ‘시탕교’라고 불러. 할머니 말씀이 옛날에 우희(虞姬 서초패왕 항우가 아끼던 미인)라는 여자가 자살을 했는데 그녀의 시체가 이 강을 따라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다가 도중에 암초에 걸렸대. 나중에 사람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체가 멈춘 이곳에 다리를 만들었고 우리 마을 역시 그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은거래.”
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시내로 돌아왔고 매번 내가 혼자서 달빛 아래 저녁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싸싸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면 처량한 슬픔이 우울함이 올라오곤 했다. 나는 매우 단순하고 밝은 아이인데 어디서 온 슬픔일까? 이런 정서가 매우 이상했다. 나중에 나는 오직 비슷한 장면이 있기만 하면 이런 심정이 들었다. 이런 현상은 줄곧 내가 수련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나기 반년 전(2012년 말) 나의 한 세의 윤회가 열렸다. 한번은 꿈속에 내가 어느 묘지위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다. 위에서 묘지 아래를 보니 묘에는 관이 하나 있었고 거기는 보통 키에 몸이 호리호리하고 20세 정도의 붉은 색 고대 복장을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이때 어떤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 누워있는 사람이 바로 우희다.” 내가 망연하게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그 음성이 또 말했다. “너는 너 자신을 보고 있는데 그녀의 묘가 부근에 있다.”
나는 우희가 달빛이 휘영청 밝고 나뭇잎이 날리는 밤에 목에 피가 사방으로 날리며 죽었음을 알았다. 나는 내가 줄곧 곤혹하며 해석할 수 없었던 현상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2천 년 전의 고통이 마찬가지 장면을 통해 미시적으로 오늘 몸에 전해오는 현묘함을 느꼈다. 동시에 나는 역시 곤혹스러웠다. 3,40년의 느낌과 점오를 왜 오늘에야 나에게 알려주는가? 그 후 사부님은 계속해서 3년 동안 나를 점화하고 의혹을 풀어주셨다.
나는 고향 사람 중에 두 명의 문인을 알고 있는데 그들과 얕지 않은 연분이 있다. 한사람은 삼촌인데 그는 역사학자로 매우 일찍 해외로 나갔다. 다른 한 사람은 청년 시절 친구인데 시인으로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다. 나는 그들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삼촌은 정직하고 선량하며 진실한 말을 하고 진실한 중국 근대사를 쓰다가 중공에 감시당해 대륙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박해당하는 세월 동안에 우리 집 친척들도 모두 중공의 거짓에 속았고 오직 삼촌만 나를 이해했다.
나는 삼촌과 십여 년간 연락했는데 매번 나는 필명 “채홍(彩虹)”이나 아명으로 연락하곤 했다. 내가 어려울 때 그에게 연락하면 그는 나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고 격려했으며 이 길을 반드시 걸으며 자기 곁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내심 감격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대륙을 떠나려고 계획했고 또 사부님의 점화로 내가 그를 도와 대법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이트에서 그의 소식을 찾았고 그가 이런 말을 쓴 것을 보았다. “그럼 유정(有情)한 역사가 우리처럼 이렇게 유정한 사람들에게 보답하게 하자…” 나는 수련인인데 당연히 다른 사람과 다른 이해가 있다.
암암리에 안배가 있었는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신문에서 청년시절 친구의 이름을 보았다. 우리는 20여 년간 만나지 못했고 아무 소식도 없었다. 내가 아주 놀란 것은 그는 나를 오래 기억하고 있었고 나를 위한 청춘 기록의 많은 시를 썼던 것이다.
바로 그 기간에 나는 정견망에 한편의 글 《고쳐진 역사(被改編的曆史)》라는 글을 보았는데 글을 쓴 작자는 동수(윤회중의 항우)였다. 나는 이에 회답하고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 《고쳐진 역사를 본 감오(看被改編的曆史感悟)》라는 글을 썼다.
비록 사부님의 점화가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의혹이 생겼다. 어째서 우희가 나일 수 있다고 느꼈을까?
나는 일부 ‘우연한 일치’를 발견했다. 우희의 묘는 천년이 넘도록 수수께끼다. 하지만 나의 부친은 한때 그 토지를 관리했는데 그때는 막 국토청이 생겼을 때였다.
