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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에 대조해 안으로 찾음을 배워야 한다

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2006년 셋집을 얻는 과정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한 이웃집 할머니를 알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갈 때마다 늘 《전법륜》이나 신경문을 들고 읽고 있었다. 한번은 교류하다가 그녀가 내게 물었다. “구세력(舊勢力)이 뭐죠?” 나는 자신의 인식을 말해주었다. 나중에 안으로 찾음에 대해 말하자 그녀가 또 한마디 물었다. “안으로 찾는 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나는 “법공부를 많이 하세요.”라고 말했다. 나중에 그녀는 갑자기 뇌혈전에 걸려 반신불수가 되었고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일은 나를 몹시 부끄럽게 했는데, 나 자신이 법리상에서 똑똑하지 못했고 특히 안으로 찾음에 대해서는 나도 모호했으니 어떻게 노년 동수를 도와야 할지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매번 만날 때마다 늘 두루뭉술하게 법공부를 해서 안으로 찾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지만 어떻게 안으로 찾는지 법리상에서 분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올해 8월말 외지 동수와 어떻게 안으로 찾아야 하는지, 어떻게 장시간 발정념을 해야 하는지 교류하다가 비로소 진정으로 그런 모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비로소 노인이 제기한 문제가 실질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노년동수를 도와주지 못한 것에 대해 몹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번 교류를 통해 나는 사부님의 대법을 통독하면서 자신을 대조하고 자신을 닦는 것으로, 남과 대조하고 남을 ‘고치는’게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는 과거에 늘 사부님의 대법으로 남을 대조하면서 자신은 남보다 수련을 잘했다고 여겼다. 사실 근본적으로 그런 일이 아니며 그것은 진짜 수련이 아닌데 왜냐하면 사부님의 법에 따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부님의 신경문 《다시 방할하노라》를 처음 보았을 때 첫 구절이 ‘일본수련생’임을 보고 나의 일념은 일본수련생들에게 주신 법이니 나와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법학습을 할 때는 사부님께서 이번에는 또 무슨 신기한 것을 말씀하셨는지 보자고 생각했다. 안으로 찾음에 대해 명백해진 후 다시 이 경문을 읽으면서 ‘일본수련생’을 보았을 때 염두는 나 역시 그 속에 있다는 것이다. 매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는 늘 법에 대조해 자신의 염두와 생각을 찾았으며 어떤 사람마음과 관념이 되돌아 나오고 또 어떤 것이 줄곧 집착하고 내려놓지 못한 사람마음인지 찾아보았다. 이렇게 하자 매번 법을 읽을 때마다 늘 수확이 있었으며 또 일종의 이성적인 승화가 있었다.

밖으로 찾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나(我)’로 나는 어떠어떠하다는 등으로 하나의 ‘사(私)’를 둘러싸고 있다. 1995년 사부님의 신경문 《경지(境界)》를 보았을 때 나는 단숨에 외워버렸다. 당시는 아직 법에 대조해 자신의 옳지 못한 사람마음을 찾는 것을 몰랐다. 단지 나는 ‘선자(善者)’가 되어야 하여 “원망도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음”을 반드시 해내야한다고 강조하면서 악자(惡者)의 표현과 대조해 자신에게 질투심이 있는지 여부는 찾지 않았다.

동수와 교류한 후 함께 사부님의 이 경문을 통독했을 때 우리는 함께 대조하면서 자신의 질투심을 찾았는데 또 정말로 찾아낼 수 있었으며 그날 저녁 정말 아주 많은 수확이 있었다. 안으로 찾음은 대법의 제1표준으로 스스로 대조해야 한다.

고등학교 도서관에 근무하는 어떤 동수가 들려준 이야기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딸에 대한 정이 너무 중하다고 생각했다. 《전법륜》에서 “어떤 일이든지 모두 인연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사람은 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바로 사람에게는 정(情)이 있으며, 사람은 바로 이 정을 위해서 산다. 육친정ㆍ남녀지정ㆍ부모지정ㆍ감정ㆍ우정, 매사에 정분(情份)을 중시하며, 곳곳마다 이 정을 떠날 수 없다. 하려고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기뻐하거나 기뻐하지 않거나, 사랑과 미움, 전반 인류사회의 모든 것이 전부 이 정(情)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이 정을 끊어버리지 못하면 당신은 수련하지 못한다. 사람이 이 정에서 뛰쳐나왔다면 누구도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며, 속인의 마음은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자비이며, 더욱 고상한 것이다.”라는 법을 외우고 자신을 찾아보았다.

내가 딸에 대해 늘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은 정(情)이며 내가 그녀의 운명을 좌우하려 하고 그녀의 희로애락에 이끌리는 것 역시 정이다. 이렇게 스스로 찾아내자 심리적으로 훨씬 편안해졌다. 그런 후 또 “자비는 어떤 상태일까?” 생각해보았다. 이때 두 학생이 도서관에 들어왔는데 그녀가 이 두 학생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이 두 학생이 아니라 두 사람의 생명임을 느꼈다. 몇 초에 불과했지만 상태가 아주 아름답고 지극히 미묘해서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 정에서 뛰쳐나온 후의 자비는 진실로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너무나 현묘(玄妙)한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사부님께 큰 감사를 드렸다!

수련이란 입문한 시간의 길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런 말을 하자니 이미 20년을 넘게 수련했음에도 올해 8월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안으로 찾음을 배운 나로서는 부끄럽기 그지없다. 우리는 안으로 찾는 것을 기제로 형성해야만 한다. 지금 나는 문제에 부딪혀 때로는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 말하거나 잘못된 일을 하지만 지나간 후 아주 빨리 자신의 잘못을 인식할 수 있고 아주 빨리 사부님께 잘못을 승인할 수 있다. 모순에 봉착해 풀리지 않을 때면 나는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발정념을 한 후 사부님께 사람마음과 관념을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데, 예전처럼 조급하게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 단락의 교훈과 체험을 적어내는 이유는 아직도 안으로 찾음을 배우지 못한 동수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법에 있지 않은 언어나 행동이 있다면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1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