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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의 성숙에 대한 깨달음

글/ 미국 동부 대법제자

【정견망】

개인적으로 수련의 성숙(成熟)은 수련 시간의 길고 짧음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수련 기점(基點)의 전변(轉變)에 달려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전변은 수련에 대한 인식과 법에 대한 인식 및 집착심을 제거하는 데 있어 생명 중심의 전이에서 세워지는데, 단번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간에서 장시간의 단련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어떤 사람은 닦아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닦아내지 못한다.

다시 ‘수련(修・煉)’이란 두 글자를 보면 개인적으로 ‘수(修)’는 어떤 면에서 보자면 수련의 기점을 수정(修正)하는데 성공했는지 또는 근본적으로 기점을 전변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10%의 전변인가 아니면 100%의 전변인가인데 이는 또한 수련층차 및 생명의 경계(境界)에 대응한다. 이런 기점의 수정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연마(煉)’의 과정이다.

수련이란 사람의 생존환경 속에서 시작하기 때문인데, 의심할 바 없이 모두들 수련을 처음 시작할 때의 기점은 자연히 ‘사람’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겉으로 표현되는 것은 바로 사람의 모종 바람과 관련이 있다. 가령 “몸이 좋아진다”거나 “가정화목”, “도덕 제고”, “오묘한 비밀의 탐색”, “공능의 개발” 등등, 인간세상에서 인신(人身 사람 몸)이 직면한 각종 곤란과 고통 및 의문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설령 기점이 비교적 높아서 도(道)를 구하려는 마음으로 수련에 들어왔다 해도 객관적으로 보면 역시 사람의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길 구하려는 것으로 최종적인 기점의 뿌리는 역시 사람에 떨어져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처음 기점이 사람에 있음은 일종의 법칙이자 필연으로 사람마다 모두 이러하다. 또한 사람마다 모두 모종의 근본집착을 갖게 했다. 그러나 정법시기(正法時期)의 대법수련 그것은 전적으로 인연 있는 사람의 ‘인신(人身 주원신)’을 위해 맞춤제작된 것으로, 생명으로 하여금 구우주(舊宇宙)를 벗어나 신우주(新宇宙)의 한 세트 완벽한 기제에 동화하게 하려는 것으로 다시 말해 법이 사람에게 준 유일한 속죄의 길이다. 이런 기제 속에서의 운행은 첫 시작에는 모두 일정한 정도에서 사람의 모종 곤란한 국면을 해결해주는 데서 드러난다.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수련의 아름다움을 느껴 입문할 수 있는데 줄곧 널리 전하고 널리 제도함에 이르게 된다.

바로 사람 속에서 수련을 시작하고, 인류사회는 미혹의 공간이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사람마다 모두 거대한 장벽에 직면하도록 조성했다. 우리는 자신의 생존환경에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에 수련 중에서 이 공간의 문제 해결을 에워싸고 있다. 기본적으로 모두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사유에서나 인식에서 상대적으로 말해 모두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설사 잠시 해내지 못할지라도 정말로 수련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역시 하나의 상대적으로 명확하고 실제적인 목표가 있거나 또는 동수(同修) 사이에 비학비수하면서 참고로 삼을 수 있다. 이는 여러분들이 모두 아주 익숙하고 비교적 실재적인 수련과정이다.

문제는 이런 너무나도 실재적인 감수(感受)가 초기 및 나중의 일정한 수련과정 중에서 확실히 주도 작용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이 장기간의 간고한 단련을 거치고 법에서 생명의 최후 승화가 필요하며, 사람의 근본집착을 제거할 필요가 있으며, 수련의 최종성숙이 필요할 때에 이르러, 이런 너무나도 실재적인 감수가 어쩌면 수련의 기점을 철저히 전변하는 것을 가로막는 병목이 될 수 있다. 마치 세 가지 일도 하고 있고 대가를 치른 것이 아주 많음에도 늘 여전히 사람의 어떤 것에 이끌리며 사람의 사유를 철저히 벗어날 수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

여기까지 말하니 아마 모두 추상적인 이치의 깨달음만을 말한 것 같다. 그렇다면 대체 수련의 성숙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수련 기점의 철저한 전변이란 말인가? 아래에 언급한 실제 사례가 아마 가장 생생한 답안이 될 것이다.

