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대법 속에서 수련하는 사람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자신이 과거 역사 속에서 맡았던 일부 역할이나 주변 사람 또는 동수 사이의 일부 인연관계에 대해 알게 된다. 어떤 수련인은 정확하게 대할 수 있지만 어떤 이는 비교적 얽매이거나 심지어 일부는 그 속에 함몰되어 수련에 영향을 준다. 최근 법학습을 하다가 이 방면 설법에서 일부 깨달음이 있어 써내어 여러분들과 교류하고자 하는데, 공동으로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걸어가기 위해서다.
1. 역사 배역
사부님께서는 《미국동부법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매 사람은 서로 다른 이전의 생생세세 정황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사람의 인연으로 당신의 수련과는 관계가 없다.”
이 부분을 학습하고 나는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겼다. ‘내가 과거 생생세세에 지은 업력과 사람 사이의 은혜와 원한 업력윤보 이런 것들이 내 수련과 아무 관계가 없단 말씀인가?’
“그러므로 역사상 남겨진 일체 문화는 모두 우리 대법제자들이 만들었는데, 물론 사부가 당신들을 데리고서다. 인류의 역사는 마치 한 막(幕)의 연극과 같은 것으로서, 당신들은 국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영웅인물(英雄人物)에서 강도에 이르기까지, (웃음) 문인(文人)・명인(名人)에서 영웅에 이르기까지 모두 당신들이 한 것이다.”(《북미순회설법》)
나는 생각해보았다. ‘만약 내가 영웅을 연기했다면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는가? 만약 내가 강도를 연기했다면 남의 물건을 훔치고 적지 않은 덕(德)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만약 내가 간신을 연기했다면 남을 함정에 빠뜨리고 사람을 해쳐 많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천상에서 내려와서 많은 업을 짓지 않을 수 있는가?
사부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이런 역할을 연기하게 하신 것이 나더러 역사 배역의 은원(恩怨)과 애증 속에 빠지도록 하신 것일까? 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늘 역사상 어느 ‘영웅인물’의 아주 강한 개성 속에 도취되고, 몇 세(世) 부부의 정에 빠지거나 또는 남을 다치게 만든 것에 대해 자책하거나 또는 남에게 상처를 입었다고 미워하는 속에 있곤 한다.
어떤 사람은 모 동수가 몇 세 전 자신과 부부의 연분이었음을 알고 의도적으로 많이 접촉하고 많이 ‘도와주다’ 나중에 잘못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어느 한 생에 장군이 되어 큰 새를 죽인 적이 있음을 알고는 자신이 심한 병업을 앓는 것을 ‘이해’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또 어떤 이는 기억 속에서 자신이 어느 한 생에 남에게 목 졸려 숨졌음을 알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서글프고 처량해진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일찍이 어느 종교에서 수십 세를 수행한 것을 알고는 언어나 사유에서 그 한 문(門)의 진한 특징을 지니고 있음에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2. 구세력의 배치
왜 이럴 수 있는가? 왜 우리는 이런 역할 속의 정감(情感)・인과(因果) 및 경험을 그렇게 중하게 보는가? 왜 우리는 이런 기억 속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가? 왜 우리는 위아래로 이끌리면서 쉽사리 그것에 따라 흔들리는가?
사실 이는 바로 구세력(舊勢力)이 배치한 것으로 그것이 특별히 이렇게 배치했거나 또는 억지로 대법제자에게 가해준 것으로 우리는 피동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이 정법수련인지 모르며 오직 개인수련만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연기한 이 역할이 어떤 문화를 남기려고 했는지 상관하지 않으며, 오로지 내가 이 역할 속의 어떤 방면에서 업을 지었고 어떻게 업을 갚을 것인가만 관심을 갖는다. 그것들은 ‘선악에 보응이 있다’는 이치를 극단적으로 이용해 역사상 아주 오래 전부터 매 대법제자에게 한 세트의 것을 배치했다. 정법 속에서 우리가 아직 내려놓지 못한 집착심을 확대하고 강화해 그것이 조종하기 편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사부님의 정법을 교란하면서 최종적으로 그것들의 이기적인 목적에 도달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니다.
3. 대법이 주선(主線)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대법을 위해 창조된 것이고 대법은 이 극의 주요 줄거리(主線)이며 중생의 존재는 일체가 모두 이 주요 줄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사람들은 모두 극 중의 사소한 모순과 충돌에 골몰해 미혹되었고 극의 주제를 잊어버렸으며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잊어버렸다.”(《북미순회설법》)
대법이 주선(主線 주요 줄거리)이라면 대법이 도달하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사부님께선 《북미순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당신들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역사상 줄곧 아주 많은 대법제자와 연(緣)을 맺었다. 연(緣)을 맺은 것은 단지 하나의 표면적인 목적이며, 연을 맺은 후 대법제자와 나는 함께 인류문명과 대법이 요구하는 문화를 창조하는 짐을 져야 했다.”
