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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이 덕을 쌓아야 후손이 복을 받는다

글/ 명각(銘刻)

【정견망】

풍초맹(馮肖孟)은 청나라 때 광동성 남해(南海) 장두(莊頭) 사람이다. 그는 타고난 성격이 너그럽고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평생 이런 말을 받들어 행했다.

“한 푼 너그럽게 대하면 타인이 한 푼의 혜택을 입고, 한 푼 각박하게 하면 자손이 한 푼의 복을 잃는다.(寬厚一分,他人受一分之惠;刻薄一分,子孫減一分之福)”

그의 아내 간(簡)씨도 마찬가지로 대의(大義)에 밝고 선행을 잘 했다.

어느 해에 기근이 들었는데 마을에 생활이 곤란한 사람이 자기 아들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려고 했다. 계약을 다해 놓았는데 풍초맹이 이 소식을 듣고는 매우 가슴 아파하며 그에게 돈을 보내줘 일가족이 생이별하는 고통을 겪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풍초맹은 빈곤한 사람들을 무수하게 구제했다. 또 가난한 사람이 빌려간 돈이나 양식에 대해 상대방에게 상환을 요구하지 않았고 스스로 빚 문서를 태워버렸다. 한번은 그가 벼를 사서 돌아온 후 창고에 부을 때 그 속에 뜻밖에도 안에 열냥의 금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풍초맹은 돈을 잃어버린 주인을 찾아 나서 돌려주었다.

풍초맹는 또 유명한 스승을 초빙해 학교를 만들고 친척들이 가난 속에서도 자제들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풍초맹은 선행과 덕을 쌓은 일로 하늘의 복을 얻어 자손이 크게 번성했고 둘 다 80이 넘어서까지 건강했다. 아울러 그가 쌓은 덕이 후손들에게까지 혜택이 미쳤다. 그의 손자 풍성수(馮成修)는 재주가 출중하여 건륭 4년 진사가 되었고 이후 이부낭중(吏部郎中)이 되었고 또 귀주독학(貴州督學), 월수서원(粵秀書院)산장, 월화서원(越華書院)산장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당시의 유명한 명신재자(名臣才子)였다.

또 증손자 풍사형(馮斯衡)은 거인에 붙어 지현(知縣)이 되었고 사도(斯倬)는 부공(副貢)이 되었다. 또 사좌(斯佐)는 우공(優貢), 사위(斯偉) 역시 가경 18년에 거인에 붙어 지현에 임명되었다.

풍초맹은 이렇게 오래도록 병 없이 살았고 자손들이 성공해서 가문이 부귀영화하는 복을 오랫동안 누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명(明)나라 때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던 왕양명(王陽明)은 역사적으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매우 큰 계발을 준다. 왕양명이 당시 이룩한 성취는 그의 부친인 왕화(王華)가 여색을 거절하고 덕을 쌓은 일과 관계가 있다.

왕화가 젊었을 때 어느 부잣집에서 가정교사를 지냈다. 그의 인품이 좋고 학문도 뛰어나자 그 부호는 그의 재주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부호에게는 많은 노비와 처첩(妻妾)이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밤 부호의 한 젊은 첩이 왕화의 침실에 찾아왔지만 왕화는 그녀를 거절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이는 주인의 뜻입니다.”

종이에는 “인간세상의 아들을 구하고자 합니다(欲求人間子)”고 쓰여 있었다.

왕화는 즉시 붓을 들어 그 옆에 “하늘의 신이 두렵습니다(恐驚天上神)”라고 쓰고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다음날 사직하고 그 부호의 집을 떠났다.

나중에 그 부자가 한 도사를 청하여 초제를 지내며 복을 기원했다. 도사가 무릎을 꿇고 상주문을 바칠 때 바닥에 오랫동안 엎드려 일어나지 않았다. 부호가 이상히 여겨 원인을 물었더니 도사 가 말했다.

“방금 제가 상주문을 남천문(南天門)에 올렸더니 천상의 뭇신(衆神)들이 장원방(狀元榜)을 영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통과하느라 오래 걸렸습니다!”

부자가 물었다.

“장원이 누구였습니까?”

도사는 “이름은 모르겠지만 장원급제한 사람이 탄 말 앞에 깃발 두 개가 있었습니다. 깃발에 대련이 쓰여 있었는데 ‘인간의 아들을 구한다, 하늘의 신이 두렵다(欲求人間子,恐驚天上神)’고 적혀 있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왕화는 과연 과거에 장원급제했고 나중에 관직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까지 이르렀다. 또 정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부부 사이가 아주 좋았다.

