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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와 옳고 그름에 대한 관념을 타파

글/ 일본 대법제자

【정견망】

최근 관(關)을 넘는 과정에서 나는 사람 속에서 형성된 시비(是非)와 옳고 그름(對錯)을 따지는 강렬한 사람의 관념이 마치 큰 담벼락처럼 내 앞을 가로막아 내가 하늘로 돌아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음을 느꼈다. 오직 속인(常人)의 관념을 개변해야만 장벽을 돌파해 점차적으로 사람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있다.

이전 수련 중에서 나 역시 일에 부딪히면 안으로 찾아야 함을 알고 있었기에 관을 넘기는 것도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러나 이번에 관을 넘는 것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내게 잘못이 없다고 여길 때는 왜 여전히 내가 찾아야 하는가? 라고 여기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나 상대방이 나보다 수련 시간이 더 오래된 노제자일 때는 더욱 그랬다.

전에 내가 관을 넘는 것이 순조로웠던 이유는 모두 자신이 한 일에서 얼마간 모두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여길 때는 무조건적으로 안으로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보이는 것은 전부 상대방의 잘못이었고 마땅히 상대방이 안으로 찾아야 하며 나는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맨해튼 설법’에서 우리를 일깨워 경고 하셨다.

“당신들은 지금부터 시작해서 또 이러해야 하는데, 당신이 옳든 그르든, 이 문제는 한 수련인에 대해 말한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논쟁하고 논쟁하고 하지 말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강조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줄곧 자신이 옳다고 강조하는데, 당신이 옳았고 당신이 잘못이 없다 한들, 또 어떻단 말인가? 법에서 제고했는가? 사람의 마음으로 옳고 그름을 강조하는, 이 자체가 바로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속인의 이치로 당신 자신을 가늠하고 있고, 다른 사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볼 때 세간에서 한 수련인의 옳고 그름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사람 마음의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오히려 중요하며, 수련 중에서 당신이 어떻게 사람 마음의 집착을 제거하는가가 비로소 중요한 것이다.”

나는 일단 시비와 옳고 그름에 빠지게 되면 마치 속인 사유의 길로 들어간 것과 같음을 발견했다. 이때 구세력에게 이용당하는데 왜냐하면 당신이 그것에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에서 말씀하셨다.

“그의 생각에 자신의 이 방법이 법을 위해 더욱 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는 결코 자신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세력은 그가 맞서서 고집을 피우는 이 한 점을 틀어쥐고 끊임없이 그것을 강화한다. ― 당신 것이 맞는다, 당신 것이 맞는다, 당신이 맞게 했다!”

나는 그때의 나 역시 억지로 더해진 것을 발견했는데 표현이 아주 분명했고 점점 더 생각이 들끓었다. 당시에는 마치 어느 이상한 지역에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는데 머릿속이 온통 나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나중에 동수가 일깨워준 후에야 비로소 나는 법학습에 힘을 들였고 비로소 가까스로 어렵게 벗어나올 수 있었다.

이 시비와 옳고 그름으로부터 걸어 나와서야 나는 비로소 진정으로 안으로 찾을 여력이 생겼다. 나는 우리 몸에 두 세트의 사유체계가 우리를 통제하고 있음을 발견했는데 한 세트는 수련인의 사유이고 다른 한 세트는 속인의 사유였다. 우리가 속인관념에 좌우될 때면 곧 속인의 사유통로로 들어가고 쉽사리 구세력에게 이용당하거나 조종당한다. 그런데 나는 수많은 수련인들 역시 우선 스스로에게 “나는 옳다”고 정의한 후에는 더 이상 안으로 찾기가 어려운 것을 발견했다.

사실 내가 보기에 사람 속에서 시비를 따지는 이런 관념에 대해 우리는 아직 발견하거나 깨닫지 못하고 있다. 더욱 구별하기 어려운 것은 어떤 동수는 자신이 한 것이 대법 일이며 수호한 것이 대법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로부터 동수와 논쟁하면서 안으로 찾지 않고 장기적으로 한 층차 속에 빠져 있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재인식’에서 분명히 알려주셨다.

“당신들은 아는가? 오로지 당신이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환경, 어떤 상황하에서든지 부닥칠 수 있는 그 어떤 시끄러움과 좋지 않은 일, 나아가 당신들이 대법(大法) 일을 위해 더없이 좋고 더없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일까지도, 나는 모두 당신들의 집착심을 제거해 버리고 당신들의 마성을 폭로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데 이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의 제고만이 제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부님의 이 경문은 이미 너무나 분명하게 쓰셨는데 설령 대법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수련하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는 왜 백분의 백으로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에 따라 하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매 한 구절의 법은 모두 천기(天機)인데 천기 속에는 모두 미혹을 타파하고 풀어주는 법보(法寶)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자신의 사람 관념에 장애되어 보고도 주의하지 못하고 법의 요구에 따라 할 수 없거나 아니면 자신의 관념에 따라 한다. 엄격히 말하면 이때 당신이 믿는 것은 대법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다. 사실 당신이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여길지라도 자신의 마음이 흔들렸음은 늘 알 수 있다. 자신의 이렇게 마음이 흔들린 후 화가 나거나 억울함에 이끌릴 때면 바로 어떤 집착과 관념으로 조성된 것인지 마땅히 경각(驚覺)해야 한다. 만약 이렇게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의 수련은 곧 충분히 성숙할 수 없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노제자(老弟子)들은 모두 집착심과 욕망을 제거해야 함을 알고 있지만 또 관념을 타파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형성된 뿌리 깊은 각종 사람의 관념은 수련 중의 장애가 되었고 특히 이런 시비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관념은 알아채기가 더욱 쉽지 않다. 나는 이것이 바로 사유 각도의 문제라고 보는데 당신이 모순 속에서 사람의 생각을 움직이는가 아니면 신의 생각을 움직이는가 하는 경계선이다. 만약 여전히 죽어라고 옳고 그름을 붙잡고 내려놓지 못하며 관념을 개변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럼 영원히 사람의 인식일 수밖에 없고 다시 말해 영원히 신의 인식으로 제고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미국법회설법-뉴욕법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당신이 수련해서 성불하고자 생각한다면 당신은 모든 문제의 인식에서 모두 초상(超常)적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관을 넘을 때 정말로 잘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이 문제의 인식이 속인을 벗어났는가 아니면 벗어나지 못했는가? 사람의 이치로 말하자면 시비와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속인의 보편적인 인식으로 잘못이 아니지만 신은 옳고 그름을 보지 않는다.

우리는 마땅히 일 표면의 옳고 그름을 논하지 말아야 하며 늘 발생한 이 일(설령 제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도)을 통해 우리에게 사람마음을 닦아버려야 하며 당신이 관을 넘을 준비를 하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설사 표면적으로는 최종적으로 당신이 우세하거나 이겼을지라도 수련에서는 오히려 당신이 진 것이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더러 빨리 사람마음을 내려놓고 사람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과 시비를 따지는 관념은 내가 보기에 하나의 함정인데, 일단 빠져 들어가면 돌파하고자 해도 아주 쉽지 않다. 우리가 오직 법을 많이 배우고 가급적 빨리 사람의 관념을 전변해야만 비로소 인식을 제고할 수 있고 하루 빨리 사람에서 걸어 나올 수 있다.

이상은 개인이 소재한 층차에서 깨달은 것이니 만약 법에 있지 않는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64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