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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결속을 다시 말하다

글/ 소련(小蓮)

【정견망】

요 며칠 명혜와 정견 사이트에 올라온 시간과 결속 등의 문제에 관해 토론한 문장들을 보니 모두들 말한 것이 전부 다 이치가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해 나 자신의 견해를 글로 써서 여러분들과 함께 토론해보고자 한다.

박해가 이렇게 장시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수많은 수련자들이 내심에서 모두 많건 혹은 적건 결속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다. 명혜망에 올라온 한 문장에서 28년에 결속한다는 예언을 보고 어떤 이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느끼고 어떤 이는 기왕에 그렇게 긴 시간이 있다면 생활과 업무 내지는 퇴직 이후의 문제까지 잘 배치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이 모두 사람의 감수와 득실이지 사부님 정법(正法)의 전체 국면에 서서 고려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현재 대법제자가 하고 있는 일체는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며, 지금의 삼계(三界) 내의 일체 역시 모두 대법(大法)을 위해 존재한다. 대법(大法)이 마난(魔難) 중에서 일체를 원만하게 했을 때, 대법(大法)을 박해한 사악은 모두 결속 짓게 될 것이다.”[1]

그렇다면 인간세상에서 법을 실증하는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마땅히 언제나 전체 국면의 각도에서 출발해야지 자신의 소위 각종 감수만을 고려해선 안 된다. 가령 많은 사람들이 비록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수련함에도 오히려 하루 종일 오직 ‘세 가지 일’만 하면서 집을 관리하거나 노약자를 돌보고 친지를 방문하는 등의 다른 것은 아예 일률적으로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자신의 일을 교란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여기면서 수련하지 않는 가족들의 원망이 자자하게 만든다. 사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는 원칙과 어긋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전체 국면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면서 하는 일 역시 법의 일부를 원용하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또 인간의 형식을 잘 활용해 진상을 알리는 일을 잘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의 마음이 여기에 국한되어 있지 않을 따름이다.

앞에서 서술한 사부님의 말씀에서 나는 우리가 오직 우리 자신의 감수만을 고려해 마땅히 어느 한 시점에 결속해야 한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의 생각일 뿐 법에서 필요로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 단지 망상일 뿐이다.

시간에 대한 집착 문제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일찍이 하셨던 다음 말씀이 떠올랐다.

“이 한 차례 마난(魔難)이 끝나려면 아직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내 생각에, 이러한 일은, 여러분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원만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도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의 어떠한 마음이든지 모두 일종 집착이 될 수 있고, 모두 사악에게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염두(念頭)가 생겨나올 때면, 사악은 아마 당신에게 일종 가상(假相)을 연화해 줄 수 있는데, 그때 일종의 교란이 일어날 것이다.”[2]

기왕에 사부님께서 명확하게 “많이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그럼 우리가 예언이나 다른 수련인이 전망한 일에 집착할 때가 바로 사부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이는 대법제자로서 마땅하지 않은 것이다. 거꾸로 말해 만약 정법이 정말 어느 한 예언 또는 모(某) 수련자의 예측대로 그 어느 날 그 어느 해에 결속된다면 수련인의 사상은 곧장 그 방향으로 달려갈 것이다. 생각해보라, 이 얼마나 큰 누락이겠는가? 이렇게 강대한 목적심을 품고 어떻게 무사무아(無私無我)의 경지(境界)와 원만하여 누락 없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머릿속에 사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과거에 ‘하늘에서는 겨우 하루가 지났으나, 지상에서는 이미 천 년이 지났다.’라는 말이 있는데, 공간이 없고 시간 개념이 없는 그런 단원세계(單元世界)를 가리킨 것으로서 바로 대각자가 머무는 세계다. 예컨대 극락세계(極樂世界)ㆍ유리세계(琉璃世界)ㆍ法輪世界(파룬쓰제)ㆍ연화세계(蓮花世界) 등등이 그러한 곳들이다.”[3]

이 순간 나는 명백해진 것 같았다. 즉 지상에 있는 우리가 시간에 집착하고 언제 결속 하는가 등을 집착하는 것이지 천상(天上)에는 이런 개념조차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박해를 결속하기 위해 수련하는 것이 아니며 원만해서 하늘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기왕에 천상에 시간과 공간이란 개념이 없다면 그럼 인간세상의 우리가 수행하는 최후에는 마땅히 이 방면의 집착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신(神)으로 성취되어야 하는데 그럼 신불(神佛)의 그 한 경지 표준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상의 말을 종합하자면, 우리가 언제쯤 결속할 것인가를 토론할 때 그때 우리는 아직 착실하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하지 못한 것과 같다. 바로 며칠 전 어느 동수와 대화하면서 그에게 했던 말과 같다.

“저는 지금의 하루하루를 모두 제 생명의 마지막 날처럼 여기면서 매일 최대한도로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이라면 절대 내일로 미루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 걸음씩 차근차근 다져나가는 방식으로 하다보면 실제로 얼마나 많은 날이 남았든 얼마나 많은 해가 남았든 심지어 좀 과장해서 얼마나 많은 세기(世紀)가 남아 있든 저는 아무런 후회나 원망 없이 걸어갈 수 있습니다. 가급적 최대한도로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용하면서 대법이 제게 부여한 이 생명의 진정한 상태와 풍채를 펼쳐내는데, 제 생각에 이것이 바로 아직 수련 중에 있는 우리 생명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개인의 깨달음을 단지 참고로 제공할 뿐이니 부족한 곳이 있다면 자비롭게 시정해주기 바랍니다.

주:
[1]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 2》 ‘무엇이 공능인가’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도항》 ‘워싱턴DC국제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제3강’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6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