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최근 동수와 교류과정에 언급한 법을 공부할 때 마땅히 주의해야 할 몇가지 관건적인 문제에 대해 써내니 동수들이 중시하고 제때에 법을 공부할 때 부정확한 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진정으로 법에서 제고해 올라갈 수 있고 굽은 길을 적게 걸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대법제자가 조사정법(助師正法)하는 신성하고 위대한 길을 바르게 걸을 수 있다.
내 생각에 우리 지역이든 아니면 다른 지역이든 모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하나는 오직 사부님 말씀에 따라 매일 법 공부를 많이 하기만 하면 요구와 표준에 도달한 것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법을 많이 배울수록 더욱 정진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어쩌면 이 역시 우리 수련생 자신이 단편적으로 “법공부와 법을 얻음”을 이해한 것일지 모른다. 나는 며칠 전 사존의 《창춘보도원법회설법》의 문답을 읽고 약간의 심득이 있었는데 여기서 그 문장을 인용해보겠다.
“제자: 관념과 집착심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사부: 당신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당신은 늘 잡고 내려놓지 못하는데,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당신에게 간단히 말하면, 어떠한 것이든 당신이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모두 집착인바 이것은 아주 간단하다. 당신들 중 아주 많은 사람이 법 공부가 부족하다. 당신들의 법 공부가 부족한 원인은 당신들이 법을 공부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당신들이 적게 공부했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속인의 관념을 품고 공부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심리요구에 부합된, 그것을 골라 당신은 좋다고 느끼면서 당신은 그 편을 골라서 본다. 당신은 당신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거나 당신과 관계가 없으면, 나아가 당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당신은 보지 않고 가려서 보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영원히 수련해 올라갈 수 없다. 당신은 내가 『전법륜(轉法輪)』 속에서 말한 문제가 당신의 수련과 관계가 없고, 心性(씬씽)과 관계가 없다고 보지 말라. 그 속에는 부동한 층차, 부동한 형식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당신은 내가 공(功)을 말한다고만 보지 말라. 당신에게 알려주는데 그 속에 心性(씬씽)의 것이 모두 들어있다. 그는 체계적이므로, 당신이 한 편이라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당신들이 만약 이 관념을 개변할 수 없다면 정말로 당신들의 제고에 영향을 줄 것이며, 원만(圓滿)에 영향을 줄 것이다.”
“당신들 중 아주 많은 사람이 법 공부가 부족하다.”는 구절을 볼 때 나는 “부족(不够)”이란 두 글자가 아주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무엇이 부족한가? 글자 표면 뜻에서 보자면 마치 이해가 어렵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또 뭔가 좀 아주 분명하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에 나는 자전(字典)을 찾아보았다.
원래 ‘구够’라는 글자의 표면적인 뜻은 ‘도달하다’ ‘~에 미치다’는 것이다. 가령 ‘구득착(够得着)’은 (힘이) 미치거나 닿는다는 뜻이고 ‘구격(够格)’은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격(格)’자의 표면적인 의미에는 표준(標準)이란 내함이 있다. 그렇다면 ‘구격’은 일정한 표준에 도달했다는 뜻이 되고, 만약 점수로 말하자면 ‘합격에 이르렀거나’ ‘합격에 도달한’는 표준이 되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럼 현재 내 층차에서 이해한 ‘부족’이란 일정한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또는 아직 합격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런 한 층의 내함이 담겨 있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내가 이해하기에 우리가 오직 매일 법을 공부하기만 하거나 또는 법을 아주 많이 배운다고 해서 사존께서 요구하신 표준에 도달한 것으로 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법은 엄숙하고 신성한 것으로 그 어떤 순정하지 못하고 뭔가를 구하려는 심태를 품고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아주 작디작은 불순한 마음이라 해도 그렇다. 