한번은 사부님께 향을 올린 후 갑자기 동수의 문장 중 한 단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의 말은 금세에 자신의 이름 중에 이청조(李清照 역주: 남송시대의 유명한 여류 시인)가 쓴 《/span>하일 절구(夏日絕句)>라는 시 중의 두 글자가 있다고 하며 이름 속에 천기가 들어 있다고 했다. 갑자기 나는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한번 찾아보자. 우희의 ‘虞’자 중에서 나는 금생의 한 단락 인생이 있음을 발견했다. ‘虞’란 글자 속에 그 시인의 이름(내 청년 시절의 그 친구)과 그가 쓴 시 속의 내 이름이 들어 있다. ‘虞’란 글자의 중간에 ‘七’자가 있는데 우리가 몇십 년 후 만났을 때 그가 내게 써준 첫 번째 시의 제목이 《/span>七彩였다. 시에서 그는 나를 채홍(彩虹 무지개)에 비유했다. 나는 매우 놀랐다. 그것은 나의 필명인데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우연의 일치인가?
그 일이 있기 몇 년 전 그는 또 다른 시를 하나 썼다.
“우리가 은밀한 원호(弧)에 도달했을 때 각종의 예견이 가능하다.”
마치 이 예언이 정확한 것처럼 ‘은밀한 원호’그것은 우리가 몇 년 후 비로소 발견한 무지개가 아닌가. 내 생각에 이는 오직 신만이 알 수 있으며 그에게 천부적인 문필로 써내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내가 그에게 진상 자료를 부치고 그 때의 인생과 신기함을 알려주었다. 그는 나를 믿었는데 왜냐하면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우리가 발견한 일부 신기한 일들이 자신의 붓으로 써낸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친구였던 그는 시에서 자신을 맹호(猛虎)에 비유했는데 바로 ‘虞’ 안에 ‘虍’가 있다.
2015년 나는 어느 동수 아주머니를 대만에 보냈고 그 후 그녀는 미국에 가서 딸과 만났다. 대만에 도착한 후 그곳 사람이 우리에게 여관을 예약해주었는데 이름이 “도희(桃禧) 항공성 국제대주점”이었다. ‘도희(桃禧)라는 두 글자를 보고 나는 매우 놀랐다. 자기가 신에 의해 복숭아(桃)로 비유됨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 인생에서 세 번째 점화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 시인과 만난 후 그가 나를 桃로 비유해 나에 관한 시를 써서 세계적으로 큰 상을 받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 소년 시절에 기억한 한수의 시가 생각났다.
“복숭아꽃을 망가뜨려 온통 붉게 되었고옥산이 넘어지니 다시 일으키기 어려워라
(揉碎桃花紅滿地,玉山傾倒再難扶)”
이것은 시창교에서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span>홍루몽에서 본 시의 한 구절이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구절을 기억하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갑자기 매우 상심하여 한참동안 울었다.
당시 이 시구를 보았을 때 신체가 마치 무엇이 맹렬하게 통과하는 것 같았고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이제 비로소 어렸을 때 신이 “목에 피가 튀는” 인생을 점화해준 것을 알았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한 세 ‘패왕별희’ 영웅의 말로, 우희의 자살과 대응되는 금생의 “우(虞)” 성은 구세력의 안배이며 금세에 수련 중에 내가 집착을 내려놓지 못할 때 나를 교란하여 길을 잃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게 만든 것이었다.
다시 감옥에 들어가 정념이 신위를 드러내다
대만을 떠날 때 나는 아주머니에게 미국의 삼촌에게 편지 한통을 부탁했다. 그에게 우리 집 사정을 알려주고 오로지 생명이 그곳에 도달해야 비로소 운명의 안배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부친이 생전에 그곳 토지를 관리한 것은 천고의 수수께끼에 대응하는(우희의 묘) 것이다. 삼촌은 역사학자이니 나와 만난 적 없는 그 동수에 대응해 역사를 주제로 문장을 썼다. 삼촌은 무신론자이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이해하던 나는 그에게 나를 도와 그 사람을 찾아달라고 했다. 몇 달 후 삼촌은 편지를 받았고 그는 내게 전화를 걸어 반드시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나도 그에게 미국 갈 시간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 후 감옥에 갇히는 재난 때문에 내가 미국 가는 계획은 갑자기 중단 되었다.