나의 이해는 우리의 생생세세 윤회는 누구와 원한을 맺기 위해서가 아니며 또 누구와 백년해로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다. 우리는 연극 중의 이런 지엽적인 모순과 충돌에 이끌려 사랑하고 미워하거나 이런 표상적인 것에 미혹될 순 없는데, 인류 문명과 대법이 요구하는 문화를 창조하는 것만이 진정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 주선을 지켜야만 우리는 비로소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며 구세력의 배치에서 뛰쳐나올 수 있고 거대한 난 속에서 걸어나올 수 있으며 최후로 걸어갈 수 있다.
4. 역사 역할에서 걸어나오자
(1) 미혹 속의 ‘진실’
내가 기억하는 한 동수가 십여 년 전 동북의 고향에서 길을 가다가 ‘우연히’ 불교 신도들이 거행하는 석가모니 사리를 운송하는 성대한 의식을 만났다. 이 웅장한 대오를 본 그녀는 갑자기 자제력을 잃고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상심한 감정이 그토록 진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또 어떤 수련인은 자신이 현재 이 민족의 사람이므로 민족의 이익을 위한다는 정신이 너무 강해 사소한 문제조차 양보하려 않는데 정말이지 스스로 억제하기 힘들었다.
(2) 왜 진실하게 연기해야 했나?
“역사상 나타난 모든 명인(名人)과 큰 사건은, 사실 이 모두는 인류에게 문화를 다져주고 사상을 다져주고 사람의 이념을 다져주어, 대법이 전해지는 그날 사람이 법을 인식하고 진정한 수련문화를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각 지역 설법 7》 2006년 캐나다법회설법)
단지 문화를 다져주기 위해서인데 왜 우리가 그렇게 각골명심하면서 생생하게 연기해야 했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오늘 내가 사용한 이 언어는 말하기도 이렇게 수월하며 당신들이 듣기도 쉽고, 인식하고 이해하기도 아주 쉽다. 시간·공간·역사·만물·천지·중생·만사·수련·음양·고락, 사람과 신을 포함하여 나는 쉽게 이야기하였는데, 당신들은 알고 있는가? 매 한 단어의 개념, 그것의 내포는 모두 천만 년 역사의 실제 연기(演出)를 거쳐 걸어온 것이며, 역사의 과정에서 언어의 내포를 배양한 것이다.”
“모든 인류가 인식한 일체 물체, 매 한 가지 일을 모두 사람의 언어와 단어로 개괄할 수 있고 형용할 수 있으며, 표현(表達)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간단하고도 간단하게 문자를 하나 만들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진정으로 아주 깊이 감수하고, 몸소 체험하며, 그런 사람에게 실제로 조성한 심각한 과정을 겪어야만 사람으로 하여금 확실하게 글자·단어·어휘의 내포를 알도록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오늘 이야기한 법을 여러분은 단번에 알아들었는데, 만약 이 과정이 없었다면 오늘 내가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마 다 모를 것이다.”
“‘수련’이란 단어는 무엇인가? 왜 수련이라고 하는가? 수련을 어떻게 닦는가? 수련의 형식은 어떻게 표현하는가? 수련인은 어떠한가?”
“석가모니 부처요·노자요·예수요, 이런 신들은 반드시 세상에 내려와 실제로 한 차례 연기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문화를 남겨 사람들로 하여금 내포를 알게 하고,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는데, 수련인이 경과한 고생스러운 수련(苦修) 및 바른 믿음에서부터 원만의 과정 등등 등등을 포함한다.”(《각 지역 설법 7》〈미국서부국제법회설법〉)
(3) 문화를 남기고 배역에서 나와야
이 단락의 법을 학습한 후 나는 무엇이든 다 명백해졌다. 우리가 역사상 연기했던 역할이 아무리 ‘진솔’하고 아무리 ‘뛰어나며’ 아무리 ‘간사’했어도, 가슴을 뚫는 그런 고통이나 뼈에 새겨진 원한, 마음을 아프게 한 근심은 단지 이 단어의 내함(內涵)을 펼쳐내고 문화를 남긴 것에 불과하다.
