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여초(如初)
【정견망】
식욕과 성욕은 사람의 본성(食色性也)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원래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로 대체적인 의미는 맛있는 음식과 미색을 좋아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란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수련인이기에 기왕 사람의 본성이라면 그럼 속인의 마음이니 이런 것들은 모두 수련 중에서 제거해야 할 집착심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 법문(法門)에서는 색욕 방면에 대한 요구가 비교적 엄격하기 때문에 우리는 전반적으로 다 비교적 중시하고 한 것도 비교적 모두 괜찮다.
때문에 오늘 내가 여러분들과 말해보고자 하는 집착심은 주로 식욕에 관한 것이다.
우선 속인의 이치로부터 말하자면 내가 어릴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교적 날씬하고 열심히 일했고 고생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차 뚱뚱해졌고 음식에 대한 요구도 날로 높아져서 갈수록 더 나태해진 것 같다.
양방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육식과 지방이 증가함에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소위 현대병이 나타났는데 예를 들면 고지혈・고혈압・고혈당 등이다. 또 한방의 각도에서 보자면 음식을 절제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쉬지 않으면 오장육부에 좋지 않아 정기(正氣)가 부족해 외사(外邪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기)가 침입하면 반드시 병이 생기게 된다.
한편 수련인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불가(佛家)에서는 원래 오후에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하루에 한 끼만 먹어야한다고 제창했다. 우리가 알다시피 초기 승려들은 모두 동냥을 했기에 늘 배가 고팠다. 또 어떤 사람은 폐관(閉關) 수련을 할 때 대체로 겨우 며칠에 한 끼만 먹었고 우리가 아는 벽곡(辟榖)에서는 심지어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또한 요가에서는 자신을 흙속에 묻어두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나는 또 이런 한마디 “음식이란 삼키면 그만이지 무엇을 탐하는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저층차의 이치들이다.
그럼 다시 대법의 각도에서 말해보자. 사존께서는 ‘전법륜’에서 명확히 지적하셨다.
“사람은 먹는 문제에서, 다만 고기를 먹는 것뿐만이 아니라 어떤 음식에 대해 집착해도 다 안 되며 다른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바로 이것을 먹기 좋아한다고 하는데, 이 역시 욕망으로서, 수련하는 사람이 일정한 정도에 이른 후에는 이런 마음이 없다.”
또 ‘홍음-도(道) 중에서’에서는 “먹어도 음미하지 않으니 입의 집착 없도다(食而不味 口斷執著)”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특정한 음식을 먹기 좋아하는 것이 집착일 뿐만 아니라 전체 음식을 포함해서 음식을 먹기 좋아하는 것 역시 집착으로 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가령 어떤 사람이 위가 좋아서 무엇을 먹든 다 맛이 있다면서 매일 포만감을 느낀다면 이 역시 집착심에 속한다. 왜냐하면 많이 먹으면 움직임이 줄어들고 또 잠시 쉬거나 잠시 잠을 자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나태한 마음과 안일한 마음이 생겨난다. 게다가 이런 마음은 맹렬하게 반영되어 나오는 그런 강렬한 집착심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 그다지 중시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서서히 쌓여서 생겨난 집착심에 속하는데 소위 냄비 속 개구리처럼 끊임없이 수련인의 의지를 소모시킨다.
그러므로 이렇게 서서히 양성된 집착심은 매일매일 일상생활 속에서 늘 자신의 행동을 주의해야만 하며 이렇게 한 후에야 서서히 제거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예로 들어보겠다. 나는 원래 체중이 약 80킬로그램인데 온역(瘟疫) 기간에 잘 먹고 외출이 줄자 계속 체중이 불어나 85킬로그램이 되었다. 나는 얼굴과 배에 살이 찐 것을 보고 단번에 깜짝 놀랐다. 이게 어디 고생스레 수련하는 사람의 모습인가? 이는 그야말로 향락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닌가! 내 온몸의 이 살은 안일한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닌가?
이에 나는 식사량을 줄여 평소의 7할만 먹는 동시에 활동량을 늘렸다. 속인의 눈으로 본다면 다이어트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이것은 식욕에 대한 마음과 안일한 마음을 제거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렇게 열흘 사이에 다시 원래 체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또 며칠 식욕이 땅기자 다시 82.5킬로그램으로 체중이 늘었다. 나는 운동은 주요원인이 아니고 주요 원인은 여전히 음식에 대한 나의 집착이 너무 강한 것을 발견했다. 때문에 나는 음식절제에 정력을 기울였다. 이때부터는 7할에서 5할로 음식을 줄이고 끊임없이 공복감을 느꼈다.