왜냐하면 우리가 닦는 것은 신우주(新宇宙)의 근본대법으로 사존의 요구 역시 반드시 가장 높고 가장 엄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체는 모두 미래 신우주의 안전과 미래 생명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며 동시에 또 사존께서 우리더러 진정으로 법을 얻고 장래 우리 자신의 세계와 중생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질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층차에서 이해하기에 ‘공부가 충분’한 표준은 마땅히 최소한 “법을 배워 법을 얻을 수 있는” 이런 수련상태에 도달했을 때라야만 기본적으로 공부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법을 얼마나 얻을 수 있든지 막론하고, 최소한 진정으로 얻을 수 있어야지만 비로소 법을 얻은 것으로 칠 수 있다. 비로소 ‘공부가 충분’한 최소한의 표준에 도달하거나 또는 합격했다고 말할 수 있는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아울러 무엇이 충분히 공부한 절대적인 표준인가를 말하자면 그럼 대법 자체에 가늠하는 표준이 있다. 이 역시 우리 수련인이 평판(評判)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존께서 판정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매 대법제자마다 수련의 길이 다르고, 시간 배치나 생활과 업무환경이 다르며, 수련상태 역시 다르기 때문인데 이런 것들이 모두 누구누구는 법을 충분히 배웠고 누구누구는 부족하다고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게 만든다. 오직 “법을 배워 법을 얻을 수 있는” 이런 수련상태인지 여부만이 비로소 공부가 충분한지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가장 낮고 기본적인 가늠하는 표준이자, 합격에 도달했다거나 또는 합격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가늠하는 표준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공부가 충분한’ 것인지 이지적으로 잘 구별해야만 한다. 자신이 법을 공부할 때 어떤 ‘속인의 관념’을 품고 배우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말하자면 그럼 오직 매 수련생 자신의 근기와 오성 및 착실한 수련 중에서 진정으로 제고해야지만 비로소 관찰할 수 있다. 나 자신의 체험은 매번 법을 공부할 때 가장 순정(純淨)하고 가장 경건한 심태로 법 공부를 대해야 하며, 대법이 말한 것이 옳고, 사존께서 말씀하신 것은 우주의 진리이니, 그렇다면 나는 완전히 이 신우주의 근본대법에 동화해야만 한다!
두 번째 문제는, 대법을 외우기만 하면 자신이 진정으로 법을 얻은 것이라고 여기거나 또는 대법을 통독할 때 오직 글자를 틀리지 않고 읽을 수만 있다면 진정으로 자신이 법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 현지에 이런 동수가 있다. 그녀는 수많은 사존의 법을 외울 수 있지만 교류할 때면 법리의 인식방면에서 일부 기초적인 법리의 내함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을 발견한다. 가령 ‘병업관(病業關)’에 대한 이해마저도 분명하지 않았다. 그녀가 비록 일부 법리를 인식할 수 있지만, 내가 이해하기에 진정으로 자신이 착실히 수련한 심각한 체험과 깨달음이 아니었다. 그럼 왜 이렇게 장기간 부정확한 수련상태가 나타날 수 있는가?
얼마 전 사존의 《미국동부법회설법》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
“수련이란 이 인체(人體)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반드시 사람 이쪽에서 수련해야만 비로소 개변할 수 있다. 어떤 때 대법 책을 보는데, 당신이 정력을 집중하지 않고, 입으로는 그를 다 읽었지만, 사상이 있지 않은데, 그것은 당신의 副意識(푸이스) 혹은 다른 방면의 것이 역시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당신의 사상이 이따금 나타났다가는 잠시 후 또 없어진다. 만약 당신이 늘 이 문제가 나타난다면 당신은 이 일체를 포기한 것과 같으며 이 법을 다른 사람에게 준 것과 같은데 이는 안 된다. 나 또한 이렇게 수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당시 내 층차에서 이해한 한 층 법의 내함 속에서 사존께서는 주의식(主意識) 또는 부의식(副意識) 중에서 누가 법을 얻는가 하는 문제를 말씀하셨다. 만약 우리가 법을 배울 때 입으로는 글을 읽지만 사상은 오히려 따라가지 못하고 다시 말해 사상이 없다면 그럼 이런 상태는 곧 자신이 방금 읽은 법의 가장 표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도 분명히 모르거나 또는 그 한 구절의 법을 읽는 순간 제때에 자신의 부족한 점이 어디에 있는지 제때에 대조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이렇다면 주의식이 명백하게 법을 배우고 법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다. 아울러 이런 상태는 아주 쉽사리 부의식 또는 다른 방면의 생명체가 법을 얻게 할 수 있는데 그럼 이렇게 하는 것 역시 진정으로 자신이 수련하는 게 아니다.
