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풍
【정견망】
“당신들이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아닌가?”라는 말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듣게 된다. 때로 나는 이 말에 자극을 받아 생각해본다. ‘정말 그러한가? 아니면 낙숫물로 댓돌을 뚫을 수 있을까?’
공산사령은 마(魔)이고 대법은 도(道)인데, 마는 영원히 도를 뛰어넘을 수 없다. 나는 지금 마를 구성하는 입자는 도를 구성하는 입자처럼 훨씬 더 세밀하고 미시적이지 못함을 깨달았다. 입자는 세밀하고 미시적일수록 에너지가 더욱 크기 때문에 마는 도에 의해 소멸되고 해체될 수 있다. 하지만 특정한 한 층차에서는 자신보다 높은 층차에 대해 모두 미혹이며 층층마다 이러하다. 때문에 어느 한 층차 중에서는 종종 마(魔)와 도(道)의 세력이 서로 필적하거나 심지어 일시적으로 마가 우위를 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미혹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렇게 안배된 것이다.
하지만 일단 도(道)가 불리해지고 그 시간이 오래되면 한층 더 높은 도가 와서 해결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마치 《봉신연의》에서 때로 무왕측이 안될 것처럼 보이면 곧 보다 높은 정신(正神)이 와서 도와주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사람이 수련하기에 잘 닦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이 때문에 일부 마난이 출현하지만 가장 본질상에서 말하자면 공산사령(共產邪靈)과 대법(大法)은 근본적으로 같은 하나의 층차와 등급에 놓을 수 없다.
승부는 이미 다 정해져 있고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또 속인 층차의 상태와 규칙에 부합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마치 막 장기를 배운 사람과 장기 국수(國手)가 장기를 두는 것과 같다. 국수가 게임에서 이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장기판의 규칙에 따라 차례대로 두어야지 처음부터 직접 상대방을 외통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다. 이 비유가 그다지 적당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바로 이런 뜻이다.
우리의 에너지는 법(法)에서 내원하는데 그는 일체를 만든 근본이다. 우리가 법에 동화한 후 표현되어 나오는 정념(正念)과 정행(正行)은 바로 법을 실증하고 사악을 해체하는 것이다.
소동파는 《전적벽부(前赤壁賦)》에서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골짝의 밝은 달은 귀로 얻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만나면 빛을 이루어서 가져도 제한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다. 이는 조물주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惟江上之清風,與山間之明月,耳得之而爲聲,目遇之而成色,取之無禁,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而吾與子之所共適.)”라고 했다. 우리의 에너지는 소동파가 말한 것처럼 “가져도 제한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탁세(濁世)의 청류(淸流)로, “연못에 ‘어찌 그리 맑은가?’라고 물으니 원류에서 싱싱한 물이 오기 때문(問渠哪得清如許,爲有源頭活水來–역주: 남송의 유학자 주희의 시 《활수정관서유감(活水亭觀書有感)》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법으로 구성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악(邪惡)은 겉보기엔 탄탄한 바위처럼 보이지만 도리어 거친 것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낙숫물은 비록 돌에 비하면 몹시 미약하지만 그것의 특징은 꾸준히 오래 지속할 수 있다. 대법이 직접 중공을 없애버릴 수는 없지만 우리 자신의 생각이 바르기만 하면 대법은 육신을 가진 우리에게 끊이지 않는 에너지를 줄 수 있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되면 효과가 뚜렷이 나나탈 것이다.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한 지 21년이 되었음에도 파룬궁을 소멸시키지 못했고 탄압은 점점 약해지는 것이 바로 명확한 증거다.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리고 중공을 해체하는 것은 중공과 “싸우려는”게 아니라 중생을 구도하는 것으로,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해 진정으로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이 과정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 아니라 낙숫물로 댓돌을 뚫는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3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