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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심법 돈황신운’을 읽은 소감

글/ 해외 대법제자

【정견망】

며칠전 정견망을 읽을 때 《천애심법:돈황신운(敦煌神韻)》이라는 글이 주목을 끌었다. 이 글을 클릭해 절반쯤 읽어보니 작가는 당나라 때 곤유(坤崳)라는 화가가 당시 돈황에서 그림과 조소로 신불(神佛)의 조상을 만든 경험을 적었다. 글 중에서 화공은 회화 기법을 향상시키기 위해 장안에 한동안 생활했는데 그 기간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와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돈이 좀 있는 사람이 페르시아 고양이를 안고 와서는 위엄 있게 그려달라고 했다. 곤유는 이 고양이를 좀 보고 나서 고양이를 매우 생동감 있게 그렸는데 마치 무엇을 쫓아가려는 것 같았다. 그린 후 그 사람이 매우 기뻐했다고 했다.

나는 이 단락의 이야기를 보고 매우 놀랐다. 왜냐하면 내가 수련한 후 페르시아 고양이에 관한 장면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점차 알게 되었는데 그건 사실 내가 그 생(生)에 고양이로 태어나 당태종(唐太宗)과 인연을 맺은 과정이었고 위 글에서 쓴 고양이가 바로 그때의 나였다.

대당(大唐) 개원(開元)이나 정관(貞觀) 성세에는 여러 나라에서 조공하러 왔다. 많은 서역 나라들이 비단길을 따라 장안에 들어와 태종을 배알하고 아울러 현지 특산물인 일부 진귀한 물건을 공물로 바치곤 했다. 당시 중국에 있던 고양이는 대다수 이화묘(狸花貓 역주: 호랑이처럼 줄무늬가 있는 일반적인 고양이)였고, 페르시아 고양이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 당시 고양이는 중동이나 이집트 등 지역에서는 매우 신성한 동물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사자를 파견해 대당에 조회하러 가던 그 서역 국가에서 금은 주화 등 귀중품 외에 네 마리 새끼 페르시아 고양이를 데려간 것이다. 나는 그 네 마리 중 하나였으며 또한 유일하게 장안까지 살아서 도착한 고양이였다.

나는 전에 서역 사신이 나를 태종에게 진상하던 장면을 보았다. 당시 태종은 털이 복슬복슬한 새끼 고양이를 보고 매우 귀여워했으며 손으로 감쌌다.

모양이 보통 고양이와 달랐기 때문에 태종은 사신에게 “이 물건의 이름이 무엇인가?” 하며 물었다.

그러자 사신이 대답하지도 전에 고양이가 스스로 “야옹(喵)”하고 소리를 냈다.

태종은 허허 웃으며 “알고 보니 이름이 야옹(貓)이었구만!”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이것이 중국에서 고양이를 묘(貓)라 부르게 된 기원이 된 것 같다.

[역주: 현재 중국어 발음에서 喵(먀오)와 貓(마오)는 발음이 거의 같다.]

그 이후 고양이는 태종 신변에 남았으며 점점 자라나 털 색깔이 희고 예뻤는데 태종의 큰 사랑을 많이 받았다. 나는 일찍이 중국 고대의 화려한 서재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마호가니 나무로 만든 큰 책상 옆에 밝은 노란색 옷을 입은 남자가 무엇을 쓰고 있었다. 그는 매우 집중하여 쓰느라 탁자 위에 한 마리 고양이가 벼루의 먹을 건드리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양이는 새하얀 발로 먹을 묻히고 또 책상 위를 밟아서 온통 난장판을 만들었다.

나중에 남자가 이 장면을 발견하고는 얼른 고양이를 안고 고함쳐서 사람을 불러 탁자를 닦게 했고 고양이도 데려가서 깨끗이 씻으라고 했다. 그러나 조금도 고양이를 혼낼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단락의 경험이 내가 금생에 때때로 글을 써서 법을 실증하는 원인이 되었다. 말을 하자면 당시 실수로 발에 약간의 먹물을 묻힌 까닭이다.

