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기(晨起)
【정견망】
오늘 법을 베껴 쓰다 ‘進(진)’을 쓰면서 속으로 아주 기뻤는데 갈수록 더 아름답고(佳) 진보(進步)하며 매일 진보가 있으니 정말로 좋았다.
[역주: 작자는 進을 辶+隹로 보고 여기서 隹가 佳와 비슷한 데서 착안해 가면 갈수록 더 아름답고 좋아진다고 풀이했다.]
또 ‘难(난 역주: 정체자는 難이지만 여기서는 간체로 해야만 뜻이 통한다)’을 쓸 때는 잠시 멍해졌다. 곤란하다는 뜻의 이 글자에 어찌하여 좋을 가(佳)가 들어 있을까? 즉 ‘又’와 ‘佳(즉 隹)’의 결합이니 또 한 가지 좋은 일이란 뜻이 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난(魔難)의 ‘난(难)’ 역시 같은 글자로 역시 한 가지 좋은 일이 아닌가? 신기하구나, 원래 신(神)이 한자를 창조할 때 이미 수련의 요소가 그 속에 들어가 있었고 우리더러 아무리 곤란하든 아니면 마난에 처해 있든 수련인에 대해 말하자면 모두 하나의 아주 좋은 일이며 모두 한 가지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음을 아주 분명하게 알려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일체 마난과 곤란에 직면해 우리가 웃으며 대하지 못할 이유란 없는 게 아닌가!
또 중풍에 걸려 팔다리가 마비되는 ‘탄탄(癱瘓 간체로는 瘫痪)’이란 단어를 생각해보니 瘫 역시 좋은 것이다. 신체가 탄탄에 이르렀다면 가장 심각한 병에 걸린 것이지만 그러나 애초에 이 글자를 만들 때 그것 역시 좋은 것임을 알려준 것이다.
우리는 삼계 내에서는 모두 이치가 거꾸로 됨을 알고 있고 수련인이라면 초상적인 이치로 사고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위 병업(病業)이란 가상은 모두 좋은 일이 아닌가? 심지어 탄탄(癱瘓)마저도 좋은 일이라면 그럼 모든 질병의 통증이 두려울 게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모두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마난이 크면 클수록 제고가 빠르며 모두 아주 좋은 일이다. 나는 소리를 내서 웃으면서 속으로 아주 기뻤다.
잠시 후 ‘讲(강 講)’이란 글자를 베껴 쓰다가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이 글자는 ‘言’과 ‘井’이 결합된 것이 아닌가. 아 그렇다면 말이 많거나 틀리게 말하면 바로 우물(井) 속으로 빠지는 것이니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침묵은 금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말이 없다. 나는 수구(修口)가 수련인에 대해 아주 중요하며 몹시 엄숙한 일임을 깨달았다.
나는 중공 당문화(黨文化)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태도가 강경하고 입만 열면 남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원망하는데 동수들도 여러 번 나를 일깨워주었다. 나 역시 고쳐야 하며 자비와 상화를 닦아내야만 한다.
이상은 법을 베껴 쓰던 도중에 발견한 작은 깨달음으로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하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9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