나는 전에 대법 사이트에서 두 대륙 동수의 교류문장을 보고 감개가 무량했다. 개인적으로 비록 개체의 몸에서 발생한 일이긴 하지만 여기에 포함된 법리는 오히려 극히 심각하다고 본다. 여기서는 여러분더러 모방하라고 격려하는 것이 아닌데 수련의 경지는 모방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이속에서 우리가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배후에서 펼쳐진 법리(法理)다. 다시 말해 수련기점의 진정한 전변이 수련의 성패와 아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두 동수가 쓴 내용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진실한 경험이다. 비록 세부적인 내용은 서로 다를지언정 말한 것은 모두 어떻게 병업(病業)의 생사관을 돌파했는가 하는 이야기다. 특별한 점이라면 그 처리과정에서 여러분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정념(正念)으로 관을 넘기는 방식과는 달랐다.

장기간 병업에 시달린 후 두 노제자(老弟子) 모두 각 방면에서 자신의 힘이 이미 다했고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곧 사람 몸을 잃게 될 것임을 느꼈다. 그들은 이때 평온하게 육신(肉身)의 사망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고 가족과 친지들을 침상으로 불러 자신의 머리가 청성할 때 침착하게 후사를 당부했다.

여기까지 보면서, 여러분은 아마 평소의 교류들과는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련인은 육신의 사망과 같은 종류의 화제는 언급조차 하길 꺼린다. 일단 건드리거나 또는 무형 중에 구세력의 배치를 승인하게 되면 이는 자신이 박해를 구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속에서 우리 모두 알다시피 법은 부동한 층차에 부동한 요구가 있다. 이때 그들의 선택은 오히려 평온하고 이성적으로 가족과 친지들에게 후사를 당부하는 것이었다.

유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아마 내가 떠나야 할 것 같은데 이는 나 개인이 수련을 잘하지 못한 것으로 대법의 고도(苦度)에 면목이 없다. 대법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온 것으로 나는 대법수련을 선택한 것에 대해 아무런 원망이나 후회도 없으며 이런 결과를 달게 받아들인다. 또한 이곳에 있는 친지들에게 엄숙히 말하는데 이곳에서 나간 후 절대 대법과 대법수련인에 대해 그 어떤 원망하는 마음도 없어야 한다. 개인이 수련을 잘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대법에 대해 그 어떤 작은 원망도 없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친인들에 대한 그들의 요구였고 또한 현장에서 이런 당부를 승낙하게 했다. 친인들은 현장에서 곧바로 그의 요구를 존중하겠노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유언을 마친 두 사람은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것 같았고 잊을 수 없는 하룻밤을 지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고 갑자기 신적(神跡)이 발생했으니 이튿날 모든 증상이 완전히 사라졌고 처음처럼 건강을 회복했다.

여기서 반드시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비록 실화이긴 하지만 절대 누구더러 병업 생사관을 넘긴 경험을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실 두 동수는 확실히 세상을 뜰 준비를 했었다. 여기서는 단지 두 기이한 이야기를 통해 배후에 깊이 숨겨진 법리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들은 왜 육신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했음에도 오히려 기사회생(起死回生)하는 대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가? 알아야할 것은 매 생명이 세상에 내려와 법을 얻음에 생생세세 아주 복잡한 경력(經歷)이 있고, 수련 중에서 표현되어 나오는 각종 상태도 아주 번잡해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점이다.

대법 수련인이 각종 업력 또는 교란요소 때문에 특히 수련의 후기에 장기간 한 층차에서 배회하면서 전진하지 못하다가 최종적으로 병업으로 세상을 떠나도록 조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런 것들은 수련의 복잡한 정도의 표상에 불과할 뿐이다. 어떤 사람은 정념으로 생사관을 돌파하고 어떤 이는 하지 못하는데 이 역시 정상적인 상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두 동수의 경험에는 다른 이들과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가? 간단히 말해 신(神)의 눈으로 본다면 그들은 이런 한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두 대법 수련자가 생명이 곧 소멸될 최후 순간에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생각한 것은 바로 한 가지 큰일이었으니, 그들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큰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설령 그들이 세상을 떠날지라도 이 때문에 대법에 그 어떤 부면(負面)적인 요소도 초래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그들은 전력을 다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안배를 했다.

