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공산주의 유령은 어떻게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가:법률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일찍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을 통렬히 비난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비록 모세 율법의 표면적인 규칙은 엄격히 준수했지만 율법에서 요구하는 공의(公義)・연민(憐愍)・신실(信實) 등의 덕성은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반면 예수는 표면적인 글자 뜻에 얽매이지 않고 안식일에도 환자를 치료했고 유태인이 아닌 이민족과 동석했다. 왜냐하면 예수가 마음에 둔 것은 율법 속에 담긴 이런 선(善)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큰 진동을 받았다. 이에 생각해보았다. 율법의 표면적인 뜻이란 무엇일까? 알파벳 자모 배열의 조합으로 냉담하고 융통성이 없으며 무정한 문자에 불과하다. 또 구구절절 틀에 박혀 넘어갈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반면 율법의 정신이란 무엇일까? 문자 배후의 신성(神性)으로 충성, 자비, 정의의 인격에 대한 교화다.
모세의 십계(十戒)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 신(神)의 계명(誡命)으로 다시 말해 사람의 법률이다. 율법의 초심은 아마 율법의 정신에 있었을 것이다. 율법의 정신은 충실하고 빛나는 것으로 인성(人性)이 있고 영혼이 있으며 따스함이 있는 것이다. 이런 계율에 따라 자신의 내심을 단속하면 행동에도 하한선이 생기며 사람이 지옥에 떨어질 정도로 패괴(敗壞)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 마음속에는 또 정통적이고 전통적이며 신성하고 고귀한 일면이 있다. 이렇게 하면 단순히 신의 돌봄과 보우를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하면 또 천국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율법 배후에 있는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율법의 정신에 따라 자신의 심령을 단속하는 것이 진정으로 법을 지키고 법을 수호하는 것이다.
기계적이고 융통성 없이 막무가내로 율법의 글자적인 규칙만을 엄격히 준수하면 영혼의 층면에서는 신성(神性)한 품행유지를 약화시키고 육체적으로 표증의 행위를 조작해 기준에 도달하는 것만을 강화하는데 다시 말해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쫓게 된다. 만약 행위적으로는 제 위치에 도달해서 완전히 율법 표준에 도달할 수 있더라도 내심은 시종 텅 비고 냉랭해서, 따스한 영혼이 없고 진솔한 사상이 없으며 마음에 연민이 없을 것이다. 그럼 마치 매뉴얼에 따라 로봇을 작동하는 것과 같다.
로봇은 정확하고 오류 없이 명령을 집행할 수 있지만 그것에는 영혼이 없고 생각이나 도덕 판단 및 지조가 없다. 이렇게 율법을 지킨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쫓는 것이 아닌가? 이는 남의 것을 무작정 모방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와 율법 이야기에서 나는 또 대법수련을 연상해보았다.
사부님께서 우리더러 세 가지 일을 잘하라고 요구하신 것은 마치 모세가 정한 율법과 마찬가지로 사부님의 계명(誡命)이다. 바리새인들처럼 곧이곧대로 율법의 표면적 정확함만을 실천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처럼 율법의 정신을 이해하고 율법의 핵심을 깨달아 율법의 신성에 도달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가령 진(真)을 닦음을 말하자면 표면적인 뜻은 진실을 말하고 진실 된 일을 하며 거짓말이나 사기를 치지 않고 남을 속이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또 진실하고 성실하면서도 충직한 내함(內涵)이 있고 성심성의껏 진심(真心)을 닦아내고 충성스럽고 돈독한 신념(信念)을 닦아내야 한다. 전에 나는 진실을 말하면 바로 사실을 곧이곧대로 서술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다. 성심(誠心)이 담긴 진실이라야만 따스한 온기를 지닌 진화(真話 진실한 말)이고 이렇게 하는 것만이 대법수련자의 진화이다. 성의가 부족한 진화는 바로 냉담하고 무미건조한 실화(實話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함)이며 이는 사람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다.
다시 참음(忍)을 닦는 것을 말해보자. 표면적으로는 맞아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먹어도 대꾸하지 않으면서 마음을 편안히 하고 무위(無爲)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넓은 흉금으로 이해하고 관용하며 양해하는 것으로 인간세상의 일체 은혜와 원한에 대해 모두 웃으며 대할 수 있는 박대(博大)함이다. 표면적으로 위아래도 다투지 않음은 행동에서의 참음이고 내심으로 넓은 흉금을 품는 것이야말로 철저한 내려놓음이다. 만약 행동에서는 겉으로 감정을 나타내지 않아도 늘 마음속에 담아둔다면 원한(怨恨)은 바로 밖에서 안으로 눌려 들어간 것이다. 사람 내심의 원한이 바로 지뢰인데 일단 건드려지면 또 폭발하고 쟁투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또 진상을 알릴 때 표면적으로 자료를 배포하고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부치고 직접 만나 3퇴를 권하는 등의 일을 한다. 실질적으로는 모든 중생을 내 몸처럼 여기고 심지어 나와 인연이 없는 중생에 대해서도 대자대비(大慈大悲)할 수 있는 선심(善心)을 닦아내야 한다.
만약 단순하게 일만 한다면 로봇도 할 수 있는데 아마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더 효율적이고 더 정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봇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가? 로봇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은 영혼이 없고 인성이 없어서 사람을 구할 수 없다. 교육이란 한 나무가 다른 나무 하나를 흔들고 한 조각의 구름이 다른 구름 조각 하나를 일깨우는 것이다. 오직 심령(心靈)과 심령이 만나고 사상과 사상이 교류해야만 비로소 사람을 일깨울 수 있고 비로소 사람을 구도할 수 있다.
법리(法理)는 문자적인 의미와 표층의 요구를 볼 수 있지만 문자 배후에는 박대(博大)한 내함과 정화적인 현기(玄機)가 있어 한 층 한 층 깊이 들어갈수록 심오해서 예측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법리 중에서 심성에 대한 요구는 도외시한 채 간단히 기계적으로 글자 표면에만 따라서 그대로 베껴 쓰듯이 일을 한다면 이는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만약 마음을 닦는 본질을 파악하지 않고 심성에 공력을 들이지 않고 형식에만 치우쳐 바쁘게 세 가지 일을 한다면 표면적으로 제아무리 바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요령을 얻지 못한 것으로 결국 원하는 것과 반대의 것을 얻게 된다.
사부님께서는 《홍음》〈유위〉에서 말씀하셨다.
절을 짓고 신을 모시느라 정말 다망하지만
유위란 한낱 헛된 노릇임을 어찌 알리요
어리석고 미혹되어 서천(西天) 길 망상하나니
더듬더듬 밤길에 달을 건지고 있네
마음을 법에 두지 않고 사람 일만 바쁘게 한다면 설령 제아무리 많은 일을 했을 지라도 결과는 대나무 바구니로 물을 뜨는 것처럼 헛수고에 불과할 뿐이다. 심성(心性)이 올라가지 못하면 공(功)이 자라지 않고 층차가 제고되지 않으며 과위도 아주 낮을 것이다.
오직 사람마음이 변하고 심성이 승화해야만 안에서 겉에까지 자비를 퍼뜨릴 수 있고 안에서 밖에까지 빛을 발산할 수 있으며 세상을 제도하고 사람을 구할 수 있다.
법(法)의 내함(內涵)을 깨닫고 법의 요의(要義)를 해낼 수 있어야지만 비로소 진정한 신사신법(信師信法)이고 정진할 수 있는 정념정행(正念正行)이다.
개인의 작은 견해이니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2714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