무엇이 은혜를 망각하고 의리를 저버리는 것인가, 여기에는 또 얼마나 많은 표현이 있겠는가, 한 가지 극본에도 수 만 가지 표현이 있게 마련이다. 죽음에도 얼마나 많은 죽는 법이 있는가? 서서 죽거나, 앉아서 죽거나, 어느 곳에서 어떻게 죽는지 모두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또 의(義)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가? 관우에게는 관우의 의가 있고, 조조에게는 조조의 의가 있다면, 장비에게는 장비의 의가 있듯이 수만 가지에 그치지 않는데, 《삼국연의》에서 그야말로 남김없이 펼쳐냈다.
또 인자한 모친(慈母)은 어떠한가? 악비의 모친은 이렇고 맹자의 모친은 저런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수행(修行)은 또 어떠한가? 어떻게 수련하는가? 산속에 굴을 뚫고 들어가거나, 숲속에 들어가거나, 사찰로 들어가거나, 공능을 지니고 하거나 면벽하는 등등 온갖 다양한 수행이 다 있다.
이런 어휘들의 내함은 반드시 우리가 직접 뛰어들어 진실하게 연기해내어 사람들에게 펼쳐보여야만 했다. 오늘 사부님의 설법에서 언급하시는 매 한 단어에 대해 우리는 모두 그 심후하고 풍부하며 생생한 내함을 절실하게 감수할 수 있는데 마치 직접 체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면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의 의미를 알게 된다. 법을 이해하고 법을 알아듣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하려던 목적이다!
동시에 우리가 연기한 역사는 인류에게 인류의 문명을 개창해주었고 미래에 삼계가 영원히 존재하면 그 속의 사람은 또 마땅히 어떤 표준으로 사람이 되는가? 바로 이런 필요 때문에 우리처럼 극히 높은 고층생명이 직접 연기하고 개창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런 문화를 사람에게 남겨주어, 사람더러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 알게 한 것이다. 이 일은 삼계 내의 생명은 스스로 해낼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전의 생생세세 정황이며, 그런 사랑과 원한 애증 등은 나의 진정한 수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사부님을 따라 이 문화를 개창하고 사람에게 문화를 남겨준 것으로 이미 임무를 완성한 것이다. 그 연극 속의 줄거리, 모순, 충돌은 더 이상 나와는 그 어떤 연대도 없는 것이다. 오늘 내가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배울 수 있고 법을 이해할 수 있다면 충분한 것이다.
(4) 진아(眞我)를 찾다: 대법제자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 중에는 그 해 예수의 제자가 있고, 또한 석가모니의 불제자가 있으며, 물론 또 당신들이 모르는 그러한 신과 신의 제자가 있지만 당신은 정말로는 그의 제자가 아닌 대법제자로, 오늘날까지 기다리고자 함이 목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때 이러한 성자를 따라 인류의 문화를 개창했던 것이고, 오늘날은 또 이 문화를 이용해 사람을 구하고 있다.”(《2010년 뉴욕법회설법》)
“어떤 사람은 나는 어느 민족의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신의 눈에는 당신은 어느 민족도 아니다. 당신은 이 표면 신체가 아직 그 민족의 형상일 뿐, 진정한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아마 다른 민족으로부터 환생해 왔을 수도 있다. 많은 생명은 하늘에서 온 것이다.”(《2004년 뉴욕국제법회설법》)
사부님의 설법은 나를 청성하게 했고 진아(眞我)를 찾기에 충분하게 하셨으니 나의 진실한 신분은 바로 대법제자다!
어떤 사람은 잘 내려놓을 수 없고 벗어나기 힘들다고 말한다. 내 아들이 너무 마음에 걸려요, 내 남편이 밖에서 바람이 날까 걱정돼요 등등. 사실 대법 중에서 승인하는 오직 하나의 인연은 바로 법(法)의 인연뿐이며 다른 것은 다 가짜다.
“유유한 만세의 인연은 대법이 한 줄로 이끈 것이네(悠悠萬世緣 大法一線牽)”
(《홍음 2》<신의 길은 어렵나니>)
매 하나의 생명은 모두 법을 위해 온 것이지 결코 당신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연극에 너무 깊이 들어갈 때면 신의 눈으로는 어떻게 보겠는가?
“세세생생 윤회하며 배역을 바꾸었나니 군왕에서 서민까지 극 중에 빠져있네
(生生輪迴換角色 君王庶民劇中癲)” (《홍음 4》<중생을 구도하다>)
“인생은 한 막의 연극과 같은 것 가짜연극 진짜로 하니 어리석고 미친 짓이네
(人生如同戲一場 假戲真做傻與瘋)” (《홍음 3》<법을 기다리네>)
대법의 주선을 망각하고 자아를 찾지 못할 때면 곧 심하게 ‘미친’ 것이 되고 자아를 찾지 못하는 사람 역시 신이 가장 경멸하는 생명이다.