2016년 나는 아이에 대한 정을 내려놓고 독자적으로 미국에 가려고 했다. 여름휴가 기간인 2개월 시간에 나는 딸을 잘 봐주고 9월 개학할 때 내가 떠나면 된다. 7월 1일 아이가 방학하는 첫날 오후 심한 폭우 중에 우리 집 문이 펑 열리더니 한 무리 공안이 흉신한 귀신처럼 쳐들어왔다. 나는 그들이 왜 쳐들어오는지 물었다. 그들은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나더러 인터넷 상의 지명수배범이라고 했다. 내가 1년 전 외지에서 파룬궁 진상자료를 뿌리다 그들에게 감시당했는데 오늘 정식으로 나를 체포하러 온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수련한 후 7번째 체포이며 가장 흉악한 한차례였다. 몇 년간 나는 세뇌반 구류소 정신병원에 갇혀보았고 나는 신체와 정신적으로 엄중한 손상을 입었다. 정신 병원에 입원하여 박해받아 피를 토했다. 세뇌반에 있을 때는 세상에 살 날이 머지않은 부모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내가 모시기만을 기다렸다. 610 공안은 끊임없이 난리를 치며 나를 노교소에 보내려고 했다. 나는 마음 속 고통으로 졸였으며 머리카락이 빠져 땅에 떨어졌다. 이번으로 7차례 체포되면 외지의 간수소에 보내져서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수련이 사악에게 틈을 탔기 때문임을 알았다. 나는 속으로 사부님께 참회하고 나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일 개월만 갇혀 있을 수 있으며 하루도 더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지 않는가.
공안의 기세는 흉흉했다. 그들은 밤에도 나를 심문하여 잠을 재우지 않았다. 몇 차례 심문을 받을 때 나는 일체를 내려놓고 평정하게 그들에게 대법 진상을 말했다.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고 했다. 나는 나를 책임진 경찰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작업 번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가는 어느 날 당신이 이렇게 나쁜 짓을 한 것을 전 세계에 폭로할 것입니다.” 그는 단번에 의자에서 튀어 일어나더니 두서없는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옆에 있는 젊은 경찰을 가리키며 내가 한 말을 적으라고 하면서 내가 경찰을 협박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젊은 경찰에게 “기록하지 마세요. 나는 협박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선을 권했다’라고 적으세요.” 그는 나를 매우 오랫동안 심문했다.
한번은 그가 말했다. “당신은 겉의 미소로 두려운 마음을 가리는군.”
내가 말했다. “나는 진정 두렵지 않습니다. 내가 대법을 수련하니 좋은 미래와 내일이 있지요. 하지만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위험입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의 오른손이 흔들리는 것은 내심 두려워한다는 뜻이오.”
나는 아연실소했다. “당신들이 내 손발을 쇠사슬로 묶고 또 쇠의자에 묶어놓고 오직 내가 글자 쓰도록 손만 남겨 놓았는데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사실 그 기간에 매일 마음속은 불에 타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적어도 3년 형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비록 연옥같이 시달렸지만 사부님께서 줄곧 내 곁에 계시며 보호하고 점화해주심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심문 받을 때 어떤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당당하면 너는 떠난다.”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감옥을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알았다. “당당하다”란 바로 평탄하게 일체를 내려놓으란 뜻이고 “너는 떠난다”는 것은 감옥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수련의 길과 만나는 마난은 자신이 하기 나름이며 신은 사전에 다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몇 차례 심문은 나를 극한까지 핍박했다. 내성적인 나는 말하는 음성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정념으로 신적(神跡)을 느꼈다.
한번은 그들이 끊임없이 수법을 바꾸어 진상 자료의 출처를 말하게 했다. 당시 몇 명 다른 동수도 잡혀 있었다. 경찰은 다른 사람이 이미 나를 팔아먹었고 진상 자료는 내가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조급하여 견디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나는 두 마디 말만 할 수 있는데 ‘파룬따파 하오 파룬따파는 정법이다’.”
당시 나는 다른 공간을 포함한 온 방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나를 심문하던 경찰 두 명도 진동을 받았다. 그들이 기록하던 두 대의 노트북 컴퓨터가 단번에 꺼져버렸다. 그들은 수치스럽고 노여워하며 서로 말다툼을 하고 서로 상대가 일을 잘못했다고 질책했다. 간수소 소장이 지나가다 와서는 나에게 뭐라고 시끄럽게 했다. 나는 범인이 아니며 대법제자이니 존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한쪽으로 돌리고 거들떠보지 않았다.