나는 이것을 수련 중의 인내력이라 여겼고 이때부터는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횟수조차 줄어들었다. 나는 설사 인위적인 고생이 다이어트에 대한 집착심을 증가시킬 수 있을지라도 그래도 반드시 음식에 대한 집착심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달 정도 지나면서 체중은 서서히 77.5킬로그램 이하로 줄어들었다. 물론 이 기간에 몇 차례 살이 다시 찌기도 했고 맛있는 음식을 보고 참지 못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음식을 게걸스레 원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 후 나는 체중을 기본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나는 음식을 봐도 전처럼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나를 보고 다이어트에 대한 의지력이 강하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젊어 보인다고 했다. 나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며, 이런 것들은 사존께서 내가 한 일을 칭찬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단지 식욕을 집착심으로 삼아 제거했을 뿐이다. 물론 꼭 먹는 것뿐만 아니라 먹고 마시며 놀고 즐기는 이런 다른 방면의 집착들이 생기는 것 역시 좋지 않다.
또 온역기간에 나는 다른 동수들과 마찬가지로 대량의 식재료를 사서 2020년 재난의 해를 넘기려 했다. 그런데 감량에 성공한 후 다시 그 음식들을 보니 사실 그렇게 많은 양을 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먹는 것을 줄이자 우리 가족 전체의 음식물 소비 역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이 먹는 것을 발견했는데 전에 두 달 치 음식이 지금은 세 달은 충분히 먹을 수 있다.
나는 원래 이렇게 많은 불필요한 음식을 먹었구나? 이걸 돈으로 환산하면 1년에 얼마나 많은 재물을 소비했을까? 만약 우리가 모두 먹을 것을 조금 줄여서 이렇게 바꿔온 돈으로 올바른 일을 한다면 더 좋을 게 아닌가!
또 시간을 말해보자. 맛있는 음식을 만들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또 음식을 먹을 때도 천천히 오래 음미하면서 먹어야 한다. 그 후 또 설거지를 하고 방청소를 해야 하는 등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이 시간에 법 공부를 조금 더 한다면 얼마나 좋은가? 간단히 한입 먹으면 되는데 수련하는 사람은 배만 채울 수 있다면 무엇을 먹든 상관없지 않은가?
하지만 실천 중에서는 늘 잊곤 한다. 물론 수련인 역시 속인의 상태에 부합해야 하니 만약 가족들에게 매일 맛없는 음식을 주어선 안 되겠지만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히 요구해야 한다. 자신도 모르게 식욕이란 이런 집착심을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인피(人皮)를 말해보자. 사존께서는 이 인피를 누가 입으면 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역으로 이 인피의 각종 감각 역시 인피를 쓴 생명에게 집착을 조성할 수 있음을 나는 발견했다. 가령 사람은 추위를 두려워하고 더러운 것을 두려워하며 고생을 두려워하고 피로를 두려워하며, 음식을 탐하고 잠을 탐하며 재물을 탐한다. 또 색(色)을 좋아하고 살기를 좋아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등등이다.
이런 집착심 중에서 아마 어떤 것은 주왠선(主元神)의 집착이겠지만 어떤 것은 주왠선의 집착이 아니라 이 인피 자체가 초래한 집착일 것이다. 사존께서는 우리에게 수련인은 주의식(主意識)이 강해야 한다고 요구하셨다. 다시 말해 이 인피가 만들어낸 집착심이 제멋대로 우리 수련의 길에 영향을 끼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수련이란 아주 현묘(玄妙)한 것으로 수많은 법리 역시 오묘해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또 깨달았을 때는 고층차의 이치일 수 있지만 말로 하면 저층차의 이치로 되고 만다. 어쨌든 법을 배웠으면 반드시 마음속 깊이 들어가야 하고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법을 외워야한다. 외우고 외우다보면 사존의 법리는 표면적으로 말씀하신 그런 간단한 것이 전혀 아니며 박대정심(博大精深)하고 무궁무진(無窮無盡)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깨달은 후에는 가급적 실천해야 하며 계속 실천하다보면 또 수련의 오묘함과 변화의 미묘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수련이란 아주 간단해서 때로는 근본적으로 밖에서 누구를 찾을 필요가 없고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으며 꼭 어떤 일을 경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지금 현재 어떻게 잘하고 또 자신의 내심을 어떻게 제고할 것인가에 달렸다. 법의 표준에 따르고, 자신의 정황에 따라, 깨닫고 해내면 이것이 바로 수련의 길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67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