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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부에 대한 작은 깨달음

글/ 소련(小蓮)

【정견망】

최근 동수들과 교류할 때 많은 사람들이 법공부 방면에서 아주 큰 결함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법속에서 흰 종이에 검은 글씨로 아주 똑똑히 쓰신 일부 문제들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은 다 명백하지 않다며 도처로 사람을 찾아다니며 묻곤 한다. 더욱 심한 사람은 직접 나를 찾아와 책을 이미 백번도 넘게 읽었지만 무슨 새로운 내함(內涵)을 볼 수 없다면서 아예 그곳에서 책을 내려놓고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들은 후 정말로 커다란 비애(悲哀)를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법을 배우면서 사실 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들은 무의식중에 법(法)을 사람 중의 서적으로 여기고 보는데 이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속인 중의 서적을 볼 때면 늘 어느 방면에서 말한 것이 옳으며, 자신의 어떤 생각이나 관념에 부합한다고 여기게 된다. 심지어 하루에 열 줄 주마간산 식으로 대충 읽는데 그럴 때면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법을 공부할 때 아주 많은 사람들이 고요해지지 못하면서 마음이 늘 아주 들떠있는데, 이때 설령 법공부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해도 역시 많은 내함을 깨달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법속에서 어떤 내함을 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품고 있을 때 이 자체가 바로 하나의 구하려는 마음이다. 이는 사부님께서 《정진요지》 ‘법을 배우다(學法)’ 문장에 제창하신 게 아니다.

나의 경험은 이렇다. 평소 일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은 가급적 평화롭고 상화로운 상태를 유지해야 하며, 법을 배울 때는 우선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조용하게 한 후에 법공부를 시작한다.

법공부 과정 중에 어떤 염두든 다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조용히 보는 것이다. 이때는 사실 또 철저하게 자아관념을 내려놓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수련의 시작부터 끊임없이 각종 사람 속에서 형성한 것을 내려놓는 것이고 종전에 부동한 층차 및 자신이 처음에 최초 그곳에서 형성한 변이된 요소들을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조용한 마음으로 법을 배우는 과정은 바로 자신을 깨끗이 씻는 과정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법공부를 할 때 왜 수확이 아주 적은가? 나는 개인적으로 법을 공부할 때 각종 관념이 무형 중에서 저해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본다.

나는 법을 공부할 때 내 생명 속의 모든 것을 다 법 속에 놓는데 이때 법의 힘이 자연히 내 몸에서 펼쳐져 나오고 수많은 관념들이 순간적으로 법의 힘에 의해 깨끗이 제거된다. 아마 어떤 동수들은 이런 표현을 잘 이해하지 못할지 모른다.

좀 더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철저하게 모든 관념을 내려놓아야 하며 관념을 사용해 법을 가늠하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법으로 관념과 변이된 요소를 깨끗이 씻어야 한다. 무조건 대법에 동화해야 한다.

무조건 대법에 동화함을 말하면, 우리 많은 사람들이 일에 부딪혔을 때 명리정(名利情)의 집착에서 우러나와 늘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동수들을 만날 때면 나는 이렇게 반문하곤 한다.

“당신들이 무슨 일이든 다 당신들이 이해하고 명백해져야 한다면 이 길은 당신 자신이 배치하는 게 아닙니까? 반대로 말해 어떤 일의 출현이 왜 기어코 당신이 이해해야만 발생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다시 반대로 말해서 왜 발생한 일을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까요? 이는 당신 마음속에 아직도 사부님을 믿지 못하고 대법을 믿지 못하는 요소가 있음을 설명하기에 충분합니다. 수련의 길은 어느 개인의 관념이 형성한 틀에 따라 배치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사유는 구세력의 그런 사유와 무엇이 다릅니까?”

사실 어떤 일이든 우리 관념 속에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발생한 데에는 모두 원인이 있다. 대부분의 원인은 모두 우리 관념이 장애(障礙)해 진정으로 마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수련인으로 말하자면 누락이 있는 것이다.

“무조건 법에 동화함”은 한마디 빈말이 아니며 한마디 호언장담은 더욱 아니다. 또 실천 속에서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개변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자면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공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법공부를 형식적으로 하는데 두 시간을 읽으면 일을 마쳤다고 여기고 나머지는 곧 일을 하러 나간다. 하지만 이런 일을 만약 우리가 모두 속인의 심태로 가서 한다면 자연히 충분히 신성(神聖)하지 못할 것이며 반대로 법공부 효과에 영향을 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교류할 때 늘 이렇게 말하곤 한다.

“어떻게 해야만 보다 많은 법속의 내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나는 당신들이 모두 ‘기술적인 측면’을 생각해서 어떤 수단을 통해 법공부가 좋은 효과에 도달하게 하고자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매 사람의 근기와 오성 및 상태가 다 달라서 법이 펼쳐주는 방식 역시 달라지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치적인 경험을 말한 것 외에 나는 열려서 수련하기 때문에 일부 특수한 상태가 있지만 꼭 공통성을 지닌 것이 아니다. 때문에 나 개인이 이 방면에서 어떻게 하는지 너무 구체적으로는 말할 수 없다.

총체적으로 말해 법의 내함은 문자를 파고들어서 파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생명의 심성(心性) 상태에 근거해 펼쳐져 나오는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97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