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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自我): 원만에 집착하는 배후

글/ 대륙제자

【정견망】

요즈음 나는 마음속으로 늘 “언제쯤 원만(圓滿)할 수 있을까? 원만은 어떤 상태일까? 나는 원만의 표준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를 생각하곤 했다. 때로는 이 염두가 너무 강했다. 왜냐하면 박해 중에서 늘 하루 빨리 결속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염두를 억제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마치 뿌리가 제거되지 않은 것처럼 늘 수시로 올라오곤 한다.

최근에 나는 문득 이런 염두를 무시하면 안 되며 배후에 이와 연루된 마음이 아주 큰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강대한 자아(自我)는 내 생명 속에서 구우주(舊宇宙)의 속성이 개변되지 않은 것으로 나의 경계(境界)가 ‘자아’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다. 이 일념(一念)이 있었기 때문에 행동에서도 늘 많은 표현이 일어나곤 했는데 다시 말해 다음과 같은 내 모든 행동의 뿌리는 여기서 온 것이다.

1. 천목이 열린 문장에 대해 큰 흥미를 갖는다. 왜 그런가? 다른 공간에서 정법(正法)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표면공간으로 투과되어 오는 것은 아닌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법 공부를 할 때도 이따금 “다그쳐 빨리 결속하자”는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2. 대선을 겨냥해 힘껏 발정념을 하면서 트럼프가 당선되길 원했다. 악당(惡黨)이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가 연임해서 결속의 날이 빨리 오길 바란 것이다. 트럼프가 낙선하자 나는 며칠간 몹시 힘들었다. 아내가 나더러 “당신 무슨 병에 걸린 거 아니야?”라고 비웃을 정도였다.

3. 다른 사람이 정법의 결속(結束)이 아직 이르다고 말하면 반감을 갖는다. 나는 (결속이) 아마 1~2년 사이의 일이라 예측하면서 누가 더 먼 시간을 말하면 곧 반감을 가졌다. 얼마 전에 화제가 되었던 ‘정법이 끝나는 시간에 대한 사고(思考)와 예언’이란 문장에서 ‘7년 반’이 더 있어야 결속한다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정말 괴로웠다. 이 문장이 내 구미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예언’에 흥미를 갖는다. 명혜망과 정견망에 예언에 관련된 문장이 올라오면 ‘대도태(大淘汰)’ 부분을 아주 중시하고 대재난(大災難)에 대한 시간 역시 기억하곤 한다. 내 생각에 대도태가 바로 정법의 결속이기 때문이다.

5. 박해 형세가 엄중할 때면, 이번 ‘제로화행동’을 포함해, 나는 사부님께 꿈속에서 점화해주십사 요청하곤 한다. “사악이 아직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째서 최후로 갈수록 더 창궐합니까?” 그러면 자비하신 사부님께서는 매번 내게 점화를 주셨다. 내게 어떤 장면이나 또는 그림을 보여주시며 견정하게 전진하도록 격려해주신다.

그렇다면 내게는 왜 이렇게 많은 마음이 있었을까? 근본적으로는 바로 ‘종점’에 집착한 것으로 그 ‘종점’이 마치 한 가닥 선처럼 늘 나를 끌어당겼다. 사회적으로 어떤 큰일이 나타나든지 나는 늘 그 선에 연결되었다.

최근에 나는 문득 이런 염두가 비록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거나 심지어 있는 듯 없는 듯해도 사실 아주 거대한 힘을 지닌 채 배후 미시적인 곳에서 표층공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그물을 조성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거대한 그물은 ‘자아’로 조성된 것으로 수시로 당신을 조종하는데 당신더러 생각하게 하고 분석하게 하며 가늠하게 한다. 여기에는 당신의 정서를 포함하는데, 당신이 그것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일체 뿌리는 모두 여기에 있었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발정념을 했다.

“‘종점’에 집착하는 집착을 철저히 제거한다! 생명이 무조건적으로 무사무아(無私無我)한 대법에 동화되도록 해야 한다.”

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법문(法門)의 수련이든 사부가 제자더러 언제 원만할지 알려주지 않았다. 수련이란 이 길을 걸어가자면 앞에는 험난한 가시밭길이 있는데, 만약 사부가 당신더러 언제 원만 한다고 알려준다면 그럼 이는 큰 누락이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신은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데, 제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원망하지 않는다. 이는 당신이 그 목표를 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든든해지고 그곳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가보자, 아무리 힘들어도 기죽지 않으며 아무리 어려워도 도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종점을 위해 정진하는 그것을 수련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쨌든 끝까지 걸어가기만 하면 그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직 마난(魔難) 속에서, 종점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시련 속에서 당신이 불성(佛性)을 견정히 하고 전진할 수 있고, 혹독한 시련 속에서 몹시 절망적인 때에도 여전히 사부님을 굳게 믿을 수 있는 그것만이 수련이라 할 수 있고 이렇게 해야만 인정할 수 있다. 사실 그때가 되면 당신은 이미 ‘종점(終點)’의 선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나는 마음이 아주 밝아졌고 또 가뿐해졌다. 마치 커다란 집착 하나를 제거한 것 같았다. 그렇다, 종점이 없는 시련 속에서 위로 올라가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심태는 다음과 같다.

일체는 구하지 않는 가운데 있으니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며 묵묵히 세 가지 일을 잘하고 고생을 낙으로 삼으며 사람 구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남을 위해 감당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야 한다. 사회 형세에 관심을 갖지 말고 그 어떤 일에도 이끌리지 않으며 길가에서 벌이 날고 나비가 나는 현란한 것도 보지 말아야 한다. 앞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지 말아야 하며 마음속으로 ‘원만’이란 개념조차 없고 평화롭고 즐거운 심태로 앞으로 걸어가는 이것이 바로 가장 좋은 상태이다.

개인의 작은 견해이니 동수들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67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