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풍
【정견망】
최근 수련이 좀 느슨해졌다. 비록 시간의 긴박함을 알고는 있지만 늘 정진하지 못했다. 진지하게 안으로 찾으니 내게 아주 깊이 감춰진 한 가지 생각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이렇게 다년간 감옥에 갇혔고 아주 많은 것을 잃었으며 나온 후에도 비록 그리 정진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수련하고 있으니 어찌되었든 자신에게 공로(功勞)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장래에 어찌되었든 일정한 과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특히 과거에 확실히 아주 많은 대가를 치른 그런 사람들, 대법 일 역시 아주 많이 한 사람들도 많든 적든 유사한 생각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자신이 느낀 소감과 깨달음을 말해보겠다.
우선 우리가 받은 박해에 대해 말해보자. 중공이 대법을 박해한 이래 무수한 제자들이 체포되고 판결 받고 처벌 받거나 유리실소(流離失所)하면서 아주 많은 것을 잃었고 대가도 아주 많이 치렀다. 물론 우리는 박해에 반대해야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박해가 발생할 수 있는 원인은 우리 자신이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제 위치까지 할 수 있었다면 업력이 정말 아주 작아져서 박해 역시 발동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윤회하면서 우리의 업력은 일찌감치 우리를 훼멸시키기에 충분하지만 사부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그중 절대부분을 감당하셨고 우리가 감당하는 것은 표면에 불과할 뿐이다. 속인 층차에서 보자면 제아무리 참혹하게 보일지라도 역시 아주 작고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때문에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다는 생각을 지녀선 절대 안 된다.
또 우리가 한 대법 일을 말해보자. 우리는 인간 세상에 내려오기 전에 사부님과 계약을 맺었다. 때문에 우리가 지금 하는 것은, 전단지를 나눠주든, 진상전화를 걸든, 문장을 쓰든, 다른 그 어떤 일을 해도 다 좋은데 모두 자신의 상황에 따라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잘 깔아주셨기 때문이며 우리는 스스로 걸어갈 뿐이다. 다시 말해 오랜 연대 이전에 우리가 맺었던 그 계약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며 아울러 이 과정에 사부님의 가지(加持)가 없었다면 역시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속인 중에서도 신용을 지키는 것을 중시하는데 계약을 했으면 이행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과시하거나 또는 스스로 만족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하고 관건적인 한 가지가 있다. 수련인으로서 우리가 감당하는 일체 고통은 모두 덕(德)으로 전화되는 동시에 우리가 대법 일을 할 때도 위덕(威德)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이미 전부 다 공(功)으로 전화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 일단 자신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그럼 층차가 떨어져야 한다. 대가를 얼마나 많이 치렀든, 한 일이 아무리 많든 상관없는데 정말로 헛수고가 된다.
내 기억에 어느 날 새벽 연공을 끝낸 후 느낌이 아주 좋았다. 오전에 일을 하러 나가다가 우연히 아주 예쁜 여자를 만났다. 일시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머릿속에 사념(邪念)이 생겨났는데 직장에 돌아오자마자 한 동료가 핸드폰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세요, 이 기사가 이렇게 많은 기름을 넣기가 쉽지 않은데 단번에 다 새나가 버렸어요. 몇천 위안은 될 텐데 너무 아깝네요.”
나는 곧바로 이는 사부님께서 나더러 자신의 층차가 떨어졌다고 점화해주신 것임을 깨달았다. 물론 일반적으로 말해서 밑바닥까지 떨어지진 않겠지만 매우 애석한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농작물을 재배하는데 천신만고 끝에 키워냈지만 보관에 주의하지 않아 적지 않게 상해버린 것처럼 과거에 치른 대가가 모두 헛수고가 되었으니 애석하지 않겠는가?
“이 한 기간은 길지 않을 것이지만 도리어 부동한 층차의 위대한 각자(覺者), 불(佛)·도(道)·신(神)과 부동한 층차의 주(主)의 위덕을 단련해 낼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을 느슨히 하는 한 수련자로 하여금 이미 굉장히 높은 층차에서 하루아침에 망가지게 할 수 있다.”
(《정진요지 2》〈정법시기대법제자〉)
나는 지금 이 단락 법에 대한 감수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전에는 깊이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내심에서부터 이것이 너무나도 진실하고 정확한 것임을 아는데 과거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든 정말로 그곳으로 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속인 중의 일이 아니며 사부님께서 자비롭지 않아서는 더욱 아닌데, 수련의 초상성과 엄숙성 역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많은 공로가 있다는 생각을 가져선 절대 안 되는데 이 자체가 바로 일종의 집착이다. 수련은 구함이 없어야지만 저절로 얻는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1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