왕양명이 태어날 때 그의 조모는 꿈에서 선악(仙樂)이 울리고 깃발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한 무리 신선들이 구름을 타고 어느 어린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이때 한 천신(天神)이 높이 소리 높여 외쳤다. “귀인께서 오셨다.” 그리고 나서 신선들은 구름을 타고 떠나갔다.

그의 조모는 깨어났고 곧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이때 시녀가 알려주기를 정씨 부인이 아들을 낳았다고 알려주었다. 이가 바로 왕양명이었다.

왕양명은 평생 학문 학교를 만들고 선을 행하는데 힘썼으니 그의 공명과 학문은 고금에 추앙받고 있다. 그는 또 많은 격언들을 남겼다.

“이른바 성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하늘의 이치에 순수하기 때문이며 재주와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평범한 사람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이 마음이 하늘 이치에 순수해지면 성인이 될 수 있다.”

“천지가 비록 크다 해도 한마음으로 선(善)을 향하고 마음에 양지(良知)를 지니면 비록 범부나 속인이라도 성현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왕양명 부자 두 사람이 일을 하면서 모두 ‘양지(良知)’를 따랐으며 후세인들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중공 당문화(黨文化)의 독해가 아주 깊어 이미 선악을 구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본래 덕을 쌓고 선을 행하는 것을 모두 ‘바보’같은 행동이라 여기며 하려 하지 않는다. 또 본래 고인들이 보기에 매우 나쁜 일이고 조상이 업을 짓고 악행을 하는 것을 모두 ‘좋은 일’로 여긴다.

예를 들면 파룬궁 박해에서 파리 대가리만한 자그마한 이익을 위해 파룬궁 수련생을 신고하거나 파룬궁 수련생의 장기를 적출하는 죄악에 가담하거나 적극적으로 파룬궁을 모함하고 세인을 독해시키는 등이다.

또 본래 색을 거부하는 것은 덕을 쌓는 선행이지만, 중공은 반대로 둘째 첩, 셋째 첩 …, N번째 첩 등을 얻는 것이 관료사회의 풍습이자 잠재 규칙이 되었으며 신분의 상징으로 되었다.

조상이 덕을 쌓아야지만 후세에 자손이 번창하고 가족이 장기간 발전할 수 있음을 다 알면서도, 중공은 세인들을 미혹시킨다. 그 결과 조상이 업을 지어 자손이 끊어지게 한다. 이것은 인류를 훼멸하는 수단이 아닌가?

저우융캉(周永康)은 파룬궁을 박해하고 교통사고를 위장해 원래 아내를 죽이고는 장쩌민의 질녀를 새 아내로 맞이했다. 자발적으로 파룬궁 박해 원흉인 장쩌민에 빌붙어 관직이 점점 더 높아졌고 나중에는 정치국 상임위원까지 되었다. 모두들 조상을 빛낸 일이라고 여겼고 그의 고향집 문 앞에는 매일 호화로운 차량들이 출입하며 저우융캉 가족들을 찾아오곤 했다.

하지만 나중에 결과는 어떠했는가?

저우융캉이 체포된 후 고향집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으며 본인은 무기징역 처분을 받고 아내와 아들인 저우빈마저 잇달아 판결을 받았으며 며느리마저도 결국은 권력을 추종했다.

그의 자손들이 일시적으로 영광을 누리긴 했지만 왜 오래가지 못했는가? 바로 저우융캉이 파룬궁을 박해했고 파룬궁 수련생들의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해 폭리를 취하는 극히 큰 악행에 참여하여 자신의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저우융캉 일가가 받은 인과응보는 현재 중공 당국이 파룬궁을 박해한 죄악을 덮어 당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타난 표현에 불과하며 진정으로 두려운 응보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또 보시라이(薄熙來)는 누구나 알다시피 중공 원로인 보이보(薄一波)의 후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 잔혹한 수단으로 파룬궁을 박해해 장쩌민의 인정을 받아 중용되었고 줄곧 승진도 빨랐다. 하지만 결국에는 응보를 받아 중공 법률에 따라 무기 징역을 받았다. 또 아내 구카이라이와 협의이혼에 서명한 후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보 씨 가문이 내 손에서 망했구나.”

이는 그가 파룬궁 박해가 극히 큰 죄악이며 파룬궁 박해가 보 씨 가문을 망하게 했음을 알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68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