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풍
【정견망】
《전법륜》에는 “마음을 움직임(動心)”이란 단어가 여러 번 나오는데 여기서는 마음을 움직임에 관한 약간의 깨달음을 말해보고자 한다.
나는 이 ‘마음’이 다른 공간에서 하나의 살아있는 것이며 소위 ‘마음을 움직임’이란 하나의 실제 장면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왜 움직일 수 있는가? 속인은 명리정(名利情)을 위해 살기 때문에 명리정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지만 수련인은 명리정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으로 마땅히 이런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물론 수련과정 중에서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란 불가능한 것으로 수련의 부동(不同)한 층차와 부동한 단계에서 부동하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어떻게 파악하는지 보아야 하는데 우리 수련 층차의 제고에 따라 마음의 움직임이 갈수록 더 적어질 것이며 완전히 움직이지 않음에 도달할 때면 곧 진정한 원만이다.
우리의 선천적인 마음은 순정(純淨)한 것으로 아무런 집착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아동은 ‘순결한 심령’을 지녔다고 말하는데 이는 비유가 아니라 진실한 모습이다. 나는 천목이 닫혀서 수련하지만 때로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순정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끊임없이 성장해 속인사회를 접촉함에 따라 각종 명리정에 대한 집착이 마음 위에 달라붙으면 마음이 점점 더 더러워지고 점점 더 불순해진다. 만약 이를 명확히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이 마음의 일부가 되어 각종 집착이 우리에게 업력을 짓게 만든다. 동시에 우리의 모습과 똑같은 ‘가아(假我)’를 만드는데 게다가 이런 ‘가아’는 또 하나만이 아니다.
《서유기》에서 가장 대단한 요괴가 바로 육이미후(六耳獼猴)인데 손오공과 거의 동일하게 신통(神通)이 광대해서 심지어 관음보살마저도 구별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 나는 육이미후가 바로 그 가아(假我)임을 깨달았는데 자신의 집착심으로 구성된 것으로 자신이 구해서 온 것이라 다른 사람은 간섭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대단하게 변한 것이다. 다시 말해 가아를 진아(眞我)로 간주한다면 그것의 통제를 받게 되고 사람의 업력이 갈수록 더 커질 것이며 이와 동시에 가아는 갈수록 더 강력해지는데 이렇게 악순환 되면 사람은 갈수록 더 법에서 빗나가게 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의 뿌리는 모두 우주에 박혀 있으므로 누가 당신을 움직일 수 있다면 곧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전법륜》 제1강)
나는 과거에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판결 받았는데 이는 움직인 것이 아닌가? 나중에 점차적으로 이 속에 담긴 한 층의 함의를 깨달았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표준에 도달하고 부동한 층차에서 우리에 대한 법의 요구에 도달했다면 사악은 우리를 움직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미 우리 우리에게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잘 수련하지 못한 부분은 그것들의 힘이 충분히 미칠 수 있다.
명리정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가아’가 형성되었고 또 이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게 된 것이다. 또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에 업을 짓게 된다. 수련 과정 중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가아를 간파하고 그것을 제거하며 동시에 끊임없이 마음을 정화해야 한다. 이것은 또 종종 가장 어려운 것으로 중간에 여러 차례 반복이 나타날 수 있다. 속인은 때로 “사람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라고 하는데 이 역시 이치가 없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모종의 의미에서 말하자면 진정으로 우리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물론 이곳에서는 단지 법리적인 토론일 뿐이며 정법수련 중에서 우리에게 집착이 있다고 해서 사악이 박해할 구실이 될 순 없다. 우리는 이런 박해를 부정해야 하며 또한 그 배후의 사악을 제거해야 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9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