션윈(神韵) 공연 중의 한 프로그램에 두 수도인(修道人)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사람 속의 미색에 이끌려 자신을 잃어버렸고 사람 속에서 훼멸되었다. 다른 사람은 시종 흔들리지 않고 청성함을 유지했으며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고 최후에 공을 이루고 원만했다! 사실 고층차의 수련은 그리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 바로 선택이다. 우리가 법을 선택하기로 결정하고 오직 법을 수호할 때라면 한걸음에 걸어 나올 수 있다.
5. 지은 업은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문화를 개창하는 과정에 실로 수많은 업(業)을 지었다. 그렇다면 ‘선악에는 보응이 있고’ ‘사람이 무엇을 했으면 모두 상환해야 하는’ 이 삼계(三界)에서 우리가 지은 업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우리에겐 위대한 사부님이 계신다! 사부님께서 매 대법제자를 위해 감당하셨다.
“나는 정말로 당신들을 대신하여 당신들이 저지른 천백 년의 죄를 감당했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당신들이 생생세세에 지은 하늘처럼 큰 죄업(罪業) 또한 당신들 자신이 감당하라고 하지 않았으며”(《정법시기대법제자》)
대법에는 업을 갚기 위해 업을 갚는다는 이런 안배가 없다. 역사상 우리가 지은 아무리 큰 업력일지라도 또는 남에게 조성한 그 어떤 상해라도 사부님께서는 모두 우리를 위해 업력을 삭감해주셨는데 오직 심성을 제고하기만 하면 넘어갈 수 있을 정도만 남기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난(魔難)에 처했을 때 당신이 만약 그 세(世)에 내가 그를 나쁘게 대했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니 갚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거나 또는 나의 업력이 커서 내가 감당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라고 말한다면 당신이 이렇게 생각할 때 구세력의 배치에 동의하고 대법의 주선을 망각한 것이 아닌가? 역사의 인연 속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며 우리는 마땅히 심성(心性)에서 시작해 증오심, 두려워하는 마음, 이익심, 육친정 등의 방면에서 내려놓는 것에 공력을 들여야만 바른 길이다.
6. 윤회문장을 정확히 대하자
어떤 동수는 이런 류(類)의 문장을 배척하면서 가짜라 여기고 반면에 어떤 동수는 이런 문장 속에 빠져 들어가 감수를 찾곤 한다. 이 두 가지 모두 극단적인 인식이다.
동수가 쓴 수많은 윤회문장들은 글이 소탈하고 대범하면서도 마치 흘러가는 구름이나 강물처럼 자신이 본 장면을 독자들 눈앞에 진실하게 펼쳐 보인다. 이는 실로 쉽지 않은 것이고 정말이지 신력(神力)으로 한 것이다. 사실 이것 역시 우리 수련의 일부 내용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 수련생들은 부처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 부처에 대한 인식이 매우 결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 몇 년간 다만 법을 전할 따름이고 부처의 부동한 경지 중의 정황과 불·도·신과 우주의 정황을 적게 말했기 때문이다.”
“장래 수련 중에서 많은 수련생들이 모두 볼 수 있을 것이며 당신들 자신이 이 한 부분을 충족시킬 것이다.”(《각 지역 설법 1》〈베이징 국제교류회 설법〉)
이런 문장들에서 우리는 역사상 수행인의 각종 상태 및 신선의 일부 표현형식을 볼 수 있고 또 역사과정 중에서 법을 위해 온 생명이 대법을 찾으며 대법을 기다리기 위해 겪었던 온갖 괴롭고 고달팠던 과정들을 볼 수 있다. 또 미혹 속 세간의 험악함과 길 잃은 생명의 비참한 결말을 볼 수 있고 명리정(名利情)이 허환(虛幻)임을 볼 수 있으며 인과응보가 진실로 존재함을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수련의 기연을 반드시 소중히 여기도록 우리를 다그치며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며 방향을 잃지 않게 한다. 동시에 우리 마음속의 일부 의심과 걱정을 풀어내 우리가 정진하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다그친다. 우리가 오직 대법의 요구에 따라 모든 것을 가늠한다면 이런 것들은 모두 정면(正面)적인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종합하면 역사상 무수했던 우리의 윤회는 모두 문화를 개창하기 위한 것으로 역사상 어느 역할을 맡았든 모두 진아(眞我)가 아니다. 우리의 진실한 신분은 바로 대법제자다! 우리의 사명은 조사정법(助師正法)이며 “법을 얻어 하늘로 돌아감이 본래의 뜻이라네(得法回天是本意)”(《홍음 4》〈대법이 전해졌거늘 아직도 미혹되어 있는가〉)이다.
교류에 부당한 곳이 있다면 부디 자비롭게 지적해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2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