고층생명이 보기에 이런 염두는 정말로 비할 바 없이 순정(純淨)하고 법을 중하게 보는 신성(神聖)한 염두인 동시에 털끝만큼도 구하려 하지 않고 대법제자로서 시종 대법을 수호할 책임을 감당하려 한 것이다. 설사 자신이 인간세상을 떠난 후에라도 최선을 다해 가급적 대법을 수호하려 한 것이다. 사람을 구하는 각도에서 본다면 그들은 또 전력을 다해 인연 있는 친지들에게 자신이 수련을 잘하지 못해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들이 대법에 대해 부면적인 행동을 저질러 큰 업을 짓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위해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주게 했다.

생명 최후의 그 한 순간, 천만 년을 기다려온 인체수련의 최후 일각(一刻)에, 다시 말해 그 한순간에 그들은 진정으로 그런 경지로 승화되었다. 과거에 많든 적든 존재했던 사람의 수련기점을 완전히 전변시켰으며, 100% 법을 중시하는 생명의 특질로 전변되어 명실상부한 법의 입자가 된 것이다.

이런 경지에 대응해 신적(神跡) 역시 따라서 생겨났다.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은 수련인이 진정으로 아무런 구함이 없이 수련의 기점을 완전히 철저하게 전변해 법을 중시할 수 있다면 그럼 이는 수련의 질적인 승화와 성숙의 표현이다.

유감스러운 점은 어떤 수련인은 세상을 떠난 후에 가족들에게 수련에 대한 원망을 조성하거나 심지어 반감을 갖게 만들어 대법에 업을 짓게 하는데 그것은 구우주의 생명이 근본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게다. 물론 자세히 살펴보면 보아낼 수 있는데 설사 수련의 후기(後期)라 해도 일부 줄곧 대법항목에 있거나 또는 노제자들이 많은 환경 속에 있거나 아니면 각종 모순과 다툼 상대 속에서 마련(魔煉)하면서, 당신이 닦고 나도 닦는데 ‘질’적인 돌파가 힘들다. 아주 큰 정도에서 수련의 기점을 완전히 전변할 수 없거나 아니면 여전히 사람의 기점을 둘러싸고 돈다. 표현에서는 여전히 손해를 볼 수 없고, 오해를 받을 수 없으며,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없는데 소위 모든 불공평 등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에 수련에서는 늘 타산이 있었다. 자신이 원만을 향해 나아가는데 아직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위덕이 큰지 크지 않은지, 충분한지 그렇지 않은지, 아직 제거할 집착심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분석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고의 기점이 질적으로 다르고, 신변의 인사(人事) 변천을 보면서 대법수련의 엄숙성을 아주 절실하게 느낀다.

개인적인 깨달음은 우주정법이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한 생명의 원만은 정말이지 언급할 가치조자 없는 하찮은 일이다. 정법 중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요구에 도달하지 못해 훼멸되었고 얼마나 많은 우주천체와 대궁이 구도 받지 못하고 청리(淸理)되었는가? 또 이와 동시에 또 무수하고 무수한 생명과 우주대궁이 정법에 동화되어 바로잡혔다. 이렇게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전환(轉換) 중에서, 사실 당신 한 사람의 원만과 구도는 정법에서 보자면 설사 하나의 거대한 천체에 대응한다 해도 역시 한 알의 우주 먼지를 남기느냐 제거하느냐에 불과할 뿐이며, 정말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하지만 수련은 신성(神聖)한 것이니 대체 어디가 신성한가? 개인적인 깨달음은 수련은 원만하기 때문에 신성한 게 아니라 우리를 제도한 것이 우주대법이고 신우주를 만든 근본적인 법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다. 이 법은 비할 바 없이 진귀한 것으로 과거에는 그 어떤 생명도 우주대법을 접촉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수련의 성패(成敗)는 이미 우주대법의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구도와 하나로 연계되어 있다.

한 생명의 무상한 영광은 그가 생명을 우주대법이 생명을 구도하는 것을 실증할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한 생명의 무한한 비애(悲哀) 역시 수련의 기연(機緣)을 파악할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는데 왜냐하면 자신의 사람의 기점을 개변하려 하지 않는다면 질적인 비약을 잃게 될 것이며 법을 실증할 수 없고 법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심지어 반작용을 일으키는데 이는 더욱 큰 비애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련의 후기에 개인적인 깨달음은 다음과 같다.

수련의 기점을 완전히 전변해 법을 크게 보고 법을 중시할 수 있는가 여부는 한 대법 수련인이 수련의 최후단계에서 진정으로 수련에 성숙할 수 있는가 여부와 대응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9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