동시에 이런 상태는 또 아주 쉽사리 일종 “외우기 위해 외우고” “읽기 위해 읽는” 관성적인 사유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왜냐하면 한 초등학생더러 법을 외우라고 하면 아주 빨리 외울 수 있는데 학생은 기억력이 좋다. 하지만 그가 법을 얻을 수 있는가? 법리에 명백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 역시 일종 쉽게 관찰할 수 없는 구함이 존재하는 상태가 된다. 또한 아주 깊이 은폐된 사람마음이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설령 그런 것이 아주 약간만 존재한다 해도 모두 구함이 없는 표준에 도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렇게 법을 외우는 상태는 법에 더 잘 동화하기 위해 법을 외우거나 법을 읽는 것이 아니며, 진정으로 외워낸 법은 자신의 이후 수련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 간단히 법을 외우기만 하면 곧 법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생명이 법을 얻었을 수 있는데 꼭 자신의 주의식이 진정으로 법을 얻은 게 아니다. 왜냐하면 대법은 주원신이 명명백백하게 법을 얻는 것으로 배울 때 자신의 사상조차 없고 법으로 자신의 부족한 점을 대조할 수도 없다면 이런 상태가 어찌 또 법을 얻은 것이고 할 수 있겠는가? 법리의 내함(內涵)이 또 어떻게 현현(顯現)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법을 외우고 법을 읽는 기점이 틀렸다면 그럼 진정으로 법에 동화하기 위한 게 아니라 비자각적으로 “법을 얻기를 구한 것”이다.(이런 상태는 겉으로 보면 구함이 없이 스스로 얻음을 해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구하려는 마음이 섞여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일종 진수(真修)하고 구함이 없는 수련상태가 아니다. 바로 이런 사람마음을 발견하기가 아주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 어떤 동수는 이렇게 다년간 부딪힌 마난(魔難)이라도 좋고 굽은 길을 걸어도 좋은데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 이 점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다시 말해 주의식(진정한 자신)이 법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마난 속에서도 법리(法理)로 우리의 주의식을 지도해 수련하고 이를 통해 위대한 정법수련의 길을 바르게 걷고 잘 걷지 못했던 것이다. 교훈은 심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수들이 사존께서 말씀하신 이 단락의 법을 중시해서 여러 번 읽고 마음을 조용히 하고 깨닫기를 바란다. 사존께서 말씀하신 주의식과 부의식의 관계에 관한 이 방면의 설법(《전법륜법해》에도 이 방면의 문답이 적지 않게 있다)을 여러 번 읽는다면 갈수록 주의식과 부의식을 구별할 수 있고 주원신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사존의 정법(正法)이 갈수록 가장 표면으로 돌파하는 것을 깨닫는데, 이 말은 우리 수련에 대한 요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의식이 갈수록 명명백백하게 수련하는 단계가 되었으며 동시에 또 마땅히 갈수록 더 자신을 잘 파악하고 수련의 성숙으로 나아갈 단계가 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제때에 법 공부 과정 중의 이런 부정확한 상태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럼 법리가 또 어떻게 현현하겠는가? 우리가 또 어떻게 법으로 지도해 정법 수련의 길을 잘 걸을 수 있겠는가?
이상의 체험은 동수와 교류하는 과정 중에 내가 본 일부 문제들이다. 내용에 편파적인 곳이나 법에 없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동수의 진실한 생각과 수련상태를 오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나 자신이 보고 이해한 수련의 일을 써내 여러분들과 함께 교류하는 것 역시 하나의 수련과정으로 칠 수 있다. 만약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다면 여러분들의 자비로운 시정을 바란다. 허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2137