태종이 이 고양이를 좋아한 데는 원인이 있었다. 당시 천하의 각 지역이 아직 완전히 태평하지 않았다. 태종은 이따금씩 어가를 타고 친히 병란을 진정하러 나갔다. 행군하는 도중에 늘 그 고양이를 데리고 갔는데 아마도 정벌전쟁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한번은 어느 누추한 민간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밤이 되자 적군이 사람을 보내어 태종을 죽이려 했다.

이 사람은 무공이 매우 높아서 가는 길에 내내 태종이 거주하는 집 앞에 잠복했으며 시위병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다. 고양이는 야간에 청각과 시각이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 자객이 조용히 창문의 걸쇠를 열었을 때 고양이가 그를 발견하고 창문 앞의 탁자 위로 달려나가 창문을 노려보았다. 자객이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자 어둠속에 떠 있는 두 개의 초록빛 눈을 보았고 처량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다(고양이 울음소리). 자객은 자기가 귀신을 만났다고 생각하여 급히 도망쳤다. 시위병도 놀라 움직였고 분분히 달려와 호위했다. 나중에 그 자객이 잡혔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페르시아 고양이는 이 일로 천자를 지키는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후 태종의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여기서 언급할 것이 있는데 나는 금생에 여전히 정상인을 뛰어넘는 야간 시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이것을 몰랐다. 그러다 한번 오후에 동수와 함께 법공부를 하는데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동수는 책의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매우 똑똑히 보였다. 이때야 비로소 내가 어둠 속에서의 시력이 일반인보다 낫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이 수련해 낸 공능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전세에 고양이로부터 남겨진 흔적이다.

위에서 동수가 말한 고양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으로 돌아가자. 그 과정은 만약 앞뒤로 인과관계를 모른다면 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페르시아 고양이의 모양은 매우 예쁘고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이며 ‘위엄’이란 단어와는 좀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을 부탁한 사람은 화공을 괴롭히려는 뜻은 없었다. 사실 이 돈 많은 사람은 황궁에서 태종을 모시던 사람이라 겉보기에 황실의 기운이 느껴져 돈이 많은 모습처럼 보였을 것이다. 마땅히 화공에게 두터운 보수를 주었을 것이다.

태종은 페르시아 고양이가 그때 천자를 보호한 것이 용감한 장사 같다고 느껴서 화공에게 위엄 있게 그려달라고 했던 것이다. 태종은 줄곧 정의(情義)를 아주 중시하는 사람이라 공이 있는 이 고양이를 그림으로 그려 화폭에 담아 기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역시 자연스런 일이다. 나는 금생에 운이 좋아 이 곤유란 화가와 만나 몇 마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 일세에 연을 맺은 까닭이 아닌가 한다!

내가 본 마지막 장면은 페르시아 고양이가 죽고 그 시체가 정교한 마호가니 나무 상자 속에 놓여 있던 것이다. 그 아래는 노란색 비단이 깔려 있었다. 그것은 어화원(禦花園)의 어느 나무 아래에 묻혔으며 나는 태종이 나무 아래에 서서 탄식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 일세에 황제의 고양이로 전생한 경력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었다.

《천애심법 돈황신운》을 읽은 후 나는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글에서 창세주께서는 돈황에서 크게 굴을 파고 불상을 만들 때 곤유를 안배해 그의 기예로 신과 신운(神韻)을 나타내게 했다. 돈황의 전성기는 바로 당나라 정관 연간이었다. 이 시기에 판 석굴은 1천개 이상에 달해 시기적으로 들어맞는다.

나는 이 글을 쓴 작가가 전에 이미 돈황을 주제로 한 시리즈 문장을 쓴 것으로 아는데 무슨 원인인지 줄곧 보지 못했다. 그러나 유독 이 한편 페르시아 고양이와 관련된 글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아마 이것도 암암리에 나에 대한 점오와 안배일 것이다. 그래서 흥미로운 이 일을 써내어 함께 동수들과 나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63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