어느 여경이 말했다. “당신을 잡아온 이후 지금까지 줄곧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했소? 당신이 자백하면 내가 당신을 담보하겠소, 떠날 수 있소.”
나는 말했다. “당신이 나를 돌봐준 것을 압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보호하진 못합니다. 우리 사부님만이 나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나를 변호 할 인권변호사가 보름 후에 달려왔다. 그는 그 도시의 많은 관련 기관에 고소장을 썼다. 나의 정보가 사이트에 올라간 후 국내외에서 많은 동수들이 그곳 공안의 전화번호를 폭로했다. (경찰이 스스로 말해주었다) 사부님, 동수님 감사합니다. 8월 1일이 되어 나는 장장 한 달 동안 잡혀 있다가 “소환하면 올 것을 보증한다”는 명목으로 석방되었다. 그곳을 떠날 때 나는 격동하여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매우 멀리 걸어갔는데 두 차례 고개를 돌려 나를 잡아왔던 경찰 두목이 떠나지 않고 나를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속으로 그리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몇 차례 말한 적이 있는데 설사 진술을 거부하더라도 나에게 형을 판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손에는 진술을 거부하고도 판결을 받은 사건이 몇 건 있었다.
간수소에서 심문을 받을 때 나는 주변 사람에게 진상을 말했고 두 명이 삼퇴를 했다. 사부님은 그들의 꿈을 통해 나를 격려하셨다.
내가 간수소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어느 범인의 꿈속에 그녀가 얼마 후 출옥할 수 있게 되었고 바깥에 많은 사람이 축하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 속에서 나를 보았다고 했다.
내가 출옥하는 그날(미리 알지 못했음) 한 범인이 정오에 잠에서 깨어 말하기를 그녀의 꿈에서 오후에 석방되는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인데(사람들은 일 년 넘게 갇혀있던 범인이 오후에 집에 돌아가게 되어 기뻐했다) 그중 한 사람은 남자 경찰이 데리고 갔다고 했다. 꿈이 매우 정확하여 나를 잡았던 두 남자경찰이 오후에 차를 타고 와서 나를 데리고 나갔다.
집에 돌아오니 아이가 자기는 엄마가 곧 돌아올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은 경찰이 나를 잡아갈 때 사부님 법상 앞에 달려가서 무릎 꿇고 사부님께 엄마가 빨리 돌아오도록 보호를 부탁했다고 했다. 나중에 그녀는 두 차례 꿈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엄마가 곧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함께 일하는 동수 언니 한 사람도 흥분하여 내게 알려주었는데 자기도 내가 얼마 후 돌아올 수 있을 것을 알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꿈에서 사부님께서 그녀에게 내가 곧 돌아올 수 있고 또 내가 경찰 한 명을 구했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멍하다 한참 후 비로소 생각이 났다. 내가 잡혀있을 때 한 선량한 경찰이 나를 찾아와 대법진상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와 한참을 대화한 후 몸을 돌려 떠났는데 떠날 때 이렇게 말했다. “파룬궁은 아주 좋구나!” 생각하니 반드시 이 사람은 인연이 있는 경찰이었다. 나는 매우 감동했다. 수련의 길에 내가 좀 바르게 걸을 수 있으면 사부님은 나를 보호할 수 있고 내 모든 일을 안배하시고 그렇게 많은 신적을 보여주신다.
나는 경찰에게는 조금도 원망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지하기 때문이며 또 사당(邪黨)의 정권하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곳은 유명한 관광도시인데 내가 체포되었다 석방되니 그곳에 적지 않은 진동이 있었고 사악을 놀라게 했다.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공안은 그때 나의 체포를 큰 사건으로 보아 돈을 많이 썼다고 했다. 내 생각에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했고 그곳의 적지 않은 사람도 진상을 알았다.
미국에 오니 이곳의 동수는 나더러 박해를 폭로하는 진상 활동에 참가하라고 했다. 처음 회고할 때 매번 나는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나서 말을 할 수 없었다. 한 서양인 동수가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내게 이런 말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녀는 두 차례나 흰옷을 입은 신이 내 곁에 서 있었는데 매우 근심스런 표정이었다고 하면서 나를 안아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매우 감사했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또 이따금씩 슬퍼지곤 한다. 하지만 나는 신화를 증명하고 대법을 실증하기를 희망한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2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